청(淸)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이후 한족들이 해외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당국의 허가 없이 해외로 이주할 경우 반역자로 취급했고, 남은 가족들에게도 형벌을 가했다. 하지만 만주족에 굴복하기 싫은 한족과 삶의 한계 상황에 이른 극빈층들이 정크선을 타고 남쪽 섬나라로 도망쳐 갔다. 그들은 이주한 곳에서 차이나타운을 만들어 집단으로 거주하며 상부상조로 현지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현재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분할하고 있는 보르네오섬 웨스트 칼리만탄(West Kalimantan) 지역에도 18세기에 중국인들이 몰려들었다. 주로 광둥(廣東), 푸젠(福建), 장시(江西) 성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역업과 광산업에 종사했다.

당시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은 한족 가운데 객가(客家)라는 별족이 많았다. 객가족은 왕조교체와 전란을 피해 산간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에게 붙인 이름인데, 남부 해안 지역에 많이 거주했고, 광둥성 발음의 강한 사투리를 썼다.

객가족 후예들로 유명인들이 많다.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洪秀全), 중화민국의 대부 손문(孫中山), 중국 공산당 지도자(朱德), 호요방(胡耀邦), 대만 전 총통 이등휘(李登辉), 싱가포르 초대통리 이광요(李光耀) 등이다.

 

 

나방백(羅芳伯, 루오 팡보)라는 사람도 광둥성 메지저우(梅州) 출신의 객가족이었는데, 서보르네오로 이주해 난방공사(蘭芳公司)를 설립했다. 그는 그곳 중국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보르네오 섬은 이슬람 지역이었고, 각지마다 술탄이 지배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그에게 술탄이 되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1777년 나방백은 중국인들의 선출에 의해 지도자가 되고, 중국인 거주지역에 난방공화국(蘭芳共和國, Lanfang Republic)을 수립했다. 수도는 동만률(東万律)로 지금의 보르네오섬 만도르(Mandor)다.

권력 수반의 명칭은 카피탄 시나(華人甲必丹)라 했는데, 화교촌 공동체의 수장이란 의미다. 정치체제라는 개념으로 보면 대통령에 해당한다. 자바섬을 통치하던 네덜란드인들이 甲必丹을 kapitan이라 옮겨 적으면서 서양에 카피탄으로 알려져 있다.

 

 

나방백은 동양적 전제군주제도와 세습제도를 채택하지 않고 공화정을 수립하고, 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했다. 주요 현안은 주민들의 토의를 거쳐 결정했고, 지방을 중국식 제도를 모방해 조직해 각 지방의 대표를 주민들의 선출에 의해 뽑도록 했다. 또한 입법, 행정, 사법제도를 갖추었다. 정규군은 보유하지 않았지만, 치안과 방어에 필요한 민병대는 조직해 운영했다.

이 중국인 공화국은 프랑스 혁명(1789년) 이전에 수립되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공화국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공화국의 민주주의 제도는 서양의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중국인들의 해외 화교촌의 규율이 적용된 것이다.

해외 화교(華僑)들은 콩시(公司)라는 자치 조직을 만들어 화교촌을 운영했다. 화교촌에는 회관(會館)을 중심으로 자치권을 행사하고, 계를 만들어 운영했다. 콩시는 현대적 개념의 회사라기보다는 자치단체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이 중국적 개념을 도입해 공화정을 운영했다. 조국으로부터 버림받거나, 스스로 조국을 떠난 사람들이 뭉쳐 세력화하면서 생겨난 자발적인 정치체였다.

 

 

난방공화국은 1777년에 건국되어 네덜란드군에게 멸망한 1884년까지 107년간 존재했다. 중국인들은 공화국에서 농업, 제조업, 무역, 광업등에 종사했다. 이 나라는 이웃 원주민이 세운 폰티아낙 술탄국(Pontianak Sultanate)과 대립적 관계에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본국의 청조(淸朝)에 조공과 책봉 관계를 형성했다. 원주민과 네덜란드의 공격에 대비해 중국의 군사적 지원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초대 수반 나방백이 1795년에 사망하고, 강무백(江戊伯, 장우부)가 2대 수반(카피탄)이 되었으며, 그후 멸망할 때까지 12대를 이어갔다. 난방국 국민들은 매번 선거에 참여했으며, 농업기술 개발과 광업 생산 확대, 교육 증잔, 조직적 군사훈련 등을 통해 국부를 늘리고 힘을 키웠다. 덕분에 역내 비중국인들도 공화국에 충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19세기들어 그들의 후원자였던 청나라가 쇠약해 지며 조공국들을 보호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중국을 의식해 난방국을 침공하지 못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보르네오 섬에 진출하면서 충돌이 발생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군대는 1822~24, 1850~54, 1884~85년 등 세차례 난방국을 침공했다. 이 세 번의 전쟁을 콩시 전쟁(Kongsi Wars)이라고 한다. 난방국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네덜란드의 서양식 화포에 밀렸다.

1884년 12대 카피탄 류아생(劉阿生)을 끝으로 난방국은 종말을 고한다. 중국인들의 자치도 소멸하게 된다. 난방국이 멸망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수마트라(인도네시아), 싱가포르로 떠났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청나라를 의식해 난방국을 병합하지 않고 또다른 괴뢰국을 수립해 유지하다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그 일대를 점령해 웨스트 칼리만탄 주를 설치한다.

현재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 웨스트 칼라만탄 주에는 인구 454만명 가운데 중국인들이 8.17%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주로 도시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