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오키나와-필리핀 여행한 문순득
조선말 오키나와-필리핀 여행한 문순득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08.2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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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시말…4년간 표류 여행하며 현지 문물 습득해 정약용, 이강회 등 통해 기록

 

전라남도 신안군에 우이도(牛耳島)라는 섬이 있다. 그곳에 살던 문순득(文淳得, 1777~1847)이라는 홍어장수가 1801년 풍랑을 만나 오키나와와 필리핀, 마카오를 거쳐 중국 대륙을 종단하며 1805년 고향에 돌아왔다. 그 무렵 우이도에는 정약용의 형 정약전(丁若銓)이 유배와 있었다.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지난 4년간의 표류하며 여행한 내용을 구술하고, 정약전이 받아 적었다. 얼마후 정약전이 대흑산도로 유배지를 옮기는 바람에 표류기는 완성을 못했고, 정약용의 제자인 유암(柳菴) 이강회(李綱會; 1789~?)라는 유학자가 그곳을 찾아와 완성을 보지 못한 표류기록을 마무리했다.

유암은 그 기록을 <유암총서>(柳菴叢書)에 묶어 기록했는데, 그 안에 <표해시말>(漂海始末)이란 저술이 문순득의 표류과정을 정리해 주고 있다. 문순득의 후손들은 그 책을 대대손손 보관하고 있다가 공개되었다.

 

<표해시말>에는 우이도 어부 문순득 일행이 유구(琉球) 왕국을 비롯해 당시 스페인이 지배하던 필리핀과 포르투칼의 거류지였던 마카오를 경험한 내용이 담겨있다. 현재 발견된 국내 표류기록 가운데 이 지역과 관련된 유일한 자료다. 그중에서도 여송(呂宋, 필리핀)에 대한 내용이 매우 상세하며, 여송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표류기는 이 문헌밖에는 없다.

 

문순득의 표류 여정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문순득의 표류 여정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주인공 문순득은 우이도에서 살던 중 1801(순조 1) 12월 출항해, 이듬해인 1802118일 흑산도 인근 태사도(太砂島)에서 홍어를 사 가지고 돌아오던 중 흑산도 근처에서 풍랑을 만났다.

일행은 18021월 일본 오키나와의 유구국(琉球國)에 표착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류큐국은 독립국이었다. 유구국 사람들은 문순득 등 표류자들을 잘 보살펴 주었고, 일행은 그곳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8개월 동안 유구국에서 생활한 문순득 일행은 유구국 언어를 배우고, 현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냈다. 방법은 중국으로 가는 유구국의 조공선을 타고 중국에 간 다음 조선으로 건너가는 것이었다.

 

180210, 일행은 유구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에 몸을 싣는다. 그들은 고향집으로 돌아가는줄 알고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중국으로 가는 길에 또 풍랑을 만났다. 2차 표류였다. 이번에는 유구국 남쪽으로 떠내려가 여송국에 표착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일행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문순득만 여송에서 9개월을 지내면서 현지 언어를 습득했다.

18038월 문순득은 여송에서 상선을 얻어타고 마카오에 도착해 난징과 베이징을 거쳐 180412월 조선 한양에 도착하고, 마침내 집을 떠난지 32개월만인 18051월 고향인 우이도로 돌아오게 된다.

 

유암총서 (전남 문화재자료 275호) /문화재청
유암총서 (전남 문화재자료 275호) /문화재청

 

여기까지 끝났으면 그의 기구한 스토리는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문순득은 다시 홍어 장사를 하기 위해 흑산도에 들렀다. 배운 것이 어물장사니, 달리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그는 흑산도에서 유배온 정약전을 만나게 된다.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풍랑을 만나 표류하며 보고 들은 바를 전해주었고, 정약전은 문순득의 체험담을 날짜별로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썼다.

문순득의 표류기는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에게도 전해졌다. 정약용은 여송국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용함을 전해듣고,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화폐개혁안을 제안하게 된다.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로, 남미 칠레 광산에서 생산한 대량의 은()을 아시아에 유통하고 있었고, 아시아, 특히 중국의 통화는 은본위제였다.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제자 이강회(李綱會)를 우이도로 보내 문순득을 만나게 하고, 그를 통해 외국의 선박과 항해에 관해 기록한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집필하게 한다.

 

문순득 /문화재청
문순득 /문화재청

 

한편, 1801(순조 1)5명의 외국인이 제주도에 표착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 외국인들은 9년째 제주도에 머물고 있었는데, 여송국 언어를 알고 있는 문순득이 이들이 여송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여송어로 통역해 그들은 마침내 고향인 여송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순조실록>이 생선장수 문순득의 이름을 기록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순조실록>에 이렇게 적혀 있다.

나주 흑산도 사람 문순득이 표류되어 여송국(呂宋國)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와 의관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그런데 표류되어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이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고 기록했다.

조선 조정은 문순득의 공적을 헤아려 종2품 가선대부 벼슬을 담은 공명첩을 하사했다.

하지만 조선은 해외 물정에 관해 문을 닫고 있었다. 서양에서 들어온 카톨릭을 탄압하고, 그 신앙자들을 유배보내는 나라였다. 문순득의 경험담과 그의 기록에 아무리 좋은 내용이 들어있다 해도 조선의 지배자들은 관심을 두려 하지 않았다.

 

혹자는 문순득을 14세기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라고 비유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담을 로스티켈로라는 이야기 작가가 정리해 불후의 동방견문록을 정리했듯이, 문순득의 표류기는 정약전, 정약용에 의해 정리된 것이다.

문화재청은 2012년말 홍어장수 문순득, 아시아를 눈에 담다라는 주제로 전남 목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특별기획전을 열었다. 전남 신안군 우이도 우이도항에는 문순득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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