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오니아 문명의 중심, 에페수스
고대 이오니아 문명의 중심, 에페수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9.1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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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 문화가 생생하게 보전…아테네 식민지로 출발, 로마 때 소아시아 무역거점

 

우리 고대사에 목말라 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터키 서남부 에페수스(Ephesus)의 그리스·로마 유적지는 부럽기만 했다. 기원전 1천년, 지금부터 3천년 전의 역사가 거대한 돌덩어리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물, 유적지 하나하나에 풍부한 스토리가 담겨 있다. 수천년전의 인간이 살아 있는 느낌이다. 그들이 이용했던 도서관, 목욕탕, 주거시설, 상업시설이 그대로 형체를 드러냈다. 수많은 사람이 밟은 대리석이 빤질빤질하게 달았고, 마차기 지나간 자국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BC 11~8세기 그리스 식민지 /위키피디아
BC 11~8세기 그리스 식민지 /위키피디아

 

규모도 크다. 큰 골짜기 하나에 거대한 석조 도시가 건설되었다. 원형 극장 수용규모의 20배를 거주인구로 파악하면 된다는데, 에페수스 전성기의 인구가 20만명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조선초기에 수도 한양의 인구가 10만명이었다고 하니, 2천년전 에페수스가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 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에페수스는 현재 터키 이즈미르 주(İzmir Province)의 셀축(Selçuk)에 위치하고 있으며, 터키어로 에페스(Efes)로 불린다.

에페수스의 도시명은 고대 소아시아 국가 히타이트의 도시 아파사(Apasa)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중심도시 아테네가 왕정이었을 당시에 에게해 서쪽으로 진출해 식민지로 건설한 도시다.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아테네의 왕 코드로스(Kodros)가 죽자, 아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안드로클로스(Androclos)라는 왕자가 아테네를 떠나 새 왕국을 건설할 자리를 델피 신전에 물었더니, 물고기와 돼지를 따라 가서 미래의 왕국을 만들라는 신탁이 내려왔다. 안드로클로스는 물고기를 따라 소아시아 해안에 도착했고, 돼지를 따라 갔더니 그곳이 에페수스였다는 것이다

 

에페수스는 BC 10세기경 아테네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다. 이 곳은 카리아(Caria)와 렐레게스(Leleges)라는 비그리스계 원주민들이 살던 곳인데, 그리스인들이 이들을 쫓아내면서 도시를 건설했다. 이들은 그리스 신들 중에서 아르테미스(Artemis)를 주신으로 모셨다.

아르미테스 여신상 (에페수스 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아르미테스 여신상 (에페수스 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에페수스는 소아시아 해변의 이오니아(Ionia)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이오니아 연맹 12개 도시의 맹주 역할을 했다. BC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을 때 쇠퇴했지만, BC 4세기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된 뒤 재건되어 헬레니즘 도시로 부흥했다.

BC 129년에 로마의 지배를 받아 아시아 속주의 수도로 지중해 동부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로마 시대에 전성기를 구가했고, 최대인구가 20만을 넘었다고 한다.

 

로마 시절에 에페수스는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이 곳에서 요한복음서가 만들어졌고,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아시아 7개 교회의 하나가 있었던 곳이 에페수스다.

서기 263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고, 그후 재건되었으나 강물에서 유입되는 침전물로 항구가 폐쇄되면서 쇠퇴했다. 614년 대지진으로 도시는 거의 파괴되었다.

 

에페수스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작업은 1863년 영국 건축학자 존 터틀 우드(John Turtle Wood)가 대영제국 박물관의 지원을 받아 시작되었다. 그는 별다른 성과없이 작업을 마무리했다.

1895년에 독일 고고학자 오토 벤도르프(Otto Benndorf)가 오스트리아의 후원으로 발굴작업을 재개해 오늘날의 에페수스를 발굴했다. 그가 발굴한 유물들은 빈의 에페소스 박물관과 셀축의 에페수스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에페수스 유적자의 주요 유물은 다음과 같다.

 

사진=김현민
사진=김현민

 

< 바리우스 욕장 (Varius Baths) >

1926년에 발굴, 복원한 로마시대의 욕장.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지만, 탈의실, 냉탕, 온탕, 화장실등을 갖춘 전형적인 목욕탕이었다. 일반적인 로마시대 욕장처럼 바닥을 통해 가열하는 방식이었다.

 

오데온 /사진=김현민
오데온 /사진=김현민

 

< 오데온 (Odeon) >

2세기경 에페수스의 건축학자 베디우스 안토니우스와 부인 플라비아 파피아나가 지은 야외극장이다. 지붕이 목재로 만들어졌으며, 수용규모는 1,500명이었다. 소규모 콘서트와 시낭송회 같은 행사가 열렸고, 지역 대표들이 참가하는 의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오데온 양쪽 길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지은 바실리카의 터로, 양쪽에 늘어선 이오니아식 기둥 위에 황소 머리 모양의 조각이 있었다. 지금은 기단부분만 남아 있다.

 

관청건물 /사진=김현민
관청건물 /사진=김현민

 

< 관청건물 (Prytaneion) >

도시의 행정을 담당하던 건물로, 지금은 몇 개의 기둥만 남아있다. 도리아식 기둥으로 둘러싼 정원 제단에 꺼지지 않은 신성한 불이 있었다고 한다. 1956년 이곳에서 두 개의 아르데미스 조각상이 발굴되었는데, 에페수스 고고학 발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폴링오 샘 /사진=김현민
폴링오 샘 /사진=김현민

 

< 폴리오 샘 (Fountain of Polio) >

서기 97년 에페수스의 재력가였던 폴리오와 그의 가족들이 세운 공공분수다.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와 수도관을 통해 도시 전체에 물을 공급했다. 누구나 무료로 이 분수의 물을 사용할수 있었다.

 

니케 여신상 부조 /사진=김현민
니케 여신상 부조 /사진=김현민

 

< 니케 여신 부조 (Statue of Nike) >

승리의 여신 니케의 부조. 여신은 왼손에 월계수를 들고 있고, 날개가 달려 있다. 미국 신발제조업체 나이키(Nike)는 이 여신을 모델로 했다.

 

헤라클레스 문 /사진=김현민
헤라클레스 문 /사진=김현민

 

< 헤라클레스 문 (Gate of Hercules) >

쿠레테스 거리가 시작되는 지점의 개선문. 사자 가죽을 걸친 헤라클레스가 기둥에 새겨져 있다.

 

쿠레테스 거리 /사진=김현민
쿠레테스 거리 /사진=김현민

 

< 쿠레테스 거리 (Curetes Street) >

헤라클레스 문에서 켈수스 도서관까지 이어지는 대리석 거리. 투레티는 시의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사제들을 말한다. 길 양쪽의 기둥들은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기둥 사이에 주요 인물들의 석상이 있었고, 기둥 뒤쪽에는 상점과 신전들이 있었다.

 

공중화장실 /사진=김현민
공중화장실 /사진=김현민

 

< 공중화장실 (Latrine) >

50명이 동시에 사용할수 있다.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볼일을 보면 지하에 흐르는 수로가 뒤처리를 했다.

 

주택지 /사진=김현민
주택지 /사진=김현민

 

< 주택지 (Terrace House) >

로마시대 부유층의 저택으로는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그 규모가 현대의 백만장자 저택을 빰칠 정도다.

 

켈수스 도서관 /사진=김현민
켈수스 도서관 /사진=김현민

 

< 켈수스 도서관 (Library of Celsus) >

에페수스 유적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이다. 켈수스는 로마제국 소아시아 총독으로, 학문을 사랑했던 인물인데, 그를 기념해 그의 아들이 지었다. 3세기 고트족의 침입과 그후의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나, 1970년 복원되었다. 기둥은 코린트 양식과 이오니아 양식이 혼합되었다. 지혜와 지식, 지성과 용기를 상징하는 네 여인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에페수스의 조각상은 모두 복제품이며, 진품은 빈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나의 공간으로 건축되었으며, 12천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서적이 손상되지 않도록 온도와 습도를 적정하게 유지되었다고 한다.

 

상업아고라 /사진=김현민
상업아고라 /사진=김현민

 

< 상업아고라 (Teragonos Agora) >

에페수스의 중앙시장이었다. 회랑에는 상점들이 들어서 있고, 상인들은 항구에서 들어온 물건과 노예들을 거래했다.

 

유곽 /사진=김현민
유곽 /사진=김현민

 

< 유곽 (Brothel) >

고대 매춘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대리석에는 여자 모습과 발자국이 그려져 있다. 이 모형에 대해 유곽임을 알리는 광고라는 설과, 이 발자국 크기 이상의 성인만이 들어올수 있는 기준이라는 설등이 있다.

 

대리석 대로 /사진=김현민
대리석 대로 /사진=김현민

 

< 대리석 대로 (Marble Street) >

켈수스 도서관에서 원형극장까지 이어지는 거리. 보행자가 지나는 길과 마차가 지나는 길이 분리되어 있다. 마차가 지나던 자국이 남아 있다.

 

원형극장 /사진=김현민
원형극장 /사진=김현민

 

< 원형 극장 (Great Theater) >

거의 완벽하게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검투사의 경기가 있었다. 중앙무대의 지름이 40m에 이르고, 25,000명을 수용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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