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옹기돛단배의 기록②…강진 칠량마을
옛 옹기돛단배의 기록②…강진 칠량마을
  • 전우홍
  • 승인 2019.09.1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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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 생산에서 판매까지 일체화…옹기배 한번 항해시 15일~3달 걸려

 

전남 강진(탐진)은 육상교통이 발달되기 전까지 남해안 해운 물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제주와 남서해안으로 왕래되는 많은 물류는 강진을 경유하게 된다. 이는 위치학적으로 남해안의 섬들과 해상으로 연결되고 또한 한양으로 연결되는 육상 물류 중심지가 강진이었다.

그 이전 강진 포구 전체가 장보고의 청해진에 속했고, 봉황리 옹기마을은 그곳과 불과 8마일 거리이며 청해진의 해상무역 교역은 중국 도자기(해굽무늬)를 구매해 일본에 판매하는 해상 중계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청해진은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강진 대구면에 당시 최첨단 사업이라 할 수 있는 청자의 집단생산 체제를 만들어 대량생산과 해상운송 및 판매를 했다.

이들 청자가마터는 봉황리 포구에서 불과 6km정도 거리이다. 이제 장보고와 청해진은 역사 속에 각인된 명성이겠지만 그 해상세력의 후예들은 민초로서 역사의 뒤 안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1980년 후반까지 무동력 옹기 돛단배를 탔고 토속적인 해운업을 하던 우리 옹기 뱃사람들이 바로 이들이 아닐까?

 

1985년경 옹기시장 쇠퇴기의 봉황리 포구의 옹기돛단배 /전우홍 제공
1985년경 옹기시장 쇠퇴기의 봉황리 포구의 옹기돛단배 /전우홍 제공

 

강진 칠량독점 (봉황리 옹기마을):

장보고의 해상 무역의 저력은 청자생산과 함께 진취적인 뱃사람들로 구성된 해상 세력 있었기에 장보고는 해상 무역왕이란 명칭을 얻을 수 있었다. 강진의 청자와 해운력은 2007년 태안 마도 부근 해저에서 800여년 만에 23,500여점 청자와 함께 발굴된 목간에는 탐진(강진)에서 개경(개성)으로 보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강진은 1980년 이후 도로망의 현대화와 자동차의 발달로 해상 교통수단의 가치와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지만 얼마 전까지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이곳은 장보고와 청해진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옹기와 돛단배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 바닷길을 통한 토속 해운업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 흔적으로 마지막 돛단배의 사공인 신 연호님은 그 옛날 뱃사람들의 말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칠량독점이 옹기마을 봉황리의 본래 이름이었고, 일본강점기인 1940년에 특정 생산단지의 부락이름을 없애고 좋은 이름인 봉황리로 개명되었다. 오늘날 옹기 만드는 일이 예능인로 대접받지만 옛날 독점이란 대우가 아닌 차별을 받았다. 특수한 마을이었던 만큼 경제활동 구성도 특이하다. 1970년 까지만 해도 해안은 좋은 어장과 기름진 농토를 마다하고 마을에는 농업과 어업을 전업하는 주민은 없었다. 마을에는 오직 옹기()의 생산과 해상판매를 했던 선원들 및 그와 관련된 일을 하는 주민으로 부락이 구성되어 있었다.

 

칠량 옹기마을의 선원구성

마을입구에는 고려옹기마을-봉황리라고 적혀있으니 인근의 유명한 고려청자와 함께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옹기마을 시작은 고증되지 않았지만 생산된 옹기를 해상 판매하던 마지막 옹기배 운항은 최소한 1988년까지는 다닌 것으로 1995년 당시 이장님으로부터 확인했다. 이곳 옹기는 남해안 전체로 팔려나갔다. 뱃사공과 마을 원로들에 의하면 1975년경 당시 마을에 105가구에 605명이 거주했고, 400명이 옹기와 관련된 일에 종사했다.

결국 이 부락의 성인들과 청소년이 되면 옹기제작을 대행하는 40개의 동막과 4개의 옹기가마, 옹기, , 땔감 운반, 그리고 돛단배를 타고서 옹기를 판매하는 선원들로 마을 인원이 구성되었다. , 옹기의 생산, 관리, 판매 3대 요소가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현대식 상업체제를 구비한 셈이다.

1970년대는 포구에 40여척에 15-20m 크기의 옹기 돛단배가 있었다. 이 마을 남자 3분의115세가 되면 선원이 되며 밥하는 화장으로 시작하여, ()동무, 사공으로 종사한 뱃사람이 모두 120명이나 된다. 이런 구조의 자연 부락은 한국 어디에서도 찾아 수 없는 특이한 경제구조이며 더욱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까지 돛단배로 남해안 뱃길을 누비며 옹기 판매유통에 종사했다. 1)

 

옹기돛단배의 출항을 위한 갑판위 옹기 나래비와 해안가에 보이는 봉황리 옹기가마-1985년경 /전우홍 제공
옹기돛단배의 출항을 위한 갑판위 옹기 나래비와 해안가에 보이는 봉황리 옹기가마-1985년경 /전우홍 제공

 

옹기 가마

길이 40-50m, 넓이 3-4m, 높이 2m, 3-4일간 불을 지펴 1,200-1,300도 온도에서 옹기는 구워진다. 1970년대 이전 전성기에 가마 1개당 년 30-40()을 구웠고, 마을의 4개 가마에서 연간 160굴을 했다. 한 굴에서 약 천개의 옹기가 만들어 졌고, 4개의 가마에서 일 년에 약 16만개의 옹기가 봉황 포구에서 생산된 셈이다.

 

옹기 돛단배

옹기배의 시작은 언제부터인지 고증되지 않고 마을 입구에 고려옹기라는 표지판이 있을 뿐, 마을 원로들도 옹기배의 내력을 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근래에 남아있던 마지막 옹기 돛단배의 형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식 선체를 채용해 옹기의 적재와 항해에 적합하게 개량된 무동력 돛단배로 1988년까지 남해안을 누비고 다녔다. 흔히 말하는 황포돛단배의 범주에 속하는 토속 해운업에 종사하는 화물선이며 장사배이다. 2)

, 옹기배의 표본은 여수와 통영 지방의 쾌속 돛단배인 우닷시라는 일본형 선체를 모델로 옹기적재를 위한 공간을 크게 만든 운반선으로 개조한 것이다. 이는 돛 부분은 전통한선의 규범을 따랐지만 선체는 일본화 하여 수기()나무와 소나무를 병용하였고, 배가 길고 가벼워서 속도도 빨랐다. 3)

옹기배에는 화장(Cook), 웃동무(Deck Hand), 사공(Skipper)으로 이루어진 3명의 선원으로 구성된다. 옹기의 종류는 100개 정도로 나눌 수 있지만 배로 판매하는 옹기는 20여 종류의 크기가 서로 다른 1,000여점의 한굴(한가마)짜리 옹기를 싣고 출항하여 남해안의 각 도시의 항구와 섬의 포구를 다니면서 옹기를 판매했다.

일행비(1항차)의 항해와 판매 기간은 최소 15일에서 최대 3달까지 소요된다. 다른 배와 달리 자급자족의 선상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뱃머리로부터 투석칸(주방), 이물칸/이물장(이물대에서 허리대까지 화물창), 한 장(허리대에서 뒤골방장까지 화물창), 그리고 뒤골에 선원들의 잠자는 공간인 방장(Bunker)으로 구성되어있다. 4)

1950년 이후에는 주로 한굴짜리 배가 만들어졌으며 이를 굵은 배라고 불렀다. 옹기배는 일반적으로 돛대는 3, 길이는 약 15-20미터로 10톤 크기였다. 간혹 2굴짜리 배와 그의 1/4인 반굴짜리 배도 있었다.

이후 동력선이 보편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을 이용해서도 자유자제로 돛단배를 조정에 익숙하던 노사공(老沙工)들은 비싼 연료와 번잡한 기계부품들로 인해 마지막까지 무동력 돛단배로 옹기를 운반 판매를 고수하였다. 옹기 돛단배는 좁은 범위에서는 옹기판매 장사배라고 하겠지만 옹기이외에 나락과 장작, 소주 독아지, 어획물, 소금, 그리고 섬지방 곡물들도 운송하였으니 큰 범위에서 토속 해운업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사진의 왼편에 경상남도 지정 早田造船 이란 목간판이 선명하게 보이며 일본 배목수로부터 4명의 조선 견습생이 보인다. 경남 사천군의 선공 전습소. 전습내용-일본형 어선제조, 기간-100일, 정원-3명, 혜택-전습중 식비 급여 및 수료자에게 배목수 공구지급 (1910년) /전우홍 제공
사진의 왼편에 경상남도 지정 早田造船 이란 목간판이 선명하게 보이며 일본 배목수로부터 4명의 조선 견습생이 보인다. 경남 사천군의 선공 전습소. 전습내용-일본형 어선제조, 기간-100일, 정원-3명, 혜택-전습중 식비 급여 및 수료자에게 배목수 공구지급 (1910년) /전우홍 제공
전라남도 제주군 일왕은사금 수산전습:  그 두 번째 도미 연승 전습선의 귀항 모습이란 사진이다. 완전한 일본배에 완전한 일본식 돛을 달았다.  천만 다행인 것은 나중에 활대가 붙은 조선의 돛은 역풍항해 되고  일본 돛 보다 월등히 우수해 돛은 다시 조선식 돛으로 돌아 왔다. (1910년) /전우홍 제공
전라남도 제주군 일왕은사금 수산전습: 그 두 번째 도미 연승 전습선의 귀항 모습이란 사진이다. 완전한 일본배에 완전한 일본식 돛을 달았다. 천만 다행인 것은 나중에 활대가 붙은 조선의 돛은 역풍항해 되고 일본 돛 보다 월등히 우수해 돛은 다시 조선식 돛으로 돌아 왔다. (1910년) /전우홍 제공

 

 


1) 2001년 인터넷 신문기사에 의하면 1985년 옹기사업에 종사하는 가구 수는 20여호 라고 하였다.

2) 1933년에 발간된 언더우드박사의 Korean Boats and Ships/P-15:

요즘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배들은 조선과 일본 배들의 선체나 돛/돛대의 좋은 부분을 합쳐서 만들고 돛은 완전히 조선식 돛을 사용한다. 원문: The favorite craft of today attempts to combine the good features of the Japanese and Korean hulls and rig this with purely Korean sails.

3) 근대 식민지 사업풍경(사진으로 보는 1910년대의 한반도): 원제 임시은사금수산사업사진첩편저자 김민영교수

1910년경 일본의 식민지 정책 일환으로 일왕 은사금이란 자금으로 일본식 조선(造船)사업을 적극 지원하여 그 과정을 이수하면 일본식 배목수 연장 1벌을 수여하였다. 이런 이유로 한선은 급격히 일본화 되었고 초기에는 돛까지 일본 돛을 채용하였으나 돛의 성능은 활대가 있는 한선의 돛이 월등히 우수하여 선체는 일본화 되었으나 돛은 여전히 한선의 돛으로 1988년 마지막 돛단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4) 재현된 봉황호는 옹기를 싣는 이물칸과 한장이 구별 없이 한통으로 터져있으나, 원래는 격벽으로 구별된 화물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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