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LTCM 위기①] 허리케인의 눈
[1998 LTCM 위기①] 허리케인의 눈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9.1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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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뉴욕 금융시장 동요…헤지펀드 LTCM 파산 루머 확산

 

1998920,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당시 뉴욕 연방준비은행(Fed) 부총재였던 피터 피셔(Peter Fisher)는 부모님들의 결혼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뒤 급히 커네티컷으로 차를 몰았다. 커네티컷 주도 뉴욕 Fed의 관할지역이었다.

그의 부친은 하버드대 법대의 유명한 로저 피셔(Roger Fisher) 교수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하버드대 학부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뉴욕 Fed에 들어가 법률 부문을 담당했다. 어느 나라나 명문대 출신들은 중앙은행에 근무하는 것을 엄청난 자부심으로 생각한다. 특히 미국에서는 뉴욕 Fed는 다른 11개 지방 Fed보다 상위의 위치에 있고, 뉴욕 Fed 총재는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다음의 2인자였다. 뉴욕 Fed에서 2인자였던 피터 피셔 부총재는 미국 중앙은행은 물론 세계 금융중심지인 월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나이는 42세였다. 청춘을 뉴욕 Fed에 바친 피셔 부총재는 젊은 나이에 금융계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피셔 부총재는 보스턴 근교 학원도시 캠브리지에서 급히 빠져 나와 커네티컷의 부자마을인 그린위치에 도착했다.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ong-Term Capital Management LP: LTCM)’라는 헤지펀드의 재무구조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부하들은 이미 도착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셔는 장부를 들여다 보았다. 금융감독당국의 통제도 받지 않고 비밀 결사대처럼 운영해 온 헤지펀드의 장부가 드디어 중앙은행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됐다. 잘못은 단 하나. 이 헤지펀드는 너무 빚을 많이 내서 운영하다가 파산 직전에 몰린 것이다.

장부를 샅샅이 들여다 본 피셔 일행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문제는 심각했다. 이 펀드가 파산할 경우 뉴욕 월가는 물론 국제금융시장이 대혼돈에 빠지고 1929년의 대공황이 재연될 가능성도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장부에는 월가는 물론 유럽의 주요 은행이 얼기설기 얽혀져 있고, 자칫하다간 주식시장은 물론 채권시장, 파생금융상품 시장이 모조리 무너질 우려가 있었다.

미국은 1980년대 중반 시골 중소도시의 저축대부조합(S&L: Savings and Loans)을 정리하면서 부실 금융기관에 대한 크나큰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부실 채권이 많은 은행은 구제하지 않고 파산시킨다는 게 미국 금융당국의 원칙이었다. 정부 또는 중앙은행이 죽을 은행을 살려주면 다른 은행들도 어려울 때 살려주겠지 하는 기대를 확산시켜 오히려 금융권의 부실이 커진다는 것이 미국 금융당국의 경험적 판단이다. 따라서 부실 은행을 시범케이스로 죽이는 것이 미국의 관행이다. 이른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부실 은행 정리의 철학이요, 원칙이다.

 

피셔는 고민했다. 이 문제 많은 펀드를 파산시키느냐, 아니면 구제금융을 지원하느냐. 원칙대로 하자면 파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그러면 은막에 가려 있던 피셔는 미국 언론의 초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천억 달러의 빚을 지고 있는 헤지펀드를 파산시킬 경우 금융시장의 혼란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70년전 대공황때 뉴욕 Fed는 금리를 인상함으로써 공황을 촉발, 두고두고 욕을 얻어먹지 않았는가. 주식시장 과열을 막는다고 경제이론대로 이자율을 올렸는데, 과열 증시가 천천히 식는 게 아니라 파국으로 가고, 금융시장 붕괴가 실물경제 붕괴로 이어졌다. 이번에도 여건은 비슷했다. 원칙을 지키느냐, 상황논리를 적용해, 편법을 쓰느냐의 기로에 서있었다.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없었다. 이미 며칠전부터 뉴욕 월가의 금융시장이 붕괴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그린위치에 도착하기 일주일전부터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피터 피셔 교수 /다트머스대 홈페이지
피터 피셔 교수 /다트머스대 홈페이지

 

19989월 중순 뉴욕 연준 트레이딩 룸에는 월가 금융시장에 왜곡현상이 심화되고 있음이 체크됐다. 러시아가 만기가 돌아온 외국 빚을 연기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모라토리엄(채권지불유예)을 선언하고 루블화를 평가절하한 직후에 월가에는 패닉 현상이 일어났다. 투자자들은 일제히 돈을 빼내 안전한 대피처를 찾아 대이동을 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금융상품으로 알려진 미국 재무부 채권(TB: Treasury Bond)은 연일 상승했다. 이에 비해 뉴욕 주가는 폭락하고 거래량도 극도로 엷어졌다. 1987년에 발생한 이른바 검은 월요일(Black Monday)’ 현상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 무렵 피셔는 커네티컷의 롱텀캐피털 매니지먼트라는 헤지펀드가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루머를 들었다.

피셔는 우선 미국 중앙은행의 눈이요, 귀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유사시 손의 역할도 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의 관할은 뉴욕 연준 트레이딩 룸이었다. 그는 부총재에 취임하자마자 트레이딩 룸의 디자인을 돔식의 둥근 천정으로 바꿔 현대화했다. 연준 트레이딩 룸의 역할은 막강했다. 예컨데 그린스펀 Fed 의장이 금리를 인하하기로 결정했을 때 금리는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뉴욕 연준의 트레이딩 룸에서 미국 국채(재무부 채권)를 사고 파는 거래를 함으로써 금리를 조작했다. 로버트 루빈(Robert Rubin) 재무부 장관이 엔화를 공동방어하겠다고 하면 뉴욕 연준에서 달러를 대량 매각하고 엔화를 매입함으로써 시장을 움직였다.

 

뉴욕 연준 트레이딩 룸을 책임지고 있는 피셔는 집에서 새벽 5시에 일어나 컴퓨터를 켠다. 눈을 부비며 그가 하는 일은 밤새 아시아와 유럽 금융시장의 움직임을 체크하는 것이다. 그리고 월가 한복판에 있는 뉴욕 연준 사무실에 출근해, 10층 트레이딩 룸을 지킨다. 월가의 트레이더와 딜러들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체크하고, 외국 재무장관과도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체크한다. 사실상 미국 중앙은행의 상황실장 역할을 했다. 밤에도 11시까지 그는 안방에서 컴퓨터 곁을 지키고 있다.

중앙은행의 뜻에 거스르게 투자하면 반드시 실패한다는 월가의 격언이 있다. 따라서 월가 사람들은 뉴욕 연준 트레이딩 룸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예컨데 달러가 1엔당 147엔으로 뛰어올랐을 때 뉴욕 연준 트레이더들은 월가 외환 딜러들에게 전화를 건다. 연준 트레이더들은 달러가 왜 뛰는 겁니까하고 물어본다. 그들이 달러가 왜 뛰는지 모를리 없다. 이렇게 넌지시 말해도 뉴욕의 외환딜러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안다. 지나친 달러 강세를 저지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개입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딜러들은 즉시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산다. 중앙은행의 눈에 거슬린채 달러를 사다가 개입이라도 하면 큰 손해를 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간접적 시장 컨트롤이다.

 

피셔 일행이 커네티컷의 LTCM의 장부를 들여다보고 며칠전부터 월가 금융시장이 요동치던 이유를 확실하게 알았다. 빚에 몰린 이 헤지펀드가 빚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가지고 있던 방대한 금융자산을 헐값에 처분했던 것이다. 이 회사가 무너지면 금융시장이 깨질 게 불을 보듯 명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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