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옹기돛단배의 기록③…해상항로와 판매
옛 옹기돛단배의 기록③…해상항로와 판매
  • 전우홍
  • 승인 2019.09.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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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나 시장 찾아다니며 판매…2달 승선해 논 700평 살수 있는 고소득 보장

 

< 옹기배의 항로 >

칠량 옹기 배의 활동 범위는 제주를 포함한 남해안 전체를 대상으로 주간 항해를 원칙으로 하였다. 이는 짧은 거리의 포구를 방문하여도 어디서든지 포구와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옹기를 판매 할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입항 항구의 결정은 돈을 찾아다녔고, 이런 정보는 지나다니는 배나 혹은 현지 주민들로부터 들었다.

예를 들어 고기가 많이 잡히거나 면화 혹은 쌀 공판하는 곳을 찾아 다녔다. 결국 이런 포구에 돈이 돌고 또한 이런 포구를 잘 찾아 판매를 잘하는 것이 옹기배 사공의 덕목이기도 했다.

 

부산 옹기시장 형성과 항로 (1950-1970)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산에 피란민들이 몰려 옹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칠량 옹기 배들(해상상인)은 이런 찬스를 놓치지 않았고 이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쉼 없이 항해를 했다. 당시 부산까지 1항차는 15일이며, 왕복 10일간의 항해를 제외하면 5일 만에 천여 개의 옹기를 모두 판매할 수 있었다.

봉황리-마량-고흥 나려도 (1)-여수 화양면-여수항(2)-남해군 사량도 메주목- 판두목 통영(3)-거제도 두퉁골(신현)(4)-흐렁바다(낙동강하류)-다대포-자갈치도착(5일 소요)

 

제주 옹기시장 개척과 항로 (1969-1985)

제주도 옹기시장의 개척-1969년 이수성 사공이 청산도에서 여서도로 가는 길에 풍랑으로 제주도로 표류했다. 이때까지는 무동력선이 대양을 건너야 하는 제주길은 두려워 엄두를 내지 않았다. 우연한 표류로 인하여 품질 좋은 칠량옹기는 뜻밖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당시 제주인들은 옹기배가 입항하면 두렁두렁 무더기로 매입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일항비(1항차) 평균 3곱 장사를 했다.

 

제주항로 개척자: 선주 김선식, 사공 이수성, 웃동무 김원중, 화장 신길남

봉황리-가우도 왼쪽 통과-고마도와 사후도-완도-청산도 도청항(쉬엄마치)-여호섬-제주도(화북, 신촌, 조천, 오조리, 성산포, 구귀포, 산지포, 애월항)에 도달

1679, 이증의 남사일록의 제주항로: 강진 남당포-가우도-비래도-복도-사후도-가리포-백일도-사서도-제주 화북

 

제주에서 칠량 옹기의 인기는 1985년까지 유지되었지만 플라스틱 용기와 집집마다 수도물 공급과 옹기의 표면에 자연 유약인 잿물이 아닌 반짝거리게 하는 납성분인 광명단 유약사건으로 옹기의 시장은 치명타를 입었고 옹기는 우리 생활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 밖에 항로

완도, 고흥, 여수, 남해, 삼천포, 통영, 거제도, 마산

 

1910년대의 제주도 산지천 포구 마을 /전우홍 제공
1910년대의 제주도 산지천 포구 마을 /전우홍 제공

 

< 옹기제작 비용과 이득과 분배 >

 

제작비용

1970년대 초반 옹기 한 가마( 1,000여개) 제작비용

(옹기 한 가마 가격: 20만원 명세서)

* 나무(땔감) : 4-5만원

* 흙 값: 2만원

* 도공, 잡부 인건비: 5만원

* 생옹기 건조비: 1만원

* 유약 값: 5천원

* 흙 반죽: 5천원

* 불 때는 비용: 5천원 (3-4/1,300)

* 옹기 운반(건아꾼): 5천원

(참고: 당시 논 한마지기 200평의 가격 7-8천원/ 쌀 한 되 20)

 

땔감/화목 비용

옹기 한 굴에 약 900-1,000단이 소요됨, 3단에 100원이었다. 1970년 후반 들어서 인근에 자재들이 부족하여 흙은 나주 산포면에서 트럭으로 구입하고, 땔감은 노하도, 청산도에서 가져오다가 나중에는 보다 먼 곳에서 돛단배로 운송하였다. 이때 옹기배의 풍경 못지않게 장작배의 풍경도 좋았다.

 

옹기 한가마 제작 기간

봉황리에는 40여개의 동막이라는 옹기제작 대행사가 있어서 옹기전문 도공(접장) 2명과 보조인 5명이 한 굴(가마)90종류의 옹기 1,000여점을 만드는 기간은 대략 2개월이 소요되었다. 생옹기를 가마에 쌓기는 2-3일 소요되며 불은 3-4일간 지핀다. 전성기에는 전국에서 도공(접장)들이 몰려들었고 한 동막에 여러명의 접장이 함께 물레질하여 생옹기의 제작시간을 단축해야 했다.

 

옹기배 한행비 : (1항차: 1-3개월)의 수익

* 1965년대 15톤급 옹기배 신조선 건조비: 150-200만원

길이 20m, 5m, 짐칸천장 높이 2m, 짐칸 길이 10m

* 동막에서 배까지 20여명의 이엉꾼이 이어 옮기기를 하며 약 3시간 소요됨.

배에서는 사공이 이물에는 작은 옹기, 고물 넓은 공간에는 큰 옹기를 적재했다.

* 1958년대 15톤 급에는 옹기 2가마 분량 - 옹기 값 약 12만원

한행비(1항차) 판매완료: 12만원 가치의 옹기를 판매하면 판매액은 40만원

* 1970년대 1항차는: 판매시일에 따라 틀리나 15-3달소요. 옹기 1가마 원가 20만원의 옹기를 판매 후 금액은 40만원으로 2배 장사임 (당시 논 1마지기-200/8,000)

* 선주는 1달치 3명의 선원이 생활 할 생필품(식곰)을 제공하는데 이는 기본 식료품, 나무/땔감, 솥단지, 이불 등을 말한다.

 

수익분배

모든 경비를 제외하고 남은 금액의 반(50%)은 투자비와 이자로 선주가 갖는다.

나머지 반(50%)은 선원들의 몫으로 웃()동무와 화장이 1로 보면, 사공은 1.5로 분배한다. 20만원을 남겼을 때, 선주 10만원, 사공 42,800, 웃동무와 화장 각 28,600원으로 분배된다. 이는 2달 정도 승선하여 당시 논 700평을 살 수 있는 금액으로 일반 노동자에 비교하여 월등한 고소득인 셈이다.

 

2010년10월 제주도 화북포구의 돈대(등대불) /전우홍 제공
2010년10월 제주도 화북포구의 돈대(등대불) /전우홍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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