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전 그날, 9·11 테러의 기억
18년전 그날, 9·11 테러의 기억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9.12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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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현장 목격…미국인들 강렬한 애국심 표현, 여야 없이 테러와의 전쟁 결의

 

그날 아침 뉴욕의 날씨는 전형적인 초가을 답게 상쾌했다. 이날 아침에 맨해튼 최고급 호텔인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조흥은행이 해외증권(DR) 발행을 위해 투자자 설명회가 예정돼 있었고, 몇 블록 더 가 유엔빌딩에서는 한국 정부가 56차 유엔총회 의장국으로서 활동하는 첫날 행사가 마련돼 있었다. 필자는 이것저것 챙길 것들이 많아 여느 날보다 아침 일찍 집을 나와 뉴욕 행 버스를 탔다.

아침 8시께 버스는 저지 시티를 지나 링컨 터널에 들어섰고, 터널 입구의 굽이진 언덕 위에서 기자는 무심코 차창 너머로 허드슨강 건너편에 우뚝 솟아있는 세계무역센터를 쳐다보았다. 초현대식으로 지어진 쌍둥이 빌딩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세계금융시장의 중심지로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온전한 모습으로 본 세계무역센터의 마지막이었다.

 

2001911일 화요일 아침은 보통의 하루로 시작되었다. 뉴저지주 리지필드 파크의 집에서 출발해, 맨해튼 동쪽 이스트 강 건너편에 있는 사무실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830. TV를 켜고 뉴욕 증시 개장 전의 뉴스를 챙기며,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세계무역센터에 불이 났다고 알려줬다.

그 순간, 미국 방송들은 조그마한 세스나 경비행기가 빌딩에 부딛쳐 사고를 낸 것 같다고 보도했다. 조금후 또다른 비행기가 옆 빌딩을 관통하면서 두 건물 모두 불길에 휩싸였다. 그제서야 미국 방송들은 테러 가능성을 제기했다.

워싱턴 DC의 펜타곤 건물에도 또한대의 비행기가 충돌했고, 펜실베이니아주 야산에 제4의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속보가 쏟아지면서 테러가 분명했다.

 

테러 직후 연기를 뿜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빌딩 /위키피디아
테러 직후 연기를 뿜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빌딩 /위키피디아

 

필자는 사무실 창문을 통해 세계무역센터가 시커먼 연기를 내며 타는 것을 보았고, 곧이어 두 건물이 힘없이 무너지는 것도 목격했다. 출근할 때 본 그 위풍당당하던 뉴욕의 상징은 두시간 후 수천명의 인명피해를 내며 잿더미로 변했고, 세계 역사의 흐름에 큰 단층을 형성했다.

미국의 심장부는 이렇게 쉽고도 무참하게 공격당했다. 18분 사이에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되고, 국방부 본부 건물이 피격당했는데도 세계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은 그 순간에 속수무책이었다. 플로리다주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중이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국가 재난을 선언하고, 보복을 다짐했다.

미국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은 정보기관의 첩보나 저널리스트의 분석에 의해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돼온 사안이다. 뉴욕타임스지의 컬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만(Thomas Friedman)1990년대말에 쓴 그의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미국의 사우디 아라비아의 부자 오사마 빈라덴에 의해 핵공격을 받을 가능성을 예측한바 있다. 그는 현대 사회가 국가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과거에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 경쟁을 했다면, 지금은 개인도 핵무기를 보유해서 거대한 미국에 대립할수 있게 됐다고 경고했다.

동서 냉전시대가 끝나고 10여년이 지난후, 그 예측이 맞아떨어졌다. 다만 테러리스트들이 언제, 어디에, 어떻게 미국을 공격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제시되지 못했을 뿐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후 세계는 유일한 초강대국미국에 의해 주도되고,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소외된 자들이 미국에 테러와 게릴라전을 펼치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200011일 자정, 뉴욕 중심가 타임스퀘어에는 수십만명이 몰려 새로운 세기와 밀레니엄이 왔음을 찬양했지만, 역사적 의미의 21세기는 2001911일 오전 847분에 시작된 것이다.

 

9·11 테러가 발생한 후 며칠간 필자는 뉴저지주에 있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뉴욕시 롱아일랜드 시티에 있는 사무실에서 밤과 낮을 보냈다. 뉴욕시는 맨해튼으로 들어가는 길을 모두 봉쇄하고, 뉴저지주와 뉴욕시를 연결하는 다리와 터널을 모두 폐쇄했기 때문이다.

며칠후 가까스로 집에 들어가는데, 짚앞에 놀던 초등학생쯤 될까, 어린 미국아이들이 필자에게 공격하듯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미국인이 아닙니까.”

그래, 나는 미국인 아니다.”

그린카드(영주권)를 가지고 있는가요.”

아니, 나는 한국에서 온 외국인이다. 그런데 그걸 왜 물어보니.”

집집마다 모두 성조기를 게양했는데, 당신 집만 기가 없지 않는가요.”

그제서야 어린 아이들이 나의 국적을 물어보는 이유를 알았다. 아랍인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수천명이 희생당해 모든 미국인들이 추모의 물결에 휩쓸려 있는데, 유독 필자의 집만 성조기가 걸려 있질 않으니, 어린아이들은 그집 주인의 성향을 의심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득했다.

우리 한국은 테러를 다른 어느 나라보다 싫어한단다. 한국 사람들도 미국이 추구하는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고 있단다.”

그제서야 그 어린아이들은 오해를 풀고, 나를 집에 들어가게 풀어(?) 주었다.

 

터레후 뉴욕 세계무역센터 잔해 /위키피디아
터레후 뉴욕 세계무역센터 잔해 /위키피디아

 

테러 참사 직후 미국은 성조기 물결로 뒤덥혔다. 미국인들은 승용차의 안테나에 꽂은 것도 모자라 차창에도 덕지덕지 미국기를 붙여놓고 다녔다. 성조기를 게양하지 않거나 차에 꼽고 다니지 않으면, 필자가 당한 것처럼 비애국적인 것으로 오해 받거나, 비미국인으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펜타곤이 테러 공격을 받은후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애국심으로 가득 찼다. 성조기를 만드는 공장은 참사 이전보다 십여배 넘는 주문에 밀려 밤샘작업을 벌렸고, 조지 워싱턴 다리에 걸려있는 대형 성조기는 외국인인 필자가 보기에도 가슴을 징하게 만들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연설하는 곳마다 청중들은 ‘USA’를 외쳤고, 테러로 숨진 사람들을 위한 헌금이 밀려들어 뉴욕시는 정해진 창구를 이용해달라고 부탁하는 실정이었다. 학교에선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토론되고, 아침 조회사간에는 성조기를 흔들며 신이여, 미국을 가호하소서(God Bless the USA)’를 합창했다.

정치인들도 단결했다. 1년전 법원 결정에 의해 마지못해 부시에게 대통령 자리를 주어야 했던 앨 고어(Al Gore) 민주당 대통령 후보도 부시는 나의 총사령관이라며,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했고, 민주당 지도부는 미국에는 야당이 없고, 오직 미국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예산 집행에 깐깐하기로 유명한 의회는 전쟁 및 복구 비용을 행정부 안보다 2배 많은 400억 달러로 늘려 통과시켰고, 빌 클린턴(Bill Clinton) 전 대통령도 세계무역센터의 복구 현장을 찾아 격려하고, 기도회에 참석, 미국인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미국의 애국심 열기는 또다른 독선을 만들어 냈다. TV 방송 토크쇼에서 한 참석자가 애국적 정서에 맞지 않은 말을 했다고 해서 그 프로그램 광고주로부터 항의를 받는가 하면, 백악관 대변인은 일부 언론이 군에 대해 비판적 표현을 하고 있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한 대학 교수는 9·11에 대해 이상한 발언을 했다고 해서 대학측으로부터 경고를 받았고, 부시 대통령을 비판한 지역 신문기자들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참사 현장을 훌륭한 예술작품이라고 표사한 독일의 한 작곡가는 뉴욕 공연이 취소되는 보복을 당했다.

1812년 미-영 전쟁에서 영국군에 의해 처음으로 본토 공격을 당한 미국인들의 애국심은 이해할만 일이다. 하지만 그 애국심이 대외정책으로 표현되면서 강대국의 독선 또는 오만으로 변질됐다.

 

2014년 9·11 추모행사의 모습 /위키피디아
2014년 9·11 추모행사의 모습 /위키피디아

 

9·11 이후 미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로 변했다. 9·11 이전의 세계와 그 이후의 세계는 같을 수 없었다. 테러 이후 모든 게 다르다는 생각이 미국 지배층의 머리를 사로잡았다. 앨 고어 전부통령의 안보담당 보좌관이었던 리온 퓨어스(Leon Fuerth)2001911일이 기원전(BC)과 기원후(AC)를 가르는 것만큼의 역사적 기점이라고 정의했다. 콜린 파월(Colin Powell) 국무장관은 9·11을 계기로 냉전도 끝나고, 포스트 냉전도 끝났다면서 앞으로의 세계를 포스트-포스트 냉전(post-post cold war)’라고 규정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미국 지성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미국은 잠자는 사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9·11은 미국의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미국인들은 허탈감과 분노를 애국심으로 승화했고, 법원에 의해 당선이 결정된 부시 대통령은 확고한 리더십을 확보했다. 미국은 중앙아시아 산악국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해, 알카에다 테러세력과 이를 보호하던 탈레반 정권을 와해시켰고, 어제의 적이었던 미국과 러시아중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방국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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