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이야기②…섬 정책의 역사
섬 이야기②…섬 정책의 역사
  • 이재언
  • 승인 2019.09.15 12: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도 정책으로 해양진출 억제…동력선 등장으로 섬 발전에 큰 기여

 

이번엔 우리나라 섬 정책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왜구의 섬, 침략과 공도(空島) 정책

오랜 역사과정에서 일본은 바다를 통해 한반도를 제 집 드나들 듯이 다니면서 들어와 해적질을 했다.

왜구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약 70년 정도 우리나라 연안에 침입했다. 특히, 고려 말에 나라가 어지러울 때 약 40년간은 그 피해가 컸다. 그 중에서도 일본과 가까운 서남해 연안과 섬이 피해가 컸다.

제주도와 한반도 중간에 위치한 추자도는 오랫동안 전라도에 소속된 섬으로 제주도로 편입된 지 불과 100여년이 되었다. 여기는 수산자원의 보고로 예전부터 남해안에 살던 어민들이 건너와 살았던 한반도와 탐라와의 중간에 있는 교통 요충지였다.

추자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진 관계로 해적인 왜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와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탐라기년>에 보면 ‘1350(고려 충정왕 2)에 추자도 주민을 조공포(朝貢浦=도근내 포구) 냇가로 옮겼다. 이는 왜적이 자주 침입하기 때문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해적들이 얼마나 추자도 주민들을 괴럽혔기에 이주시켰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왜구들은 섬과 세곡선을 습격하고 노략질 때문에 고려 말에는 큰 피허가 되었다.

왜구들은 바다를 통해 마음대로 들락거린 것은 고려 말과 조선초기이다. 이때 조정은 해금정책을 실시한다. ‘사사로이 바다에 나가 외국과 교역하는 자는 곤장 100.’ 이것이 조선의 해양 정책이었다.

조선이 바다를 버리고 제해권을 상실했다. 제해권이란 해상의 군사, 통상, 항해 따위에 관해 국가 이익과 안보를 위하여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는 권리인데, 조선은 해구와 섬은 육지와 멀리 떨어진 관계로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포기하고 쇄국정책을 쓴 결과 마침내 강제 개항과 함께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일본은 원래 섬나라로 바다를 잘 알았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처럼 쇄국 정책을 쓰다가 375년만인 185378일 일본이 개항을 한다.

 

삼별초와 공도 정책

몽골은 13세기 이후에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하는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했으니, 그 과정에서 송나라 정복을 위한 사전 조치로 1231년부터 배후에 있는 고려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려의 무인정권은 1232년에 정부를 강화도로 옮기는 천도를 단행하여 장기전에 대비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극도의 피로감에 싸여 있던 고려왕 원종은 마침내 1270523일 개경 환도를 결행하여 몽골의 정치간섭 하에 정권을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이에 삼별초 세력은 개경 환도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강화도를 점령하고 왕족인 승화 후 왕온을 고려왕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1,000여척의 배를 동원해 공사의 재물과 사람들을 싣고서 강화도 구포를 떠나 남으로 향했다.

삼별초 일행이 최종 목적지 진도에 도착한 것은 강화도를 떠난 지 70일이 넘은 819일이었다. 1주일도 채 안 걸릴 거리를 70일 이상 넘게 항해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바이나, 아마도 서해안의 도서연안지역을 경략하면서 서서히 항해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서남해의 도서연안지역을 장악하여 일종의 해상왕국을 건설했다.

당시 삼별초가 거점으로 활용한 섬으로는, 진도와 제주도 이외에도 전남해역의 압해도, 완도, 경남해역의 남해도창선도, 거제도, 충청·경기해역의 영흥도, 자연도(영종도), 대부·고란도 등이 거명되고 있다.

진도의 삼별초가 30여개의 서남해 섬들을 점거했던 것으로 되어 있어, 삼별초 해상왕국의 위세가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여몽연합군의 맹공으로 진도가 1271515일 함락되었다.

삼별초는 제주도로 옮겨 서남해 섬과 바닷길을 장악하며 해상 항전을 계속했으나, 1273428일에 패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1231년 이후 계속해온 몽골에 대한 항전은 40여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때 해양 세력의 뿌리를 뽑기 위하여 1271년 거제도를 시작으로 14세기 중엽까지 진도, 흑산도, 압해도, 장산도, 남해도, 창선도 등의 사람들을 육지로 옮겨 더부살이하게 했다. 이것이 공도의 조치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수십 년 수백 년 살았던 정든 고향 땅, 전답, , 조상의 묘소가 있고, 사시사철 바다에 나가면 고기와 해산물 온갖 먹거리가 풍성한 보배로운 고장인 섬을 버리고 떠나가라는 말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영산포에 지명은 그 당시 흑산도와 영산도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사는 곳이었다. 풍선을 몰래 타고 가서 고기와 해산물을 채취하여 다시 영산포로 돌아오고 goTek.

어떤 섬에선 주민이 관군 몰래 들어가 살다가 다시 쫓겨나고 이런 숨바꼭질을 150년 동안 했다. 그래서 조선의 유교는 바다와 뱃사람의 천시 사상과 맞물려 그때부터 이런 고얀 놈들이 또 섬에 들어와 하면서 섬놈, 뱃놈 하는 한 것은 밑바닥에 이런 가슴 아픈 역사가 숨어 있다.

 

2013 흑산항 여객선 부두 /이재언 제공
2013 흑산항 여객선 부두 /이재언 제공

 

풍선에서 기선으로 섬 주민들이 삶

내가 어릴 때 범선인 돗단배와 노 젖는 배를 많이 타고 다녔다. 1960-1970년대 바다가 사는 사람들은 풍선에서 동력선으로 교체되면서 큰 변화가 찾아왔다. 필자는 섬과 바다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풍선에서 증기선으로의 전환은 섬사람들에게 바다를 누비는 외항선과 원양어선들에게는 혁명적인 사건으로 생각한다.

섬사람들에게 가장 극적인 사건은 아마도 기선의 출현일 것이다. 풍선과 동력선의 차이는 육지의 차와 리어카로 비교 할 수 있다. 육지에 전차와 기차와 자동차의 출현은 인류 문명에 가장 획기적인 시건이며 도로의 발달로 인해 크나큰 변화가 일어 났다.

풍선의 장점은 돛을 달고 다니기에 기계가 없기 때문에 비용 절감과 기름이 들지 않는다. 대단히 느리지만 친 환경적이다. 그 대신 사고는 많이 났다. 이 풍선에 세곡이 실려서 서남해안을 돌아서 한양이나 개경으로 들어갔다. 당시 너무나 많은 배 사고가 발생해 조세를 세곡선으로 운반하던 고려와 조선 정부는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증도 앞바다의 유물, 군산의 비안도 앞바다 유물, 태안의 마도 앞바다의 유물은 대표적이다. 필자는 탐사선 등대호를 타고 이 지역을 3-4번 정도 오고 갔다. 현대의 배들은 전자장비가 좋아 등대, 레이다. GPS, 어탐기, 수심측정기, 무전기 등을 갖추고 있다. 해방 전후에는 오직 해도와 나침판에 의지해 다녔기 때문에 안개와 풍랑에 사고를 많이 당했지만, 전통시대 풍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바다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안개다. 안개 끼면 까막눈이 된다. 필자도 안개 때문에 김 양식장을 붙잡고 밤을 지세우고, 한번은 목포에서 여수로 야간 항해 중에 GPS 고장으로 해경이 3번 출동하는 경험을 갖고 있다.

지금의 배는 전자 장비가 있다. 일기 예보가 정확하다. 그런데 예전에는 오직 감으로, 경험에 의지해 풍선을 몰았기 때문에 바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당하고 말았다.

요즈음 동력선은 가다가도 암초나 배가 나타나면 후진하면 된다. 물살도 거슬러서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풍선은 그게 힘들다. 서해안의 간만의 차이 11미터로, 좁은 목에서는 사고를 많이 당한다. 바람과 조수가 사정없이 밀고 오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기선의 등장으로 인해 섬은 수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수천 년 동안 부분적으로 풍선을 통해 이루어지던 교류와 소통이 기선이란 객선을 통해 이루어 졌다.

그 당시 목포에서 나주 영산포로, 군산 금강에서 강경로, 한강을 거슬러 마포 나루로 다니다.해난 사고도 많이 났다.

 

2013 남서해탐사 (흑산항) /이재언 제공
2013 남서해탐사 (흑산항) /이재언 제공

 

여객선의 공용화 실현

바다에도 고속도로가 있다. 바다에는 인프라가 2개가 있는데 그 하나는 바다라는 고속도로이고, 다른 하나는 선박이라는 고속도로다.

육지의 고속도로가 제1고속도로라면 바다는 제2고속도이다. 3의 고속도로는 선박일 터, 육지의 고속도로를 통해 물류가 흐르듯이, 바다의 배를 통해 사람, 물류, 우편물이 오고간다. 바다의 고속도로 개발에 관심을 기울여 나아가야 한다. 섬 관광을 활성화를 위해 철도처럼 여객선을 공용화 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재언씨 프로필

필명: 이섬, 국립 목포대학교 도서() 문화연구원, 전남일보 섬 전문 기자, 저서: ‘한국의 섬’ 8권 출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