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열강의 타협으로 선택된 벨기에 왕실
유럽 열강의 타협으로 선택된 벨기에 왕실
  • 아틀라스
  • 승인 2019.03.27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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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독립직후 부르봉 왕가 초대했다가 열강의 반대로 독일 작센 계열에서 이어가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한국을 국빈방문한 벨기에 필립 국왕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같은날, 김정숙 여사는 마틸드 필립 벨기에 왕비와 환담을 나눴다.

필립 국왕은 벨기에 왕가를 이어가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House of Saxe-Coburg and Gotha)7대 국왕이다. 벨기에 왕실 역사는 유럽 왕실의 오랜 역사와 달리 190년에 불과하다. 여기엔 기구한 사연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벨기에 필립 국왕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벨기에 필립 국왕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청와대

 

 

벨기에 왕가가 형성된 과정을 살펴보자.

1830년 오후 630분 브뤼셀의 모네 극장에는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La muette de Portici)라는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내용은 나폴리의 벙어리 처녀 페넬라가 나폴리 주재 스페인 총독의 아들 알폰소의 유혹에 넘어가 그를 사랑하지만, 그에게 버림받게 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오빠가 알폰소에 반기를 든다는 스토리다. 스페인 지배를 받던 나폴리 시민들이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내용의 이 오페라가 벨기에 독립 운동을 촉발했다.

당시 벨기에는 프랑스 땅이었다가 나폴레옹이 패전하면서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오페라는 네덜란드 국왕 빌럼 1(William I)의 통치 15주년을 기념하는 축제 마지막날의 피날레 행사로 예정되었다.

앞서 한달전 19307월에 프랑스에선 나폴레옹의 패전 이후 복위한 부르봉 왕조의 샤를 10세가 구제도로 북귀하려다 시민혁명으로 쫓겨났다.(7월 혁명) 벨기에인들은 같은 언어를 쓰는 프랑스의 7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추구했다.

벨기에 독립주의자들은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공연을 이용했다. 공연이 진행되던 도중에 오페라를 관람하던 시민들은 일제히 궐기했다. 이미 짜여진 각본이었다. 독립세력들은 오페라 결투 장면에서 일제히 일어나 시위대로 전환하기로 예정해 놓고 있었다.

오페라 관람객들은 시위대에 합류했다. 그들은 재빠르게 네덜란드의 정부청사들을 점령하고 독립을 상징하는 깃발을 흔들었다. 브뤼셀의 무산대중도 합류했다. 시민들은 시내에서 가두 투쟁을 벌였다.

네덜란드 국왕은 프레데릭 왕자에게 8,000명의 병력을 주고 진압 명령을 내렸지만, 진압에 실패했다. 독립운동 세력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네덜란드 군은 마스트리히와 엔트워프로 퇴각했다.

이로써 나폴레옹 전쟁 이후 강대국들이 빈 조약을 체결해 벨기에를 프랑스에서 떼내 네덜란드에 붙인 조치는 잘못이었음이 드러났다. 104일 벨기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독립이 선포되었다.

 

벨기에 혁명을 그린그림 (Gustaf Wappers 작, 벨기에 미술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벨기에 혁명을 그린그림 (Gustaf Wappers 작, 벨기에 미술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네덜란드에서 독립한 벨기에는 공화제를 선택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유럽에 왕정을 유지하려는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구제도)의 시대였기 때문에 벨기에 제헌의회는 17413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입헌군주국을 선택했다. 유럽열강들은 18301220일 벨기에의 독립을 승인했다. 참가국은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다.

베네룩스 3국 /김현민
베네룩스 3국 /김현민

 

그런데 누구를 국왕으로 모시야 하나. 벨기에 의회는 나폴레옹을 타도하고 들어선 부르봉 왕조 방계인 프랑스 국왕 루이-필립(Louis-Philippe)의 아들인 느므르 공작 루이를 국왕으로 초대했다. 하지만 전승국인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반대했다. 벨기에는 가까스로 얻어낸 신생독립국이었기 때문에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아야 할 형편이었다. 프랑스도 패전국이어서 더 이상 요구를 하지 못했다. 루이 국왕은 즉위 145일만에 쫓겨나야 했다.

의회는 새로운 국왕을 찾아 나섰다. 프랑스 사람도 네덜란드 사람도 아닌 제3의 귀족이 필요했다. 그때 후보로 떠오른 인물이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레오폴 1(Leopold I)였다. 그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에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군에서 활약한 경험도 있어 중립적인 인물이어서 새 국왕으로 적합했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은 11세기부터 독일과 폴란드의 여러 군주를 배출한 베틴 가문의 분파로서 독일 작센 계열 가문이다. 1826년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가문과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가문이 합병되면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이 출범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해 영국의 역대왕들도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이었다. 레오폴은 영국은 물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지를 얻었다.

레오폴은 1831721일 즉위했다. 벨기에는 이날을 국가기념일로 정해 경축하고 있다. 이후 이 가문이 벨기에 국왕을 이어가고 있다.

 

네덜란드는 열강의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듬해인 183182일 네덜란드 국왕 빌럼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벨기에를 침공해 신생 벨기에 왕국의 레오폴 1세의 군대를 무찔렀지만 프랑스가 개입하겠다고 위협하자 개전 10일만에 물러났다.(10일 전쟁)

1839419일 네덜란드와 유럽 열강이 런던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벨기에 독립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벨기에는 입헌군주국으로, 국왕은 국가의 원수로서 법률 최종 승인권, 총리와 각료 임면권 등 실질적 권한을 가질 뿐 아니라 매주 1회 총리와 독대, 현안을 챙긴다. 하지만 단독으로 입법권·행정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

현재 필립(Philippe) 국왕은 6대 국왕인 아버지 알베르 2(Albert II)가 양위를 하면서 20137월 즉위했다. 왕립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해공 중장으로 승진해 특전사, 낙하산 침투원, 헬리콥터 조종사 자격을 갖추었다. 연방국가인 벨기에의 지역 갈등을 봉합하고 국민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벨기에 필립 국왕 부부 /위키피디아
벨기에 필립 국왕 부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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