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릉 소왕릉에서 선화공주 단서는 없었다
쌍릉 소왕릉에서 선화공주 단서는 없었다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09.19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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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만에 발굴…문자없는 묘표석 2개만 발견, 왕릉급이라는 사실만 확인

 

선화공주의 무덤에 선화공주는 없었다.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는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 쌍릉이라 한다. 그 중 큰 것(대왕릉)은 무왕의 무덤이고, 작은 것(소왕릉)은 왕비인 신라 선화공주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100년만에 소왕릉을 발굴해 보았더니,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 석실 내부가 깨끗했다. 석실 앞과 봉분에서 묘표석(墓表石)이 발견되었는데, 적외선 촬영을 했지만 글자 하나 찾지 못했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익산 쌍릉(사적 제87) 중 소왕릉 발굴 결과를 발표했다.

소왕릉은 선화공주와 관련된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고분으로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하지만 이번 발굴에서는 선화공주와 관련한 적극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고 발굴팀은 밝혔다. 다만, 봉토나 석실의 규모와 품격에 있어서 왕릉급이라는 사실만 확인했다.

 

소왕릉 발굴 전경 /문화재청
소왕릉 발굴 전경 /문화재청

 

익산 쌍릉은 익산시 석왕동의 백제 시대 무덤으로, 대왕릉과 소왕릉이 180m가량 서로 떨어져 있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쌍릉은 백제 무왕과 그의 왕비 능으로 알려져 왔고, 고려 시대에 이미 도굴된 기록도 남아 있다.

두 고분은 1917년 일본인 학자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에 의해 발굴된 바 있으나, 정확한 정보를 남기지 않아 20178월부터 고분의 구조나 성격을 밝히기 위한 학술조사가 진행되어 왔다.

 

소왕릉에 대한 발굴조사는 올해 4월부터 진행되어 현재까지 봉분과 묘도의 축조과정과 양상을 파악했으며, 일제시대 발굴 흔적과 그 이전 도굴 흔적을 그대로 확인되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두 종류의 묘표석이 발견되었다. 석비(石碑)형으로 된 것과 석주(石柱)형으로 된 것이 나왔다.

석비형 묘표석은 일반적인 비석과 유사한 형태로 석실 입구에서 약 1미터 떨어진 지점에 약간 비스듬하게 세워진 채로 확인되었다. 크기는 길이 125, 너비 77, 두께 13이며, 석실을 향하고 있는 전면에는 매우 정교하게 가공되었고, 그 뒷면은 약간 볼록한 형태다.

석주형 묘표석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봉토 내에서 뉘어진 상태로 발견되어 원래 위치인지는 불분명하다. 길이 110, 너비 56의 기둥모양으로 상부는 둥글게 가공되었고, 몸체는 둥근 사각형 형태다. 이들 두 묘표석은 문자가 새겨지지 않은(無字碑) 형태로 발견되었다. 석주형 묘표석과 비슷한 예는 중국 만주 집안(集安) 지역의 태왕릉 부근에 있는 고구려 봉토석실분인 우산하(禹山下) 1080호의 봉토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석실 내부(북쪽에서 남쪽으로) /문화재청
석실 내부(북쪽에서 남쪽으로) /문화재청

 

이번에 묘표석들이 나온 소왕릉의 봉분은 지름 12m, 높이 2.7m 정도로, 암갈색 점질토와 적갈색 사질점토를 번갈아 쌓아올린 판축기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대왕릉 판축기법과도 유사하다. 석실은 백제 사비시대의 전형적인 단면 육각형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이다. 석실의 규모(길이 340, 128, 높이 176)는 대왕릉의 석실 규모(길이 400, 175, 높이 225)에 비해 작은 편이지만 측벽 2, 바닥석 3, 개석(덮개돌) 2, 후벽 1, 고임석 1매의 구조 짜임새는 동일하며, 석재 가공 역시 치밀한 편이다.

연도 1)는 길이가 짧은 편으로, 연도 폐쇄석과 현문(현실 2) ) 폐쇄석이 두 겹으로 구성되어 대왕릉과 같은 양상이다. 소왕릉 석실의 바닥에는 관대 3)(길이 242, 62, 높이 18)가 놓여있었다.

묘도4)는 석실 입구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규모는 최대 너비 6m, 최대 깊이 3m,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는 10m 가량이다. 일정한 성토(盛土, 성질이 다른 흙을 서로 번갈아 가면서 쌓아올리는 기술)를 통해 묘도부를 조성한 후 되파기한 걸로 판단된다. 폐쇄부는 점질토와 사질점토를 번갈아 쌓았다. 묘도부 10m 지점 끝단에서는 다듬은 석재를 이용해 반원형상의 석재를 놓아 묘역의 범위를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석실 천장의 북동쪽 고임석(천장부를 받치는 석재) 부분에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만들어진 길이 68, 높이 45정도의 도굴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이번에 발견된 묘표석은 각각 석실 입구와 봉토 중에 위치하고 문자가 없는 점에서 무덤을 수호하는 진묘(鎭墓)와 관련된 시설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백제 왕실의 장묘제 연구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평가된다.

 

위는 묘도 내 묘표석(석비형), 아래는 봉분내 묘표석(석주형) /문하재청
위는 묘도 내 묘표석(석비형), 아래는 봉분내 묘표석(석주형) /문하재청

 


1) 연도(羨道): 고분의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

2) 현실(玄室): 시신을 안치한 방

3) 관대(棺臺): 무덤 안에 시신을 넣은 관을 얹어놓던 평상이나 낮은 대(널받침)

4) 묘도(墓道): 무덤의 입구에서부터 시체를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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