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발해의 조선기술①…해상왕국 신라
신라와 발해의 조선기술①…해상왕국 신라
  • 정채호 코리아나호 선장
  • 승인 2019.09.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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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장보고를 거치며 신라의 해상기술 발전…동아시아 해상교역 장악

 

이글은 범선 코리아나호 선장 정채호씨기 2015124일 이사부기념사업회에서 강의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주

 

1. 신라의 해상교통

삼국 중에서 해상교통과 무역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했던 나라가 신라였다. 삼국 중기까지는 백제의 해상교통이 발달했으나 신라는 7세기 들어 삼국을 통일하면서 당나라와 일본·신라를 연결하는 해상교통과 함께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한 해상왕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삼한을 통일한 신라인들은 남해를 돌지 않고 서해의 직항로를 통해 중국과 무역은 물론 왕래를 활발하게 할 수 있었다. 신라는 제22대 지증왕 13(512에 울릉도를 병합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이를 보면 신라가 해상교통에 자신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6세기 중엽부터 신라인들의 배가 늘고 백성들의 해상교통이 왕성해지자 해상 운수를 통제하기 위한 선부(船府)가 제26대 진평왕 5(583) 1월에 설치되었다.

신라와 당나라간의 해상교통이 가장 왕성했던 때는 당나라 무덕왕 4(621)이었다. 이때 신라와 당은 두 개의 서해항로를 이용했다.

신라에서 당으로 갈 때에는 한강 하구나 남양만에서 산동반도로 직항하거나 전남 영암부근에서 흑산도를 거쳐 상해 아래 항주만을 통해 갔다고 <조선통사>에 기록되어 있다. 또 당에서 신라나 일본으로 갈 때는 산동반도 해안을 타고 북상해 발해만을 거쳐 여순대련압록강 입구를 지나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남양만이나 당진부근에서 육로를 따라 신라의 경주로 들어가거나, 남양만을 지나 남하해 완도의 청해진을 거쳐 부산경주로 들어갔다. 일본항로는 부산을 출발해 남지나해로부터 북상하는 흑조(黑潮) 해류를 타고 대마도로 향해 규슈일본으로 이어졌다고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당나라 이전의 중국과 신라의 해상교통은 어떤 루트로 이루어졌을까?

3세기후반 초기에는 요동반도 연안 항로를 개척해 왕래했다. 산동반도 북부해안의 봉래에서 요동반도의 남단 여순을 거쳐 요동반도 동해안으로 북상, 압록강 입구를 거쳐 한반도 서해안으로 오는 해로였다.

이때는 항해술과 배가 서해로 직항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주로 이 항로를 이용했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방해가 많아 어려운 항로였고 이에 따라 중국과의 원활한 교역을 위해서도 신라는 삼국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6세기 이후 고구려가 요동반도 연안해로를 본격적으로 막아 서해를 횡단하는 직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이는 고구려의 봉쇄도 있었지만 그만큼 항해술과 배가 발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한반도 서해의 남양만과 중국 산동반도를 직결하는 서해 직항로를 이용해 항해 시간과 경비를 절약했다. 서해 횡단항로는 4세기경 중국의 위나라가 개척해 사용했다. 원래는 육로를 통해 한반도 여러 나라들과 왕래했는데 4세기 초 요동반도를 공손씨 일파가 점령하고 세력을 키우면서 위와 한반도간의 육로를 막아서 할 수 없이 서해횡단 해로를 개척한 것이었고, 삼국시대에 와서는 고구려가 해로뿐만 아니라 당나라간의 육로를 봉쇄하는 바람에 신라는 위나라가 개척한 서해해로를 다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일본의 유명한 승려인 엔닌(圓仁, 794864)838년부터 847까지 96개월 동안 당나라를 여행하고 쓴 여행기에 신라의 해상교통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겨 신라의 해상교류가 발달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신라의 해상교통은 대개 세 시대로 나뉜다.

1) 신라건국부터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사신파견으로 중국과 국교를 맺고 세력을 강화하던 견사 해운시대가 처음이고,

2) 그 다음이 5세기 초부터 통일신라시대 동안 일본·중국과 무역이 왕성했던 해상교역시대

3) 그리고 마지막이 신라 말기 해상왕 장보고가 동남아해상 교역을 장악하던 시기다.

결론적으로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할 시대는 신라는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하여 대항해시대 일본.중국 등 해외교역 시작으로 통일신라의 해상왕장보고를 탄생케 하였다

 

신라가 극동의 해상권을 최대로 장악한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였다. 통일신라 후기에 접어들면서 신라 내 왕족과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정치적 혼란기가 찾아왔고,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개인 활동이 자유로워진 백성들이 마음대로 해상으로 진출해 대한해협과 서해·동지나해를 무대로 일본·중국과 해상무역을 급속도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는 정치적으로 쇠퇴할 무렵이었지만 민간의 해상활동은 더욱 강해져 극동의 해상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복원 장보고선 모형(전쟁박물관) /정채호 제공
복원 장보고선 모형(전쟁박물관) /정채호 제공

 

2. 해상왕 장보고의 활약

9세기 들어 신라가 해상교통·해상교역·항해술·조선기술에서 최대 해상왕국으로 발돋움한 데에는 해상교역의 대가였던 장보고(張保皐, ?846)의 공적을 빼놓을 수 없다.

장보고는 전남 완도 근방에 해상진출기지인 청해진을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병력을 이용해 동양 삼국에 출몰하는 해적을 소탕하면서 극동해상의 교역권을 장악했다. 장보고는 해상교역을 활발히 하는 동안 당나라와 일본의 사신·승려·유학생들의 왕래에 배를 제공하고 정부간 교류와 통신을 대신 해주는 한편 선박 건조와 수선 그리고 조선기술자들까지 도와주어 신라··일본으로부터 정치적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장보고는 전남 완도지방의 가난한 어민출신으로 소년 때부터 활과 창쓰기 등 무예에 능숙했을 뿐만 아니라 어민 출신답게 수영과 자맥질(잠수)도 잘했다고 한다. 그런 장보고에게는 소년시절부터 무예나 수영에서 뒤지지 않는 정년(鄭年)이란 죽마고우가 있었다.

철이 든 궁복(장보고의 소년 때 이름)과 정년은 가난에서 벗어나 출세하고 싶어 소년의 몸으로 당나라로 들어가 수련을 쌓은 후 청년이 되자 강서성에서 이 지역을 통치하던 총독인 무녕군의 군대에 입대, 뛰어난 무예와 총명함으로 무녕군 중소장(武寧軍 中小將)의 벼슬을 받아 장군으로 출세했다. 장보고가 당나라 장수로 출세했던 때 신라는 왕족간의 세력 다툼으로 정치가 혼란했던 통일신라 말기였다. 이 틈을 타서 한반도 삼면 근해에는 해적들이 자주 출몰해 해상 무역선은 물론 백성들을 괴롭히고 신라사람들을 붙들어 당나라로 끌고 가 노예로 팔아넘기는 극심한 행패를 부렸지만 쇠퇴하는 신라정부는 이를 막을 능력이 없었다. 이를 본 장보고는 특히 당에서 신라백성들을 노예로 매매하는데 분개해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교역을 보호하기로 결심한 후 828년 당나라 장군 자격을 포기하고 귀국해 해적 토벌 군사기지 겸 해상진출의 근거지로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다.

이어 당시 신라 임금이었던 제42대 흥덕왕(826836)에게 해적 소탕을 위해 군사 1만을 요청했다. 당에서 장군으로 출세했고 해상활동에 두각을 나타냈던 장보고를 알고 있던 왕은 골치 아픈 해적을 소탕해준다는 그에게 쾌히 군사를 주고 청해진대사(감독관)로 임명, 해적을 소탕해 신라의 해상권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장보고가 신라··일본 등 삼국해안의 해적을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은 1만의 군사와 그의 뛰어난 무예도 큰 바탕이 됐지만 그를 도와 준 두 세력도 큰 도움이 됐다.

한 세력은 한반도 서남 장보고의 고향 완도일대의 해민이었고 또 하나는 중국 산동반도 장강하구, 요동반도 해안, 경항 대운하유역에 일찍부터 건너가 살던 신라인들의 집단부락 세력들이다. 이들을 규합해 서해와 서남해안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극동해상교통을 지켜, 중국·신라·일본의 3국 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장보고의 해상왕국시대가 16년이라는 짧은 세월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은 그의 정치 관여 때문이었다. 왕위를 강제로 빼앗은 민애왕은 김명을 격파하고 장보고는 그가 돕던 왕족 김우징을 839년에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이에 신무왕은 감사하다는 표시로 감위군사라는 직위를 장보고에게 내리고 진해장군이라 불렀다. 그러나 신라조정의 신무왕 반대파 귀족과 왕족들이 장보고의 부하인 염장을 시켜 서기 846년 그를 암살하고 신무왕을 몰아냈다.

이후 문성왕이 제위 13(851)에 청해진을 없애버려, 삼국바다의 교통·무역·군사를 장악하던 해상왕국은 사라지고 말았다.

 

신라인들은 중국과 해상교류를 시작했던 3세기 무렵부터 항해기술을 배워 신라의 해상형편에 맞도록 개발시켰다. 당나라 시대에는 신라의 항해기술이 당나라보다 훨씬 발전해 전성기를 이룬다.

백제는 한성, 웅진성, 사비성 등 역대 수도를 중심으로 도로와 다리를 건설해나갔다. 백제의 활발한 도로 건설은 영토의 확장과 관련이 있다. 도로교통과 더불어 고대 통신법인 봉화제도도 일찌감치 발달했다.

신라가 해상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항해기술이 일찍부터 발달했던 것도 한몫 했다. 신라인들은 중국과 해상교류를 시작했던 3세기 무렵부터 중국의 항해기술을 배워 신라의 해상형편에 맞도록 더욱 개발시켰던 듯하다.

이런 신라의 항해술은 당나라 시대에 이르면 당나라의 항해기술보다 훨씬 발달하여 항해술의 전성기를 이룬다. 신라의 항해술을 이해하기 전에 당나라의 항해술은 어떻게 발달했는지 살펴보면 큰 도움이 된다. 신라와 당나라는 당나라 건국 때부터 멸망 때까지(618907) 무역을 중심으로 한 경제교류, 문화교류, 나당 연합군의 군사교류, 사신교류 등으로 긴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따라서 항해술·조선기술·선단 운영술을 발전시키는 데 당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장보고는 소년 시절에 당으로 들어가 청년이 된 뒤 당나라 장군이 되기까지 당에서 오래 살았는데, 이때 발달된 항해술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고사기(古史記)<해도지>(770), <해조부>(850), <해조론>(900) 등에 따르면 당은 정확한 해류의 파악과 이를 이용한 항해술이 매우 발달했다. 해마다 4월에서 7월까지 중국 동해안에는 서남 계절풍이 불었는데, 바로 그 계절풍을 타고 일본에서 당으로 갔다.신라의 배는 이미 6세기 초부터 강이나 연안 해로에서 돛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신라와 당이 돛 달린 해선으로 본격적인 항해를 한 것을 8세기 초로 보고 있다.

중국 고사기인 <태평어람>에는 조병이라는 무역거상 이야기가 나오는데, 돛을 펴고 배 중앙에 앉아 큰 고함으로 바림을 불러 유유히 바다를 건넜다고 전한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연대를 추정한 듯하다. 바람과 돛만 있다고 해서 넓은 바다를 항해할 수는 없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로 뱃길을 잘 아는 것이다. 당나라는 실용적인 항해도를 일찍부터 만들어 썼다. 군부 내에 직방랑중(織方郞中)이라는 항해도 전문 작성 부서까지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대의 명재상인 매탐(賣耽)이 만든 항해도인 등주해행입고려발해도(登州海行入高麗渤海道)’에 당에서 한반도 서해로 가는 해내화이(海內華夷)’라는 뱃길이 그려져 있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구름 낀 날이나 별 없는 어두운 밤에도 항해할 수 있도록 나침반도 만들어 이용했다. 나침반은 고대 중국의 발명품인데, 당의 나침반은 지남철 침을 이용한 것으로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부터 쓰던 관측성술, 즉 별을 관측하는 기술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이렇게 중국과 오래 교류하면서 신라에는 항해도, 즉 뱃길을 잘 알고 나침반을 능숙하게 다루는 항해사인 암해자(暗海者)’가 많았다. 그 증거로 당에 들어갔던 일본 사람 엔닌(園仁)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귀국선단(船團)의 배 아홉 척에 신라인 암해자 60명을 분승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신라는 항해 기술의 기본을 당에서 배워 발달시킨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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