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발해의 조선기술②…우월한 신라 선박
신라와 발해의 조선기술②…우월한 신라 선박
  • 정채호 코리아나호 선장
  • 승인 2019.09.23 10: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과 중국에도 조선기술 전파…당나라 주요 항구에 신라인들 조선소

 

신라인들은 3세기부터 바다를 거쳐 중국으로 내왕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해선이었다.

초기에는 육지 연안을 따라 내왕하는 연안 해로였기 때문에 주로 노를 젓는 배를 썼지만 다양한 통로로 바다를 건너는 해로교통이 발달하던 4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의 배 만드는 기술도 점차 발달했다. 그래서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 당나라의 조선기술보다 크게 앞섰다. 또한 신라는 개국 초기부터 일본의 침략을 자주 받아 이를 막느라 수군(水軍)과 배가 꼭 필요했다. 그래서 특히 군선, 즉 바다에서 싸울 수 있는 전투용 배를 만드는 기술도 함께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14대 유례왕 6(289)22대 자비왕 10년에 군선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일본에 배 만드는 기술자를 파견한 기록도 있다.

4세기 무렵 일본의 배는 기둥과 대들보를 줄로 엮어 만든 원시적인 떼배여서 신라왕이 조선기술자를 파견했다고 한다. 이때 신라에서는 목판을 붙일 때에 나무못이나 쇠못을 쓰지 않고 요철로 파내어 결합시키는 기술이 이미 발달했다. <일본서기> 오진천황 사기(史記)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무코(武庫)의 수문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배 500척이 모여 있는데, 신라의 사신이 타고 온 배에서 불이 크게 번져 많은 배를 불태웠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은 유능한 조선기술자를 보내어 배를 만들었다. 이 사람이 곧 이나베 가문의 시조인 저명부(猪明部).” 기록상으로는 저명부가 일본에 건너간 신라의 첫 조선기술자인 셈이다. 오사카만 무코강 입구에서 불에 탄 신라사신의 배를 다시 만들어주고 저명부는 그대로 무코강 입구에 눌러 앉았다. 그런 뒤 그곳에 조선소를 세워 일본에서 배를 만들면서 조선기술을 전했던 것이다.

뒤에 이나베라는 일본 이름으로 바꾼 저명부의 자손들은 이세만() 연안의 나고야로 옮겨 조선 기지를 건설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신라의 배 건조기술을 가르치는 한편, 일본 사신들이 당나라로 갈 때 타던 견당선(遣唐船)도 만들었다. 이나베 가문이 일본에서 만든 배는 신라 배와 구조나 크기가 같았다는 것이 증명된 일이 있다. 이세만 연안지방의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 고분에서 `하나와` 라는 일본 배가 출토된 게 그것이다. 100명쯤 태울 수 있는 이 배는 5세기 무렵의 대형 구조선으로서 노를 꽂는 구멍이 12개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와 배와 매우 닮은 배 모양 토기가 경주에서 발굴되기도 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6세기에 등장한 일본의 견당선도 하나와 배에서 발전된 모습으로서, 신라조선기술로 만든 배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뛰어난 조선기술은 배와 관계 깊은 여러 역사적 사건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22대 지증왕 6(505)에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선(軍船)을 제도화시켜 수군을 강화했다. 23대 법흥왕 4(517)에는 이 군선단을 지금의 국방부 격인 병부(兵府)에 소속시켰다.

26대 진평왕 5(583)에는 병부에 군선과 일반 무역선을 관리하는 선부(船府)를 설치해 수군과 일반 백성들의 해상교통을 보호하고 통제하는 데에 힘썼다. 그리고, 29대 무열왕 7(660)에는 왕자 법민(法敏)이 군선 100척을 이끌고 덕적도까지 출항하여 당의 수군을 환영했다는 기록도 있다. 통일신라 초기인 제30대 문무왕 18(678)에는 중국·일본과 해상교류가 급증하여 선박이 많아졌다. 그래서 병부에 속했던 선부를 독립시켜 병부와 같은 자격을 주고 수군과 군선, 그리고 해상 무역 제도를 더욱 강화,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막강한 수군과 발달된 배는 문무왕이 당나라와 동맹한 연합 수군을 이용하여 676년 통일신라를 이룩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신라의 조선기술이 발달한 동기 가운데 하나는 서해와 동지나해 연안으로 이주했던 신라 유민들의 힘도 켰다. 일본 승려 엔닌의 기행문인 <입당구법승려행기>(794864)<속일본기>를 보면 그런 기록을 살필 수 있다.

 

장보고의 군선 /정채호 제공
장보고의 군선 /정채호 제공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중국에는 신라 해상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양자강과 경항 대운하 등 산동반도의 항구들 주변에 자리 잡고 살던 신라 해상민들은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신라인 집단촌을 열 군데나 꾸렸다.

그들이 운송·조선· 무역업·상업·제조업에 종사하여 중국에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치외법권의 특혜를 누리도록 허락했다. 특히 양자강 어귀 유산포 항구에는 서해를 건너다니는 신라인들의 대형 해양선들이 모여들어 배의 수리업과 함께 조선업도 크게 번창했다. 당나라 거주 신라 해상민들의 조선기술은 뛰어났다. 목판 한쪽을 가늘게 깎은 장부를 다른 목판에 뚫은 구멍에 끼워 맞추는 기술, 쇠못을 깎아 만드는 기술, 방수기술이 남달랐다. 그리고, 물에서 잘 썩지 않는 녹나무 같은 특수목재로 배를 만드는 조선기술까지 선보였다.

신라인들은 이런 조선기술로 원양 항해선뿐만 아니라, 하천이나 강에서 운행하는 수운선, 전투함, 경주용 용선(龍船) 등 다양한 배를 만들었다.

중국의 고서인 <구당서>에 이런 기록이 잘 나온다. 기록을 보면 신라인이 건조한 배들이 양자강의 나루터들을 장악하고, 수만 척의 배들이 주야로 왕래하여 교역을 했다. 특히 원양 항해용 해선은 선체가 웅장하고 안정성이 뛰어나 아라비아와 일본인들이 타기 좋아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게 훌륭한 신라인들의 조선기술은 당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쳐 중국 배는 당나라시대에 비로소 크게 발전한 듯하다. 당나라의 동래·강주·양주·상주·항주·복건 등 주요 항구에는 신라와 당나라 사람이 만든 수많은 조선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많은 배를 만들어 군사·운수·교역에 쓰였음이 중국 고서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삼국시대의 선박(전쟁박물관) /정채호 제공
삼국시대의 선박(전쟁박물관) /정채호 제공

 

3. 신라의 배 모양과 종류

1960년 양자강변에서 당나라시대의 배와 선창이 발견되었다. 길이 24m, 높이 1.4m, 너비 4.3m의 이 대형 당나라 선박은 녹나무로 만들었는데 장부 맞춤과 못박이 기술로 짜 맞춘 완벽한 방수선이었다.

1973년에 양자강변의 마항에서 출토된 길이 17m, 너비 2.6m의 삼나무로 만든 목선은 선실이 9개에다 돛이 하나 있는 범선이었다.

이 두 배는 신라의 조선기법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배들이 출토된 양자강변은 신라의 유민들이 살던 곳으로, 당나라·일본·신라인들의 출입이 잦던 항구들이 집중해 있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양자강변 화남도에 있는 양주와 초주 항구 근방 치외법권 지역에 모여 살던 신라인들은 해상운수업과 무역이 주된 산업이었다. 따라서 이에 필요한 선박제조와 수리업이 번성했던 것은 당연했다.

 

그러면 신라방의 신라인들이 만든 배의 모양은 어떠했을까? 엔닌의 일기나 당나라 고서인 <구당서> 기록에 잘 설명되어 있다. 범선은 갑판이 없으며 중앙에 돛과 노와 키가 있는 배다. 관선(官船)은 갑판이 있으며 문과 창이 달린 방 하나에 주위에는 난간이 설치되었고 갑판과 선창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사다리가 있었다.

방인 누각 말고는 갑판에 천막을 쳤으며, 배의 조립은 나무판재를 구부려 못으로 결합했다. 또 무거운 닻을 끌어올리고 내리는 승하강장치가 달려 있고 스무 폭쯤 되는 천으로 만든 큰 돛을 쓰는 대형 해선이었다. 이러한 신라방의 선박들은 일본 배보다 안전해서 일본 사신들이나 무역상들이 즐겨 탔다. 그 증거가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담겨 있다. 이 여행기의 저자인 일본승려 엔닌이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할 때 신라 선박 9척을 신라방에서 빌려 신라 선원 60명을 태운 이야기는 앞에서도 했다. 바다를 건너다니는 해양선은 밑바닥이 칼날처럼 생긴 첨저선(尖底船)’이고, 연안을 주로 다니는 해안선은 서해안의 얕은 수심에 편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을 이용했을 것으로 본다.

항해술이 뛰어난 장보고는 속력이 빠른 배가 필요했을 것인데, 배의 속도를 좌우하는 것은 돛의 숫자다. 따라서 두 개가 넘는 독립적 기능을 가진 대형 돛을 설치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나 역사학자들의 결론이다. 1984년 전남 완도 앞바다에서 배가 한 척 발굴되었다. 완도선이라고 부르는 이 배는 선미와 선수부가 없고 상부도 삭아 없어져 배의 남은 길이는 9m, 너비가 3.5m, 높이가 1.7m로 그다지 큰 배는 아니었다. 하지만 학계는 이 배를 해안을 항해하던 장보고의 청해진 배로 보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