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3만명 학살한 곳, 이스탄불 히포드로모스
시민 3만명 학살한 곳, 이스탄불 히포드로모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9.2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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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흥망사가 서려있는 역사적 장소…지금은 두 개의 오벨리스크와 뱀의 기둥만 남아

 

정식명칭은 술탄 아흐메트 광장(Sultanahmet Meydanı)이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경마장인 히포드로모스(Hippódromos of Constantinople)로 더 널리 알려진 장소다. 히포드로모스는 그리스어로 말을 의미하는 히포스와 길을 의미하는 드로모스의 조업어다. 여기서 경마와 전차 경주가 열렸다.

203년 셈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황제가 처음 건설한 후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확장했다. 길이 450m, 130m의 말굽 모양 경기장이 이곳에 있었다. 관중석은 3~5, 많게는 10만명을 수용할수 있었다.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 약탈과 방화로 철저히 파괴되면서 웅장했던 경기장의 모습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현재는 직사각형의 광장에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와 청동뱀의 기둥, 콘스탄티누스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을 뿐이다.

 

콘스틴티노플 히포드로모스 광장에 남아 있는 두 개의 오벨리스크 /김현민
콘스틴티노플 히포드로모스 광장에 남아 있는 두 개의 오벨리스크 /김현민

 

동로마제국 황제가 빵과 서커스로 대중을 현혹시키던 시절에 이 곳이 자주 이용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히포드로모스는 전차경기와 검투사 경기, 서커스 등을 보면서 여론을 만들어 가는 정치 중심지이기도 했다.

특히 전차경기를 응원하던 청색당과 녹색당이 정치조직으로 탈바꿈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적 사건이 이곳에서 일아났다. 귀족계급을 지도층으로 정통파 교리를 지지하던 청색당과 상공업계 출신을 중심으로 단성론을 지지하던 녹색당은 서로 적대하며 경쟁하기도 했다.

청색당과 녹색당은 황제의 절대권력화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저항하며 니카 반란을 일으킨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경기장에 모인 시민 3만명을 무참히 학살했다. 이로부터 고대 그리스로부터 내려오던 시민정신이 사라졌고,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전제 정치가 시작된다. 니카 반란 진압을 독려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부인 테오도라도 이곳에서 전차경주 도중에 열리던 공연단 출신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의 미모와 총명함에 반해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귀족과 천민의 결혼을 금지한 법까지 고쳤다고 한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의 부조. 테오도시우스 1세 로마 황제가 전차경주를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김현민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의 부조. 테오도시우스 1세 로마 황제가 전차경주를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김현민

 

오스만 시대에는 이곳에 말을 타고 창을 던지는 지릿(Girit) 경기가 벌어졌기 때문에 말의 광장이라는 의미의 앗 메이단’(At Meydan)이라고 불렸다.

술탄의 궁전과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오스만 시대에도 정책에 의견을 피력하는 정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826년 마흐무트 2세가 군사적 비효율성과 재정 낭비린 예니체리를 폐지하고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려고 하자, 예니체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마지막 남은 예니체리 반란군 5개 대대가 포병대의 일제 사격을 받아 이곳에서 전멸했으며, 반란 진압후에는 많은 이들이 공개처형 당했다.

1909년 입헌군주제에 반대하는 수구세력과 종교지도자의 지지를 업은 군인들이 이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헌법 개정을 주도하던 청년 장교단의 군대가 폭동을 진압하고 옛 체제로 돌아가려 했던 술탄 압탈하이트 2세를 폐위시켰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김현민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김현민

 

<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

BC15세기경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스 3세 가룩소르 카르낙 신전에 세워졌던 오벨리스크를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0년에 이 자리로 옮겨와 세웠다. 이 땅에서 직접 만든 것은 이니지만 이스탄불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셈이다.

원래 높이는 30m 정도였으나 지금은 20m 저도다. 아래 받침대는 오벨리스크를 이 자리에 세우면서 만든 것으로 히포도로모스의 전차경주를 관람하는 황제 가족과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작업 모습등이 새겨져 있다.

 

콘스탄티누스 오벨리스크 /김현민
콘스탄티누스 오벨리스크 /김현민

 

< 콘스탄티누스 오벨리스크 >

10세기경 콘스탄티누스 7세가 세운 기둥이다. 원래는 32m 높이로 탑을 쌓고 조각을 새긴 청동판을 씌운 아름다운 기념탑이었다.

하지만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한 후 청동판을 벗겨내면서 옛모습을 잃었다. 현재의 것은 1894년 지진으로 훼손된 것을 다시 복구한 것이다.

 

뱀의 기둥 /김현민
뱀의 기둥 /김현민

 

< 뱀의 기둥 >

두 오벨리스크 사이에 있는 뱀 모양의 기둥이다.

BC 5세기경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세운 것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6년에 가져왔다.

원래는 기둥 꼭대기에 3개의 뱀 머리와 황금 그릇이 있었지만, 4차 십자군 점령 당시 황금 그릇부터 사라졌고, 뱀 머리 하나는 오스만 제국 정복후 100년만에, 나머지 두 개는 1700년 경에 사라졌다. 이를 두고 정복자 메흐메트가 도시에 들어오면서 하나를 자르고, 술에 취한 폴란드 대사 일당이 나머지 두 개를 잘랐다는 설 등이 있다. 하지만 모두 근거가 불분명하다.

1700년경에 잘려진 뱀머리는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다가 1847년에 일부가 발견되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뱀의 기둥에서 잘려나간 뱀의 머리(이스탄불 고고학 미술관) /위키피디아
뱀의 기둥에서 잘려나간 뱀의 머리(이스탄불 고고학 미술관) /위키피디아
뱀의 기둥 주변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뱀의 기둥 주변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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