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발해의 조선기술③…발해, 일본 항로 개척
신라와 발해의 조선기술③…발해, 일본 항로 개척
  • 정채호 코리아나호 선장
  • 승인 2019.09.24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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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차례 일본과 교류, 대일 발해 사절단 100명~1천명…동해안 따라 남하

 

발해는 고구려 귀족 출신 대조영이 서기 698년 세운 나라다. 당나라는 대조영의 세력을 꺾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대조영을 발해왕으로 책봉했다. 발해는 정치·경제적으로 당의 속국 형태로 발전했고 전성기인 9세기 때는 고구려보다 더 넓은 땅을 갖게 되었다.

 

. 발해의 해상 교통 발해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당나라와 벌인 조공(朝貢) 교역이나 동해를 오가며 일본과 활발하게 벌인 교역에는 바닷길 두 곳이 주로 쓰이고 발달했다. 이들은 각각 조공도(朝貢道), 일본도(日本道)로 불린다.

첫째 해로인 조공도는 당나라를 왕래하는 길이다. 육로를 거쳐 압록강 어귀로 나와 배를 타고 중국의 황해 연안을 따라 산동반도의 등주까지 가는 뱃길인데, 등주에서는 육로로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가게 된다. 이 항로는 중국대륙의 연안을 따라 항해하기 때문에 비교적 쉬운 해로였다.

발해는 개국한 뒤 229년 동안 당나라에 조공과 문물 교류를 위해 몇 십 명에서 120여 명에 이르는 사절단을 143회나 파견했다. 따라서 초기부터 줄곧 이용했던 이 해상교통로는 수많은 내왕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이 바탕이 된, 가장 안전했던 바닷길이었다. 하지만 둘째 해로인 일본으로 가는 길은 당나라 항로보다 훨씬 어렵고 험했다. 일본으로 가는 관문인 용원부의 동경성(훈춘) 근처의 염주에서 배를 타고서 해류가 험하고 복잡한 동해를 횡단해야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따라서 당나라 해로보다는 더욱 뛰어난 항해기술이 필요했다. 발해는 초기부터 무수한 고난과 모험을 감수하며 수십 차례나 일본을 왕래하면서 항해기술의 경험을 축적했다. 결국 발해의 뛰어난 항해기술은 이처럼 일본과 교류하느라 자주 동해를 횡단하면서 얻은 셈이다.

 

건국에서 멸망할 때까지 229년 동안 문물 교류와 정치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발해의 사절단은 동해를 건너 34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가는 발해 사절단은 적으면 100, 가장 많을 때는 1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발해의 항해술이 그만큼 발달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발해에 관한 당나라 사기나 삼국사기 기록을 찾아보면, 당나라로 내왕하는 해로에서는 일본항로에서처럼 길을 잃어 표류하거나 험한 파도 때문에 난파당한 기록이 없다. 즉 일본 해로보다 비교적 개척이 쉬웠다는 얘기다.

그러나 일본서기를 보면 발해가 일본 해로를 개척할 초기 표류하거나 거센 파도에 난파당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발해는 이렇게 어려웠던 초기의 일본 해로 개척에서 얻은 경험으로 항해술과 조선술을 발달시켰고 해류와 계절풍을 이용할 줄 알게 되었다.

따라서 후기부터는 염주와 함흥 일대의 동해안 북부에서 동해를 따라 남하해,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거처 일본으로 들어가는 비교적 안전한 해로를 개척, 왕래했다.

발해가 본격적으로 일본과 교류를 시작한 것은 제3대 문왕 때부터다. 일본서기를 보면, 776년 문왕인 대흠무는 일본 왕 조견을 위해 사도몽을 인솔자로 167명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는데, 이 일행은 동해를 건너다 조난을 당해 사도몽을 포함한 46명만 살아 일본에 도착했다.

또 이로부터 2년 후인 778년 일본의 사신 일행이 동해를 건너 발해로 가다가 험한 파도와 폭풍우 때문에 배가 파손되어 발해의 염주(크라스키노)에서 두 척의 배를 새로 만들어 일본으로 귀국했다는 사실도 <속 일본기> 광인천황편에 기록되어 있다. 모두 초기 일본항로 개척의 어려움을 알려주는 기록들이다. 발해는 일본과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했던 초기(727~819) 항해기술이 미숙하고 경험이 적어 무수한 고난을 겪었다. 동해를 건너다 폭풍과 거센 파도 등으로 표류하거나 배가 난파당하곤 했다. 50년쯤 되는 초기 해상교통 경험은 발해의 조선기술과 항해기술을 놀랍게 발전시켰다.

일본으로 가는 안전한 해로의 개척에 계절풍과 해류를 이용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더욱 빠르고 튼튼한 배를 만드는 조선기술도 발달했다.

해류를 이용해 일본으로 진출한 것은 고조선시대가 처음이다. 고조선 후기 사람들이 일본으로 갈 때 이용한 해류는 흑조(黑潮)였다.

고조선 사람들은 한반도 서해쪽으로 흐르는 흑조와 한류를 타고 한반도 서해안으로 내려와 남해쪽을 지나 대마도를 거쳐 다시 일본 동해안으로 흐르는 흑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발해도 물론 고조선시대부터 개척한 해류항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해의 계절풍을 본격적으로 이용한 항해기술 개척은 발해가 처음인 것 같다.

 

발해의 일본항로도 /정채호 제공
발해의 일본항로도 /정채호 제공

 

초기에는 발해 내륙의 각 성에서 일본도의 관문인 용원부의 동경(훈춘)으로 나와 이곳서 가까운 동해안의 항구인 조구위 또는 염주에서 배를 타고 동해를 직접 횡단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항해 기술의 부족으로 표류, 난파 등의 어려움이 많았고 일본 동해안 북부지역의 야마가타 또는 아키타 해안에 구사일생으로 도착하는 일도 잦았다.

이후 발해는 동해를 건너다니며 해류는 물론 계절풍을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해 새로운 일본행 해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즉 일본으로 갈 때는 9월에서 12월 사이 겨울철에 출발했다. 해마다 이 무렵에 대륙에서 대양으로 부는 북서풍과 남하하는 차가운 한류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구 위에서 배를 띄워 신라를 피해 멀찌감치 한반도 동해를 따라 남하해 울릉도 부근에서 큰 어려움 없이 일본 동해안 중부의 이시가와나 후쿠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또 일본에서 발해로 갈 때는 여름인 6~8월 사이에 출발했다. 이것도 해마다 이 시기에 대양에서 대륙으로 부는 동남 계절풍과 북상하는 해류인 쿠로시오(흑조) 해류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해가 이런 계절풍을 이용하는 항해술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810년경이었는데, 이런 항해술을 익히기까지 거의 1세기가 걸린 셈이다.

발해가 계절풍 항해술을 이용하기 전에는 동해 횡단 때 자주 일어나는 항해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발해와 일본 양국에서 사절단을 호송하는 호송사를 동행시켰다. 즉 일본을 방문한 뒤 귀국하는 발해 사절단은 일본 호송선단이 발해 해안까지 따라갔고, 발해를 방문하고 귀국하는 일본 사절단도 발해 호송선의 보호를 받으며 동해를 건넜다.

그러나 서기 810년 이후에는 발해나 일본에서 호송사와 호송선단을 파견한 기록이 없다. 아마도 이때쯤 계절풍과 해류를 이용하는 항해술이 발달하고, 그 뒤 조선기술도 함께 발달해 표류하거나 선박이 부서질 걱정 없이 마음대로 일본을 왕래하게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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