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발해의 조선기술④…발해 원양선박 건조
신라와 발해의 조선기술④…발해 원양선박 건조
  • 정채호 코리아나호 선장
  • 승인 2019.09.25 10: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꺼번에 1천명 탈수 있는 선박 건조…9세기 이후 계절풍 이용해 항해

 

. 발해의 조선 기술

발해의 조선술에 관한 기록이나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나라와 일본의 발해 관련 기록이나 항해기록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발해 건국 35년째인 733, 2대 왕 대무예(무왕)는 당나라를 공격하려고 거대한 함대를 조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발해 건국 초기에 이미 조선술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술이 발달하지 않고는 군선(軍船)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속 일본기>에는 778년 일본사신이 발해로 가다가 배가 심하게 파손되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발해왕이 염주에서 배 두 척을 만들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얼마 전 염주 근방 연해주 남부 해안에서 발해의 조선소 유적지가 발견된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발해가 당나라로 파견한 사절단은 가장 많은 때에 128명이나 됐는데, 이 많은 인원이 탈 수 있는 배는 대형 해양선이라야 했다. 또 험한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갈 때에는 1천명까지 한꺼번에 움직이기도 했는데, 이것도 거대한 원양 항해선박을 만드는 조선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일본의 당나라 유학 승려인 엔닌(圓仁)<입당구서순례행기>에서 그가 당나라로 들어갈 때 등주의 삼천포에서 발해의 무역선인 교관선(交關船)을 많이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역선이 많다는 것은 당나라와 해상무역이 성행했고 아울러 조선술이 발달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발해의 해양선 /정채호 제공
발해의 해양선 /정채호 제공

 

. 발해 배의 모양

발해의 배 모양과 크기는 그림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고고학자들은 중국의 정크선이나 일본의 견당선과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발해의 해양선은 초기부터 돛과 노를 이용해 바다를 건너다녔다. <속 일본기>의 공인천황 편에는 이를 뒷받침하듯 ‘776년 일본에 파견한 발해 사절단의 배가 대마도를 지나다가 폭풍을 만나 노가 부러지고 돛이 떨어져 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또 당나라 시인 온정균(溫庭均)이 당나라 임금에게 조공을 하고 귀국하는 발해 왕자를 환송하면서 읊은 시에도 돛이 나온다. 그는 시에서 포구에 다다르니 가을 물결이 이별을 재촉하는데, 돛을 펴니 새벽노을이 깃 폭에 걸려라고 표현했다.

김육불이 쓴 <발해국지장편>과 황유한이 쓴 <발해국기>에는 서기 771년 발해왕 대흠무(무왕)가 대신인 일만복과 모항록을 포함한 일본파견 사절단 325명을 돛과 노배 17척에 나누어 타고 일본으로 가도록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배의 크기는 전기와 후기가 달랐다. 전기의 배는 30~40인승 돛배로 100톤급 일본 견당선과 비슷한데, 길이가 20m, 너비 6.5m, 높이는 1.5m쯤 이었다. 후기의 배는 한층 튼튼하고 크게 발전해 평균 100인승 돛배로서, 무게 200톤에 길이는 25m, 너비 7m, 높이는 1.7m쯤 되었다. 이는 전기의 견당선보다 용적이 두 배나 큰 것이다. 한편, 이 배는 갑판 위에 누각이 있는 누선(樓船)이었다.

발해의 배는 삼각형 돛보다 바람의 여러 형태를 잘 이용할 수 있는 튼튼한 직사각형 돛을 썼다. 그리고 수심이 깊고 해안선이 단조로우며 암초도 적은 동해에 맞게 평저선 보다는 속력이 빠른 첨저선(尖底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의 해양선이 일본의 견당선과 비슷할 것이라는 견해는 일본이 발해의 사신을 위해 배를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를 증명할 옛 기록이 있다.

72710월 발해 무왕은 장군 고인의 인솔로 사절단 24명을 처음으로 일본에 파견했다. 사절단은 염주를 출발해 동해를 횡단하다가 항해술 미숙으로 대마도 해류를 따라 떠내려가 일본 동해 중부해안 아키타 근방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장군 고인과 16명은 이 지역의 토호국인 데와국 왕 에조에게 붙들려 죽었고 8명만 겨우 목숨을 구했다. 이들은 무왕의 국서와 선물인 담비가죽 3장을 가지고 일본의 왕도인 헤이조경으로 들어가 일본 왕에게 전했다.

그러나 배와 항해사를 잃은 발해사절단의 귀국길이 막히자 일본 왕은 새 배를 만들도록 했다. 발해사절 8명과 이들을 호송할 호송병사 62명을 태울 배 두 척은 1년 뒤에 건조되어, 사절단은 7285월에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 35명이 탈 수 있도록 만든 이 배는 그 무렵 일본의 견당선과 모양이 같은 매우 큰 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발해의 배들은 일본을 왕래할 때 대부분 염주나 북청 근방에서 직접 동해로 나가는 원양항해를 했다. 이것은 동해연안을 따라 남행할 때 신라의 군사적 정치적 간섭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원양항해에는 해류와 계절풍의 이용도 중요하지만 별을 보고 항로를 측정하는 천문항법도 중요했다. 따라서 이 방면에 경험과 기술이 숙달된 천문항법사도 필수적으로 함께 배를 타고 다녔을 것으로 보인다.

9세기 초 이후 계절풍을 이용한 항해술을 개발해 비교적 쉽게 일본을 오가던 880년경에도 발해사신의 배는 동해에서 종종 난파당해 일본에서 배를 만들어 주었고 특히 발해사절의 배는 좋은 나무로 만들도록 일본 왕이 배려했던 기록도 <일본삼대실록>에 나온다.

한편, 발해 사절단의 배가 만들어진 곳은 하쿠이산과 후쿠우라산 근처의 하쿠이 또는 후쿠이항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발해 후기 일본을 오간 발해 사절단들은 일본에서 돌아올 때 주로 이 두 항구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견당사 선박 /정채호 제공
일본의 견당사 선박 /정채호 제공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