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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1453년 오스만의 포화에 함락…육지 성벽은 3중구조, 해안 성벽은 바다
2천년 로마 명맥 이어온 테오도시우스 성벽
2019. 09. 27 by 김현민 기자

 

터키 이스탄불의 구도심은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다. 콘스탄티노플은 마르마라 해와 금각만(골든혼), 보스포루스 해협에 둘러싸인 뿔 모양을 이루는데, 동로마제국 시절에 해안과 육지에 성을 쌓았다.

콘스탄티노플 성벽(Walls of Constantinople)은 테오도시우스 2(Theodosius II) 황제 때 지었다고 해서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walls)이라고도 한다.

 

복원된 테오도시우스 성벽 /위키피디아
복원된 테오도시우스 성벽 /위키피디아

 

초기 성은 로마제국의 콘스틴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면서 쌓았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테오도시우스 2세 때인 421년에서 422년 사이에 육지 성벽을 외곽으로 밀어내 다시 축조하고, 성벽을 삼중구조화했다.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훈족의 아틸라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려다 성벽의 견고함에 놀라 이 성을 공격하기보다는 손쉬운 먹이감을 찾아야겠다며 기수를 돌렸다고 한다.

626년 페르시아의 쿠스로 2세가 슬라브족과 아바르족과 연합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지만, 실패했고, 신흥 이슬람교로 무장한 사라센이 674~678년 사이 5년간 육지와 바다에서 성을 포위했지만, 실패했다. 717년 아랍은 1,800여척의 함대에 8만명의 군대를 이끌로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지만 당시 동로마제국(비잔티움)3년치 식량을 쌓아 놓고 농성작전을 펼쳐 적을 물리쳤다.

821년 슬라브인 토마스가 쳐들어왔고, 860년과 941, 1043년 러시아가 쳐들어왔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철옹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육지의 성은 워낙 견고해 웬만한 기병으로 돌파할수 없었고, 해안 성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물결이 거세 해안에 배를 댈수 없었다. 바다에 떠있는 적함은 동로마군이 쏘아대는 그리스의 불이라는, 지금도 확인되지 않은 화염 무기에 줄줄이 불탔다.

하지만 자연재해에는 약했다. 수시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해 성벽을 허물었고, 그때마다 성을 보수했다.

이 성은 두 번 뚤렸다. 성을 쌓은지 800년 되던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공격에 콘스탄티노플 성채는 함락되었다. 그때 수비병이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았기 때문이지, 성의 견고함에는 이상이 없었다.

결국 성은 현대식 포에 의해 무너졌다. 오스만군은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왔지만, 성내에는 7천명만 남아 있었다. 비잔티움군은 한 달 반 가량을 용감하게 저항했지만, 성벽은 포격에 의매 무너지고, 그 틈으로 오스만군이 물밀 듯 들어오면서 함락되었다.

453529일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2(Mehmed II)는 이 성을 차지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 성을 함락하면서 동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2000여년의 명맥을 이어오던 로마제국도 이 성과 함께 마지막 흔적을 지워버렸다.

 

콘스탄티노플의 형세 /위키피디아
콘스탄티노플의 형세 /위키피디아

 

육지 성벽은 해자를 갖추고 있다. 해자 뒤의 흉벽과 너비가 2m, 높이 5m인 내성벽, 너비 5m, 높이 12m인 외성벽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 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육로에 면한 6km정도만이 삼중구조로 되어 있었다. 해안가의 성벽은 보통의 단일구조로 되어 있었다.

해안 성벽은 마르마라해 연안과 금각만을 따라 둥글게 시가지를 둘러싸고, 육지 성벽은 마르마라와 금각만 사이를 잇고 있었다. 해안 성벽에는 11개의 문이 바다 쪽으로 나 있었으며, 현재 복개된 리크수 강이 콘스탄티노플 성내를 가로질러 갔다.

 

육지 성벽의 구조 /위키피디아
육지 성벽의 구조 /위키피디아

 

해안 성벽은 한겹으로 지어졌지만 마르마라 해의 급류 때문에 선박을 성벽까지 갖다 대기가 어려웠으며, 육지성벽은 내성과 외성의 이중구조로 튼튼하게 지어졌다.

오스만 점령 이후에도 성벽의 사당 부분이 원형대로 유지되다가 19세기 이후 성벽 경계 밖으로 도시 규모가 확장되면서 철거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대규모의 복원 공사가 이뤄졌다. 성벽 가운데 형태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은 해안 성벽보다는 육지성벽 쪽이다. 카리예 박물관 근처에 있는 카리시우스 성문와 예니쿨레가 있는 황금문 주변의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예디쿨레 요새 /위키피디아
예디쿨레 요새 /위키피디아

 

육지 성벽 남쪽 끝에 예디쿨레 요새(Yedikule Fortress)가 마르마라 해와 닿아 있다. 술탄 마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기존의 탑 4개에 3개를 더해 새로운 요새로 만들었다. 예디쿨라라는 말은 7개의 탑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제1문이자 황제의 개선문인 황금문이 있던 지리지만 예디쿨레성이 지어지면서 황금문은 성문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오스만 시대에는 전쟁 상대국의 대사나 왕족을 감금하는 수용소로 사용되었는데, 1622년 예니체리 반란 때 술탄 오스만 2세가 이 곳에 감금되었다가 처형되기도 했다.

비잔티움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무너지자 도시가 무너졌는데도 나는 아직도 살아 있구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전사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해안 성벽 /위키피디아
해안 성벽 /위키피디아
해안가에 남아 있는 성벽 /김현민
해안가에 남아 있는 성벽 /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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