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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 때부터 지정학적 중요성 인정…오스만 패권의 출발, 1차대전 격전지
동서양 패권의 중심, 보스포루스 해협
2019. 09. 28 by 김현민 기자

 

보스포루스 해협(Bosporus Strait)은 길이 30km, 너비 5503,000m, 수심 60125m,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의 경계를 이루는 해협이다. 흑해와 마르마라 해 사이를 연결하는 수로인데, 지중해 입구인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ait)과 마르마라해를 합쳐 터키 해협(Turkish Straits)이라 부른다.

이 두 해협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교통로라는 점이다.이 수로를 막으면 흑해가 봉쇄되어 호수로 변하게 된다. 흑해를 끼고 있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불가리아, 조지아 등 옛 소련연방과 그 영향권 국가들의 수로가 막히게 된다.

 

터키 해협 /위키피디아
터키 해협 /위키피디아

 

보스포루스 해협은 군사적 요충지로, 고대부터 이 수로를 장악하는 나라가 패권을 장악했다.

그리스 시대에는 도시국가 아테네가 흑해 연안에 식민도시를 건설하며 이 수로를 활용했다.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1세는 배를 연결한 부교를 놓아 연안의 스키타이(Scythia)를 공략했고, 이어 다르다넬스 해협 1km에 부교를 연결해 그리스를 침공했다. 고대에 1km의 부교를 놓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페르시아왕은 이 해협을 지나지 않으면 그리스를 넘볼수 없었기에 그 어려운 전술을 채택했다.

보스포루스의 지정학적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한 로마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였다. 그는 330년 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했다. 그후 로마제국은 분열되어 동로마제국이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하기 까지 보스포루스 해협을 낀 콘스탄티노플은 1120여년간 동로마(비잔티움)의 수도였다.

 

보스포루스 해협 /위키피디아
보스포루스 해협 /위키피디아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수도를 이 곳으로 옮겨 이스탄불로 바꾸었다. 1922년 터키 공화국이 수도를 앙카라로 이전하기 까지 이스탄불은 오스만의 수도였고, 보스포루스 해협은 오스만 해군의 수로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에 이르기까지 이 곳은 16백년간 세계의 중심이자, 제국의 수도였다.

 

다르다넬스 해협 /위키피디아
다르다넬스 해협 /위키피디아

 

보스포루스 해협는 콘스탄티노플의 해자 역할을 했다. 아바르, 불가르, 러시아, 사라센, 아랍이 콘스탄티노플을 숱하게 공격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난공불락이었다. 육지 성벽은 감히 넘보기 어려웠고, 해협에 수백척의 함대로 공격해도 물살이 빠르기 때문에 배의 접안이 쉽지 않았다. 또 비잔티움은 그리스의 불이라는 화염무기를 쏘아 해협의 적선을 불태웠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의 화포에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 무너지면서 보스포루스를 포함해 마르마라해, 다르다넬스 해협은 오스만의 내해가 되었다.

이스탄불은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비해 확장된 영역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포함하는 도시로는 유일하다.

보스포루스는 또 지중해로 연결하는 통로다. 로마제국 시절에는 제국의 영역을 흑해와 코카서스로 확장하는 길목이었고, 동로마제국 시절에는 북아프리카, 이집트, 중동 해안, 이탈리아를 공격하고 지배하는 수로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모습 /김현민
보스포루스 해협의 모습 /김현민

 

오스만은 보스포루스를 손에 넣으면서 동유럽으로 진출했고, 마침내 두차례에 걸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을 두 번이나 공격할수 있었다. 오스만이 또 북아프리카, 이집트, 중동을 를 지배한 것도 보스포루스 일대에 주둔한 해군을 손십게 파견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스포루스는 적의 침공을 쉽게 하는 역기능도 했다. 동로마제국 시절에는 사라센, 아랍, 불가르족이 수시로 수로를 따라와 콘스탄티노플을을 공격했고, 오스만 시절에도 러시아 해군과 이집트 해군이 이 수로를 통해 이스탄불을 위협했다.

터키 해협의 중요성은 1차 세계대전 때에 보여주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붙은 터키를 와해시키기 위해 1915년 다르다넬스 해협의 갈리폴리 반도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갈리폴리 전투에 영국군 35, 프랑스군 8, 터키군 31만명이 뒤엉켜 전투가 벌어졌고, 수만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50만명이 사망, 부상, 실종된 악몽이 벌어졌다. 오스만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전쟁에서 패전하면서 나라가 연합군에 의해 해체 직전에 이르렀다.

보스포르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은 15세기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그 중요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지금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하면서 서방의 입장에서 대러시아 봉쇄를 위해 지정학적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본 이스탄불 구도심(옛 콘스탄티노플) /위키피디아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본 이스탄불 구도심(옛 콘스탄티노플) /위키피디아

 

이스탄불에서 보스포루스 페리 여행은 꼭 해야 할 필수항목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참사가 콤플렉스로 남아 있긴 했지만, 우리는 페리를 탔다. 여행 시간은 2시간 정도. 한강유람선 여행에서 느끼는 것과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

해협 양 옆으로는 여러 궁전이 나오고 멋드러진 호화주택이 즐비하다.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루멜리 요새(Rumeli Hisari)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가장 좁은 부분에 자리잡은 성채다. 1452년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읠 공격하기 위해 전초전으로 이곳에 성채를 지어 비잔티움 제국의 보급로를 끊었다고 한다. 로마 시대에 요새가 있었고, 비잔티움인과 제노바인들이 감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해협 건너편 아시아 연안에는 1394년 술탄 바예지드 1세가 지은 아나둘루 요새(Anadoluhisarı)가 있다. 두 성채 사이의 거리는 660m에 불과하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부교를 놓았던 곳이다.

루멜리 요새는 하나의 작은 탑과 세 개의 주요 탑이 있고, 세계의 탑을 연결하는 벽을 따라 13개의 감시탑이 세워졌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오스만은 이 곳을 선박을 관리하는 검문소로 사용했다. 17세기에는 전쟁포로를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되다가 1746년에 화재로 탑의 목재 부분이 모두 불탔다. 1955년에 복원이 시작되었다.

 

아나둘루 요새 /위키피디아
루멜리 요새 /위키피디아
아나둘루 요새 /위키피디아
아나둘루 요새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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