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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킬라 효과…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등 라틴아메리카 경제, 일제히 휘청
1995 멕시코 위기②…21세기형 첫공황
2019. 10. 02 by 김현민 기자

 

1994년 멕시코 경제는 미국 중앙은행의 고금리 정책으로 하루아침에 파괴되고 말았다. 월가의 돈이 멕시코 경제 발전을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 투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문을 주기에 멕시코로 갔던 것인데, 미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려 1년 전보다 두배의 이윤을 보장해 주겠다는데 멕시코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가뜩이나 정치도 불안한데 그들은 멕시코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외국인 투자자, 엄밀히 말하면 미국 투자자들은 1994년말 멕시코에 투자한 돈 중 250억 달러를 빼내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대규모 자금 이동이 컴퓨터 키보드 조작 하나로 끝났다. 멕시코 중앙은행은 국내의 부족 외환을 메우기 위해 비상금으로 확보하고 있던 지하창고에서 보유 외환을 꺼내 풀었다. 중앙은행은 페소를 달러에 묶어놓는 고정환율제를 채택해 왔으나, 더 이상 페소화 폭락을 방어할 재간이 없었다.

살리나스 대통령의 뒤를 이은 에르네스토 세디요(Ernesto Zedillo)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된 12월초 멕시코의 외환보유고는 61억 달러로 마침내 바닥을 들어냈다. 월가의 투자자들은 더 이상 멕시코의 채무이행 능력을 의심하고 자금 회전을 중단했다.

신정부는 1222일 더 이상 대외 채무를 갚을 능력이 없음을 공식선언하고, 이듬해 1월 페소화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1달러당 3.45 페소였던 환율이 이듬해 1105.78 페소로 66.7%나 절하됐고, 주가는 40%나 폭락, 경제는 일거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멕시코 위기는 국제 금융자금, 좁게 말하면 뉴욕 월가의 투기자금이 이윤을 쫓아다니며 움직이는 머니게임의 산물이다. 멕시코의 번영은 환상에 불과했고, 환상이 깨지면서 멕시코는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이다.

패닉은 멕시코에만 그치지 않았다. 남미에 투자된 자금이 동시에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바람에 1995년초 라틴아메리카 주식시장이 두달 사이에 38%나 폭락했다. 이른바 데킬라 효과(Tequila Effect)’. 멕시코인들의 술을 데킬라라고 하는데서 나온 말이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등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경제가 일제히 데킬라를 마신 것처럼 휘청거렸다.

 

멕시코 위기가 터지자 로렌스 서머스(Lawrence Summers) 재무부 부장관은 ‘21세기의 첫 공황이라고 표현했다. 그 뜻은 무엇일까. 국제 금융시장은 이미 단일 시장이 됐고, 단일 시장의 첫 공황으로서 멕시코 위기가 등장했다는 뜻이다. 미셸 캉드시(Michel Camdessus) IMF 총재는 멕시코의 금융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글로벌 경제에 대재앙이 닥쳐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페소화 방어를 포기하고부터 멕시코의 비극은 시작됐다. 세디요 대통령이 처음으로 내세운 대책은 중앙은행, 노동자, 농민, 재계 대표들을 불러 모아 경제안정 비상대책위원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13일 근로자들에게 임금 인상 억제를, 기업에는 가격 인상 억제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중앙은행에 대해서도 공공지출 및 통화 증발을 자제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정부 차원에서는 제도 개혁과 공기업 민영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을 밝혔다. 사회 각 계층이 자기 밥그릇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서로 고통을 분담하며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임금 억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금융 시장은 대책 발표 이전보다 악화돼 공황상태로 빠져 버렸다. 미국의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사는 멕시코에 대한 신인도를 하향 조정했고, 테소보노(tesobono, 달러표시 해외채권)의 발행이 좌절됐다.

미국은 IMF를 내세워 멕시코에 개입했다. 멕시코를 돕자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그렇지만, 사실은 멕시코에서 투자한 월가 투자자들의 손실을 보전해주기 위한 것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잘못된 투자를 한 금융인은 손해를 보아야 한다. 시장은 투자자의 잘못을 처벌한다. 그게 금융시장의 논리다. 그런데 클린턴 행정부는 자국의 자본이 멕시코에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점검할 겨를도 없이 IMF를 동원 멕시코 지원을 결정했다. 금액도 무려 500억 달러로 IMF 지원 사상 최대규모였다. 이번이 마지막 지원이라는 말도 주석으로 달았다. 그러나 이 보다 많은 금액이 2년후 한국에 지원됐지만...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IMF 구제금융은 미국 정가를 뒤흔들었다. 공화당 강경파들은 멕시코에 대한 지원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는 멕시코에 대한 긴급 수혈을 감행, 낙엽처럼 떨어지던 페소화 폭락을 일단 진정시켰다. 미국 재무부 관리들은 보란 듯이 자랑했다.

공짜 점심은 없다(No Free Lunch)’는 말이 있다. 특히 국제금융 사회에서는 이 말이 진리에 해당한다. 미국 재무부와 IMF는 긴급 수혈을 해준 채권자로서 멕시코 경제의 거시정책을 쥐고 흔들었다.

미국 재무부와 IMF구조 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가혹한 거시경제 정책을 멕시코에 주문했다. 외국인 투자자의 이탈을 저지하기 위해 고이자율 정책을 유지하고, 시중은행의 대출을 통제했다. 또 멕시코 정부로 하여금 예산을 삭감하고 세금을 늘려 흑자 재정을 유지하도록 요구했다.

불황기에 경기를 진작시키려면 정부가 적자 재정을 시행해야 한다. 정부가 채권을 발행하거나 중앙은행을 통해 돈을 찍어냄으로써 경기 활성화 정책을 취하는 것이 상식이다. 금리를 낮추도록 거시경제를 운용해야 하며, 은행으로 하여금 자금 공급을 확대토록 해야 한다. 그러나 IMF의 처방은 돈을 빌려준 자로서 돈을 받기 위해 채무자를 철저히 관리하기 위한 조치들이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고금리를 보장하기 때문에 멕시코에 투자매력을 느낄 수 있지만, 멕시코 국내 기업들은 높은 이자에 허덕였고, 그나마 돈줄이 꽁꽁 막혀 부도 사태가 줄을 이었다. 정부도 미국과 IMF의 눈치를 보느라 경기 부양책을 운용하지 못했다.

멕시코 정부는 페소 위기를 맞아 다른 선택의 길이 있었다. 즉 국가비상사태를 발동, 외환 유출을 통제하고, 유입되는 외화에 대해 고금리를 보장하는 방식이다. 물론 외국 통화와 국내 통화 사이에 이중 이자율이 적용되는 시장 왜곡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국가비상사태에는 용납되는 일이었다. 멕시코의 일부 경제학자들은 당시 이 방식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지만, 세디요 대통령은 이를 간단히 무시했다. 그 스스로가 미국 동부의 명문 예일대에서 공부하면서 자유시장 경제이론을 배웠기 때문이다.

 

세디요 정부는 강요에 의해서건, 자발적이건, 긴축 정책을 선택하고 각부분의 허리를 졸라매고 경제 재건에 나섰다. 만일 세디요 정부가 채권단에 저항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를 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IMF에 저항한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이 나중에 어떻게 됐는가를 보면서 상상의 날개를 펴보자.

혼미를 거듭하던 멕시코 경제는 19952월 미국이 200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하고, IMF도 구제 금융패키지를 준비하자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310일 세디요 대통령은 신경제정책을 발표, 공공지출 삭감, 엄격한 통화관리, 물가 및 세금 인상 등을 내걸었다.

이러한 조치는 응급 조치에 불과했다. 세디요 정부는 5월 국가계발 계획을 발표, 2000년까지 실행되는 6년간의 장기청사진을 제시했다. 물론 IMF의 요구사항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내세운 계획이었다. 과감한 세제 및 금융개혁 제조업, 농업, 광업, 관광업등 4대 산업 육성 기업에 대한 규제완화등을 통해 연간 5% 대의 지속적인 성장을 이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의 조치에 대해 멕시코 재무부 대변인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장 결실을 얻지 못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열매를 거둔다는 심정으로 개혁의 씨를 심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지지율이 떨어지는 조치도 있지만,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개혁 조치의 골자는 경쟁제도의 도입과 국영 기업의 민영화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부가 가지고 있는 알짜기업을 해외에 매각, 부족한 외화를 유치하며, 국내 경제제도를 미국식 개방 경제로 이끌겠다는 뜻이다. 석유화학 철도 광산 항만시설등 공기업을 단계적으로 민영화해 나갔으며 통신분야의 구제가 철폐됐다. 은행과 기업들이 더 이상 내수 시장의 독점에 안주할 수 없는 여건이 됐다.

노동자들도 더 이상 자기 주장만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됐다. 199510월에는 기업, 노조, 농민 대표들로 노사정 협의회가 구성됐다. 노사정 협의회는 경제 회생 방안을 마련, 경제 살리기에 나섰다. 협의회는 매주 수요일 경제대책 협의를 통해 모든 경제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하오 5시에 시작된 회의는 첨예한 대립으로 새벽에 타결되기도 했다. 노사정 합의에 따라 국민들도 경제 안정화 정책에 적극 협력, 소비 지출이 크게 감소하는 효과를 낳았다. 정부도 공무원 수를 대폭 감축, 감량 경영을 솔선 수범했고, 국민들도 대량 감원과 임금동결, 인플레이션의 고통을 이겨냈다.

멕시코는 위기후 7개월 만인 19956월 국제 자본시장에 나서 기채를 할 수 있게 됐다. 국제적 금융지원에 힘입어 외환, 증권 시장도 95년 하반기 들어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했고, 치사 직전의 경제는 서서히 회생하기 시작했다.

페소화 평가 절하는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수출을 확대시켰고, 국제 수지 개선에 결정적 호재로 작용했다. 1994184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던 무역수지는 9573억 달러의 흑자로 전환됐다. 경상수지가 좋아지면서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도 위기전 수준으로 늘어나 페소화 환율도 안정세로 돌아섰다.

멕시코는 예상외로 빠르게 경제를 회복했고, 세디요 정부는 2년후인 19971월 미국으로부터 받은 125억 달러의 긴급 구제자금 전액을 상환했다. 고금리의 자금을 저금리로 전환한 것이긴 하지만, 클린턴 행정부로선 구제 금융의 효과를 선전하기에 좋은 재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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