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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제국의 방위상 필요성, 원로원의 간섭 배제 등…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천도
동로마①…왜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했나
2019. 10. 02 by 김현민 기자

 

터키 이스탄불(Istanbul)은 비잔티움(Byzantium),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란 이름을 거치며 형성된 수천년의 역사 도시다.

BC 667년 고대 아테네 근처에 있던 그리스 도시국가 메가라(Megara)의 주민들이 식민지 도시로 건설한 뒤, 이들의 왕 뷔자스(Byzas)가 자신의 이름을 따 비잔티움이라 불렸다. 이어 기원후 330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the Great)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또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지었다. 그로부터 1,123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1453년 오스만 투르크가 점령한 이후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소피아성당에 그려진 그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을 지어 성모 마리아에게 헌상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성 소피아성당에 그려진 그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을 지어 성모 마리아에게 헌상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그러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왜 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을까.

서기 31210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는 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Constantinus I)가 또다른 로마황제 막센티우스와 결전을 앞두고 꿈을 꾸었는데, 신비한 환영이 나타났다. ‘카이-(Chi-Rho) 십자가로 불리는 라바룸(Labarum)’이 꿈에 나타난 것이다. 라바룸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꿈에 나타난 그리스도는 내일 전투에서 이긴다고 말하고, 기독교도를 나타내는 문자 가운데 XP를 합친 문자 라바룸을 병사들의 방패에 그리게 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명을 충실히 따라 병사들의 방패에 라바룸 문자를 그리라고 지시했다.

다음날인 1028, 로마 북쪽 티베르 강에 위치한 밀비우스 다리(Milvius bridge)에서 두 명의 로마 황제가 전투를 벌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병력수는 10만명, 막센티우스의 군대도 75,000에서 12만명 사이. 막상막하의 전투였다.

막센티우스가 먼저 공격했다. 막센티우스 군대의 선두가 밀비우스 다리를 건너고 후미가 다리 건너편에 있을 때, 콘스탄티누스의 기병대가 적군 대열의 허리를 끊었다. 맥센티우스 군대가 둘로 갈라지면서 중무장한 보병과 기병이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전투 결과는 콘스탄티투스의 압승이었다. 막센티우스도 전사했다. 콘스탄타누스의 교묘한 전략이 승리를 이끈 것이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이 전투의 승리를 그리스도에게 돌렸다.

 

밀비우스 다리 /위키피디아
밀비우스 다리 /위키피디아

 

이 전투에 승리함으로써 로마의 실권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는 이듬해 그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다. 3132월 콘스탄티누스 1세는 또다른 공동황제 리키니우스와 함께 지금의 밀라노에서 칙령을 발표했다. 내용은 모든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포함해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따를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밀라노 칙령은 그리스도교를 비롯해 모든 종교에 대해 신앙의 자유, 포교의 자유를 허용한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해 박해를 중지하라고 지방 총독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로써 그리스도교가 로마에서 공식적으로 황제의 지지를 얻어 포교활동을 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허용한 황제라는 점에서 기독교도들은 그를 대제’(the Great)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모습 /위키피디아
콘스탄티노플의 모습 /위키피디아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제국을 나눠 통치하는 게 싫었다. 드디어 314년 두 공동황제는 전쟁을 벌였다. 9년간의 전쟁 끝에 323년 콘스탄티누스를 리키니우스를 제압하고 제국의 단독황제가 되었다.

단독황제가 된 그는 제국의 수도 로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주로 동방의 비잔티움에 머물면서 가끔 로마에 들렀다. 로마는 로마신화에 근거한 이교도들의 풍토가 강했고, 초기 기독교는 동방에 왕성한 포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기독교 신앙심이 깊어진 콘스탄티누스는 해가 갈수록 비잔티움에 대한 애착이 강해졌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시시콜콜 황제의 권력에 대항해 간섭하려는 로마의 원로원이 싫었다. 절대권력은 간섭을 싫어한다. 황제는 다른 곳으로 수도를 옮기면 로마의 토착귀족들의 영향력을 줄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시 정세로도 전략적으로 비잔티움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었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동고트인, 사르마티아인들이 동부로 남하하고 있었다. 방위의 필요성 때문에 황제는 제국의 동방을 지킬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비잔티움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스의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라고 이름을 바꾸고 신도시 건설을 명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영어식 표현이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해, 금각만(골든혼)이 에워싼 콘스탄티노플은 방어에도 유리했다. 금각만은 자연이 빚어낸 천혜의 항구였고, 육지만 방어하면 누구도 감히 넘볼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할 장소였다.

 

비잔티움 위치 /위키피디아
비잔티움 위치 /위키피디아

 

콘스탄티누스의 명으로 초석이 세워지고 고귀한 그리스도가 죽은 십자가를 예루살렘에서 옮겨와 세웠다. 대형 원형경기장이 들어섰고, 그곳에 그리스 델포이신전에서 뱀의 기둥을 가져와 세웠다. 해협과 마르마라해가 보이는 언덕에 궁전이 건축되었다.

궁전과 교회, 원형경기장 주변에는 수많은 일꾼과 기술자들이 열심히 일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약탈해온 조각, 기념물, 예술품들이 신도시에 옮겨졌다. 신도시는 로마에 비해 크지는 않았지만,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탈바꿈했다.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신도시가 건설된다는 소문에 로마 시민들은 황제가 수도를 옮기려 한다며 불만이 높아졌다. 하지만 약삭빠른 일부 원로원 귀족들은 콘스탄티노플로 이사를 와 황제 주변을 맴돌았다.

준공식은 그의 즉위 25주년을 맞아 특별한 행사와 함께 대미를 장식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성 이레네 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하면서 성모 마리아에게 도시를 헌납했다. 그날이 330511일이었다. 동시에 콘스탄티누스는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실제 그는 오래전부터 콘스탄티노플에서 주재했는데, 천도를 공식화한 것이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로마제국이 동과 서로 분열된 이후 동로마의 수도로 1천년 이상 제국의 번영과 쇠락을 함께 했다.

 

오스만에게 함락되기 직전인 1422년 콘스탄티노플 지도 /위키피디아
오스만에게 함락되기 직전인 1422년 콘스탄티노플 지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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