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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세금, 무분별한 법집행에 민중반란…유스티니아누스, 진압후 성당 재건축
동로마②…니카 반란 피 위에 세운 소피아성당
2019. 10. 03 by 김현민 기자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Justinianus I, 재위 527~565)는 옛 로마제국의 영토를 상당부분을 회복하고, 동서로 나눠진 교회를 통일하고 로마법 대전을 만든 영웅적 황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제국의 시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즉위초에 니카의 반란’(Nika riots)을 진압하면서 수많은 신민을 무차별 살상한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당시 동로마제국의 최대영토 /위키피디아
유스티니아누스 1세 당시 동로마제국의 최대영토 /위키피디아

 

재위 5년째가 되던 532113.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원형경기장(히포드로모스)에 수많은 시민들이 전차경기를 보기 위해 모였다. 황제가 경기장에 입장해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자, 관중들은 일제히 큰 소리를 질렀다. 시민들은 니카! 니카!”(Nika! Nika, 이겨라! 이겨라!)를 외쳤다. 그 소리는 경기를 응원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황제를 비난하는 소리였다. 이 반란의 이름을 니카의 반란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나온다. ‘경기장의 반란이라고도 한다.

경기를 응원하는 청색당과 녹색당의 두 진영이 모두 황제를 지목하며 위협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전차경주는 취소되었다. 성난 군중들은 경기장을 나와 닥치는대로 파괴했다. 시위대는 치안대 건물을 부수어 갇혀 있던 죄수들을 모조리 풀어주고 건물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치안대장 저택으로 향했고, 원로원을 거쳐 이레네 성당과 소피아 성당으로 향했다. 날이 저물 무렵 수많은 건물들이 잿더미로 변했고, 콘스탄티노플 전역이 매케한 연기로 뒤덮였다. 신성한 지혜의 성당(소피아 성당)은 소실되었다.

다음날에도 군중들은 경기장에 모여 황제의 특근인 징세관 요한네스와 법무관 트리보니아누스, 치안대장 에우다이몬을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황제는 시위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들을 해임했다.

기세등등해진 군중들은 전 황제의 조카인 히파티우스를 황제로 옹립하고 유스티니아누스의 퇴진을 요구했다.

 

전차경기 모습 /위키피디아
전차경기 모습 /위키피디아

 

이 사건에는 복잡한 배경이 있다.

우선 유스티니아누스의 과도한 세금정책과 일방적인 법집행에 문제가 있었다. 황제는 거대한 성당들을 짓기 위해 새로운 과세제도를 도입하고 카파도키아 출신의 요한네스라는 자를 징세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무자비하게 세금을 걷었다. 탈세하는 사람은 감금하고 고문을 했으며, “어느 아내, 어느 처녀, 어느 젊은이도 모욕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또 황제의 법무관 트리보니아누스는 후안무치하고 타락한 이교도였다. 그는 법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챙겼고, 돈을 준 사람의 요구에 따라 법을 마음대로 적용한 인물이었다.

이런 가운데 우연한 사건이 발생했다. 532110일 히포드로모스 경기장에서 전차경기가 끝난후 청색당과 녹색당이 서로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청색당과 녹색당은 전차 경기를 응원하는 두 진영의 옷색깔에서 나온 이름인데, 계급적, 지역적, 종교적으로 패가 갈리면서 정치 세력화했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군대도 보유하고 있었다.

현대판 훌리건이었다. 경기장에서 난동이 벌어져 사망자가 났고, 황제는 군대를 투입해 질서를 회복했다. 이때 청색당이든 녹색당이든 가리지 않고 체포해 황제는 두 진영의 공동의 적이 되었다.

 

테오도라 모자이크 /위키피디아
테오도라 모자이크 /위키피디아

 

청색당과 녹색당은 힘을 합쳐 새 황제를 옹립하는 반역세력으로 둔갑했다. 궁지에 몰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대신들과 회의를 하며 수도에서 도망치는 방안을 논의했다. 대신들은 시간이 촉박하니 당장이라도 대피하라고 주장했다.

그때 황후 테오도라가 회의실을 열고 들어섰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어떻게 두려움 때문에 몸을 피할수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제손으로 황후의 의상을 벗지 않을 것이며, 죽는 순간까지 황후라는 명칭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떠나고 싶으면 가십시오. 저는 자주식 황제복은 고귀한 수의라는 옛말에 따를 것입니다.”

 

이스탄불의 히드로포모스 /위키피디아
이스탄불의 히드로포모스 /위키피디아

 

여기서 황후 테오도라(Theodora)에 대해 알아보자. 그녀는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원형경기장에서 곰을 다루는 일을 했고, 어머니는 곡예사였다. 테오도라도 무대에 올라 광대극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 매춘부가 되었다. 역사가들은 젊은 시절 황후의 매춘부 생활에 혹평을 했다. 고관의 정부가 되기도 했고, 아프리카를 전전하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에 빠졌다. 종교를 가지면서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태자 시절에 경기장에서 테오도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둘 다 열렬한 청색당 지지자였고, 함께 응원하면서 만났다는 게 정설이었다. 하지만 당시 황실은 테오도라의 비천한 신분 때문에 그들의 결혼을 반대했고, 황후가 죽은 후에야 둘은 결혼식을 올렸다.

유스티니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 테오도라는 단순히 황후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황제와 함께 통치하면서 국가 대소사의 결정에 황제에 주요한 조언자 역할을 했다.

 

소피아성당의 모자이크. 콘스탄티누스 대제(오른쪽)가 콘스탄티노플을, 유스티니아누스 1세(왼쪽)가 소피아성당을 아기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운데)에게 헌상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소피아성당의 모자이크. 콘스탄티누스 대제(오른쪽)가 콘스탄티노플을, 유스티니아누스 1세(왼쪽)가 소피아성당을 아기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운데)에게 헌상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다시 본래의 얘기로 돌아오자. 유스티니아누스는 황후의 말에 도피하려는 생각을 바꿨다. 황제는 군대를 동원하기로 했다. 그는 두 장군에게 병력 동원을 지시했고, 두 장군은 시위대를 피해 병영으로 가서 군대를 이끌고 왔다.

군중들은 히드로모스라 불리는 원형경기장에 모여 있었다. 대략 3만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진압은 무지막지했다. 군대가 경기장을 포위하고 한사람도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대학살극이 벌어졌다. 출구마다 병력을 배치해 도망가는자 모두를 처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황제를 향한 분노의 함성은 죽어가는 자의 신음소리로 바뀌었다.

군중들 사이에 끼어있던 참칭 황제 하파티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앞에 끌려왔다. 황제는 자비를 베풀고자 했지만, 황후가 만류했다. 군중에게 제관을 받은 자는 언젠가 다시 역심을 품을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는 다음날 간단히 처형되었고, 시신은 바다에 던져졌다.

학살극은 끝났다. 경기장에 모였던 모든 시민들이 피살되었고, 죽은 자의 수는 대략 3만명이라고 한다. 이 학살극을 진행한 두 장군중 하나가 벨리사리우스(Flavius Belisarius), 후에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정복해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동로마제국 사상 최대의 영토를 안겨준 장본인이다.

 

성 소피아 성당 /위키피디아
성 소피아 성당 /위키피디아

 

니카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황제는 난동자들이 불태운 소피아성당을 재건하기로 결심했다. 반란이 진압된 다음달인 5322, 황제는 소피아성당 재건축을 지시했다. 이반된 민심을 종교적 신앙심으로 되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황제 스스로도 이 성당을 자신의 업적으로 삼고 싶었다.

그는 새로 지어질 소피아 성당은 이전의 모습과 달라야 한다면서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어야 하고, 정사각형이며 중앙의 높은 지붕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혁명적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Anthemius)와 밀레투스의 이시도루스(Isidorus)라는 두 건축가가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천재적인 두 건축가는 불과 6주일만에 설계를 마쳤다.

성당 북쪽에 5천명, 남쪽에 5천명의 인력을 배치해 서로 경쟁을 붙였다. 속주에서 고대 유물을 수도로 가져 오게 했다. 높이 48m, 너비 32m의 거대한 돔 천장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이전에 지어진 어느 성당보다 몇배나 넓고 높았다.

5371227, 건물이 완공되었다. 510개월 4일 걸렸다. 처음으로 성당에 들어온 유스티니아누스는 아주 작은 소리로 솔로몬이여, 나는 당신을 이겼도다고 중얼거렸다.

이 초대형 건축물은 15백년의 기나긴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니카 반란을 진압하고, 소피아성당을 재건한 이후 벨리사리우스에게 병력을 주어 북아프리카 반달족을 물리치고, 로마제국의 본향인 이탈리아를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모자이크 /위키피디아
유스티니아누스 모자이크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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