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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최초의 여제, 성상파괴 중지…아들 죽이고 제위에 올랐다는 오명
동로마③…이레네와 샤를마뉴가 결혼했다면
2019. 10. 04 by 김현민 기자

 

동로마제국에 이레네(Irene of Athens)라는 여제(女帝)가 있었다. 그녀는 황후에서 시작해 아들을 죽이고 동로마제국에서 단독으로 제위(August)에 올라 성상파괴령을 중지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레네가 제위에 있을 때, 교황은 로마제국에 여자가 제위에 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Charlemagne)를 황제로 인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녀는 아테네 출신이었다. 그녀의 가계와 조상도 불명확하고, 당시 고향인 아테네는 보잘 것 없는 속주에 불과하던 변방이었다.

이레네는 미인이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5세때 황실에 들어와 767년 황태자 레오와 결혼했다. 레오 7세가 왜 그녀를 선택했는지, 역사가들도 궁금해 하지만 그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레오 7세가 재위에 오른후 이레네는 황후가 되었고, 초기에는 남편의 뒷바라지만 했을 뿐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레오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황후는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780년 여름, 남편인 레오 7세가 심한 열병에 걸려 아들 하나를 남기고 죽었다. 10살에 불과한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가 황제가 된 이후 이레네는 아들 황제의 섭정으로, 아들을 죽이고 직접 여황제가 되어 제국을 통치했다. 그녀의 독재는 22년간 지속되었다.

 

동로마 이레네 여제 얼굴을 그린 금화 /위키피디아
동로마 이레네 여제 얼굴을 그린 금화 /위키피디아

 

당시 동로마제국에는 성상파괴운동(Iconoclasm)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동로마의 성상파괴운동은 이슬람과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두 종교는 신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을 일체 금지했고, 동로마는 이슬람과 전쟁을 벌이면서 우상 거부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특히 소아시아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기도에 정진하던 수도사들이 성상파괴의 논리를 받아들여 콘스탄티노플의 정통파들과 대립했다.

성상파괴는 앞서 레오 3(재위 717~741)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725년 연설을 통해 우상숭배자들의 지나친 행동을 지적하고, 이는 모세의 십계명중 우상숭배를 거부하라는 두 번째 계명에 위배된다고 견해를 밝혔다. 이어 그는 소피아성당 서쪽 청동대문(칼케)에 있던 커다란 그리스도 성화를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성상을 숭배하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반역행위가 일어났지만 곧바로 진압되었다. 로마의 교황은 자신을 무시하고 일을 집행했다고 항의했고, 이에 레오 3세는 730년 성상을 금지하라는 칙령을 내려 교황청과 대립했다.

성상파괴는 레오 3세에 이어 콘스탄티누스 5, 레오 7세까지 이어졌지만, 이레네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성상 공경을 부활시켰다. 그리스 출신인 그녀는 어려서 배운 대로의 신념을 교회정책으로 밀고 나갔던 것이다. 787년 니케아 공의회는 성상파괴론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성상을 경배의 대상으로 끌어올렸다. 730~787년 기간을 제1차 성상파괴운동이라고 구분한다.

 

9세기성상파괴운동 (그림) /위키피디아
9세기성상파괴운동 (그림) /위키피디아

 

이레네는 교활하고 이중적인 성격에다 야심과 권력을 매우 탐했던 여인이었다. 또한 비정한 어머니였다.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가 20살이 되어도 이레네는 권력을 넘겨줄 생각을 하지 않았고, 아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790년 이레네에 불만을 품은 세력과 성상파괴주의자들이 콘스탄티누스 주변에 몰렸다. 아들 황제는 성상파괴주의자들과 함께 이레네를 쫓아내려다 발각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러자 아나톨리아 군대들이 콘스탄니누스만이 적법한 황제라며,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해 들어왔다. 콘스탄티누스는 감옥에서 풀려나고, 이젠 이레네가 궁궐에 감금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6세는 무능했다. 남쪽에서 사라센이 쳐들어오고, 북쪽에서 불가르족이 남하하는데도 황제는 적들에게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무리한 양의 공물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결국 아들 황제는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레네는 790년에 복귀했다.

2년간 황궁에 갇혀 있던 이레네는 이를 갈았고, 다시 권력을 쥐자 마자 아들을 몰아내는데 온 힘을 쏟았다. 이레네가 복귀하자 성상파괴자들은 아나톨리아의 군대가 폭등을 일으켜 레오 4세의 동생 니케포루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반역을 음모했다. 이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어 진압되었다.

 

콘스탄티누스도 스스로 자신의 권력기반을 허무는 짓을 했다. 795년 황제는 황후 마리아와 이혼하고, 격에도 맞지 않는 시녀 테오도테와 재혼했다. 본처는 수녀원에 감금되었고, 황제는 사랑하는 테오도테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이에 고지식한 아나톨리아의 수도사들이 반발하며 재혼을 허용할수 없으며 아들은 후계로 인정할수 없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황제는 자신의 든든한 지지기반을 잃은 것이다.

이레네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이 성상파괴주의로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 선수를 쳤다. 7976월 그녀는 봉기를 준비했다. 어느날 콘스탄티누스가 원형경기장에서 궁전으로 돌아갈 때 한 무리의 병사들이 그를 덥쳤다. 그는 간신히 도망쳐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넜다. 그러나 곧 잡혀 황궁으로 끌려왔다. 815일 그는 잔인한 수법에 의해 두눈이 뽑혀 곧바로 죽어 버렸다. 물론 이레네의 소행이었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어머니의 비정한 행위로 콘스탄티노플의 하늘이 17일동안 어두웠다고 한다. 사람들은 신이 노한 것이라 믿었다.

이들을 죽이고 나서 황제 자리가 비자, 이레네는 단독으로 황제가 되어 제국을 통치했다. 그녀는 아들을 죽인 어머니라는 오명에 당연히 인기를 얻을수 없었다. 세금을 대폭 깎아 주어 인기를 만회하려 했지만, 아나톨리아의 군대들은 돈으로 인기를 살수 없다며 여제에 대한 환멸을 감추지 않았다.

 

프랑크 샤를마뉴 대제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 제관을 받고 있다. /위키피디아
프랑크 샤를마뉴 대제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 제관을 받고 있다. /위키피디아

 

아테네의 이레네 /위키피디아
아테네의 이레네 /위키피디아

 

그로부터 3년후 서유럽에서는 대사가 치러졌다. 서기 800년 성탄절, 로마 교황청에서는 교황 레오 3세로가 프랑크 왕 샤를마뉴(독일어로 카를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당시 교황청에는 로마제국의 적법 계승자인 동로마제국에 여제가 들어섰다는 것, 어머니가 아들을 죽였다는 것을 인정할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따라서 교황의 보호자를 서유럽에서 찾을 필요성이 있었다. 서로마 멸망 이후 400년만에 서유럽에서 처음으로 황제에가 탄생한 것이다.

황제가 된 샤를마뉴는 동로마에 여자황제가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다. 저 여자랑 결혼하면, 유럽을 제패하는 대제국을 형성하고, 로마제국을 부활시킬수 있지 않겠나. 이레네도 샤를마뉴에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국내에서 반대세력이 곳곳에서 기운을 뻗치고 있는 마당에 서방의 강력한 제국과 연대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레네는 숱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샤를마냐에겐 충분히 결혼상대가 될만한 과부였다. 게다가 50대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자타가 공인하는 미녀였다. 유럽 역사에서 왕가의 결혼으로 나라가 통합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수 있다.

하지만 둘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우선 동로마(비잔티움)에서 반발이 심했다. 그들에겐 서방의 황제 대관식 자체가 모욕이었다. 아무리 여제가 통치한다 해도, 엄연히 황제국이었다. 하늘에 신이 하나이듯, 땅에는 한사람의 황제가 있을 뿐이다. 게다가 게르만족 촌놈이 어찌 로마제국의 적장자가 될수 있다는 말인가.

80210월 마지막날, 원형경기장에 모인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이레네의 퇴위를 부르짖었고, 고위관리들이 나서서 이레네를 체포했다. 이레네는 저항하지 않고 끌려가 레스보스 섬에 유배되었다가 1년후에 죽었다.

이레네가 죽은후 814년에 다시 성상파괴운동이 전개되어 843까지 이어진다. 이를 2차 성상파괴운동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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