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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상인과 십자가를 내건 약탈자에 역사상 최대의 문명파괴
동로마⑤…4차 십자군의 야만적 약탈과 파괴
2019. 10. 06 by 김현민 기자

 

4차 십자군(1202~1204)은 유럽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례로 꼽힌다. 그들의 목표는 이슬람에 빼앗긴 예루살렘을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기독교도 국가인 동로마(비잔티움)제국을 공격했다. 성스럽지도 않았다. 베네치아 상인들의 탐욕과 프랑스인들의 영토욕이 결합되어 그들은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문명파괴를 저질렀다. 로마제국의 마지막 후예 동로마제국의 혈맥은 서유럽의 무뢰배들에게 57년이나 끊겼다. 150년후에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을 때 비잔티움이 저항력을 상실할 정도로 약화된 것도 이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그림) /위키피디아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그림) /위키피디아

 

1198년 고황에 오른 이노켄티우스 3(Innocentius III)는 제4차 십자군을 제창했다. 교황의 요청에 응한 인물은 샹파뉴의 백작 발라르두앵의 조프루아(Geoffroi de Villehardouin)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영주들이었다. 새로 조직할 십자군의 대표는 샹파뉴의 조프루아가 맡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빼앗으려면 이집트를 공격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그러자면 육로로 가기보다는 해로로 가야 했다. 당시 서유럽에는 그 많은 군대를 수송할 선박을 갖춘 나라는 베네치아 공화국 뿐이었다.

엔리코 단둘로 /위키피디아
엔리코 단둘로 /위키피디아

 

1201년 조프루아가 이끄는 6인의 기사단은 베네치아로 갔다. 베네치아에는 팔순의 노익장 엔리코 단둘로(Enrico Dandolo)가 총독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십자군과 베네치아 사이에 협상이 벌어졌다.

조프루아가 이끄는 십자군 대표단은 45백명의 기사와 말, 9천명의 기사 수행원(종자), 2만명의 보명, 그리고 각종 군수품을 수송해 달라고 제의했다. 그러자 베네치아의 단둘로는 이 인원과 물자를 수송하려면 은 85천 마르크가 소용되니, 그 비용을 대라고 했다. 프랑스인 조프루아는 조건을 수락했다. 단둘로는 정복지의 절반을 베네치아가 갖는다는 부대조건도 달아 50척의 완전무장한 갤리선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대사기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예정된 날에 베네치아에 모인 병력은 십자군측에서 약속한 인원의 3분의1도 못되는 규모였다. 총사령관은 조프루아를 대신해 몽페라의 후작 보니파시가 맡았다. 원정군은 모병과 모금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일단 은 35천 마르크를 지불했다. 그랬더니 베네치아의 단둘로는 약속한대로 배를 준비했으므로, 약정된 금액 모두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단 한척의 배도 출항시킬수 없다고 배짱을 부렸다. 보니파니는 있는 돈 없는 돈 긁어 모아 14천 마르크를 더 만들어 주었다. 베네치아는 그것도 손에 넣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지불하지 않은 3만여 마르크를 더 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베네치아는 대기중인 십자군에 식량도 공급하지 않겠다고 겁을 주었다.

빈털터리가 된 십자군은 오도가도 할수 없는 처지였다. 영악한 장사꾼은 남의 곤경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챙긴다. 베네치아인들의 상술은 그런 것이었다. 단둘로는 이집트로 가기 전에 헝가리에 빼앗긴 아드리아해 건너편 달마티아(현재 크로아티아)의 차라(Zara)를 공격해 수복해준다면 채무를 연기해주겠다고 나왔다.

십자군을 이끌고 있는 보니파니는 백방으로 돈을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은 차라 공격에 나섰다. 1202118일 제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함대 480척을 타고 차라를 공격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도, 이집트도 아닌 기독교 지역인 차라를 공격해 잔인하게 짓밟았다. 살육과 방화, 강간 등 승자의 약탈도 진행되었다.

분노한 교황은 십자군과 베네치아 모두를 파문했다. 성지 탈환에 나섰던 십자군이 파문되었으니, 그들은 이제 못할 짓이 없었다. 한번 사악한 길에 나서면 더 사악한 일도 두렵지 않은 법이다.

그때 또다른 사악한 자가 나타났으니, 동로마제국의 황태자 알렉시우스 4(Alexius IV Angelus)였다. 그는 동로마제국 황제 이사키우스 앙겔루스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는 큰아버지 알렉시우스 3세의 쿠데타로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눈이 뽑혔고, 자신은 감옥에 있다가 탈출해 베네치아로 건너간 것이었다.

망명자 알렉시우스는 찬탈자인 백부를 내쫓고 자신을 비잔티움 제위에 올려준다면, 이집트 정복의 비용을 댈 것이며, 자비로 1만의 병사와 500명의 기사를 성지로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더해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로마 교회 관할권으로 넘기겠다고도 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장사도 없었다. 어차피 파문당한 몸, 십자군 기사들도 이젠 보이는게 돈과 영토밖에 없었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로마에 넘겨주면 교황도 파문을 벗겨내주지 않겠는가.

사기극은 또다른 사기극을 낳는다. 알렉시우스 황자의 대사기극에 베네치아와 십자군이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1203624일 베네치아에 소집된 4차 십자군은 1년만에 콘스탄티노플에 닻을 내렸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위키피디아
1204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위키피디아

 

찬탈자 알렉시우스 3세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방어준비를 하지 못했다. 조선소는 비었고, 남아있는 배라고는 내항에 있는 낡은 배 몇척이었다. 당연히 제해권은 베네치아에게 넘어갔다. 십자군의 주력인 프랑스인들은 육지로 상륙해 콘스탄티노플 육지 성벽을 에워쌌다. 해상과 육상에서 동시 공격이 이뤄졌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난공불락이었다. 이전에 사라센, 아바르, 불가르, 슬라브, 러시아가 숱하게 침공해 왔어도 저 견고한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었다.

베네치아 해군은 금각만(골든혼) 입구에 쳐놓은 쇠사슬을 끊어 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선박들을 겹쳐서 그 위에 공성장비를 올려 놓고 쇠뇌와 돌덩이를 쏘아댔다. 육지의 십자군은 성벽 위로 기어 올라갔다. 공격자들은 한군데만 집중 공격했다. 금각만과 육지 성벽이 만나는 곳이 가장 낮았는데, 이 곳이 공격목표였다. 쇠칼퀴를 성벽에 쏘아 올리고, 거기에 연결된 밧줄을 병사들이 타고 올라갔다. 방어자들은 성벽 위에서 밧줄을 끊어내고, 화살을 쏘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스믈 다섯 개 성루가 모두 베네치아의 수중에 떨어졌다. 동시에 십자군 육군병력이 성내로 들어갔다. 침략자들은 가옥에 불을 지르고 시내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다. 찬탈자 알렉시우스는 도망을 쳤다.

시민들은 황제직을 빼앗기고 실명한채 감옥에 갇혀 있던 이사키우스 잉겔루스(Isaakius II Angelus)를 풀어내 제위에 올렸다. 이사키우스는 이 사건을 만든 아들 알렉시우스 4세를 공동황제로 올려서 문제를 일단 수습했다. 베네치아와 십자군은 금각만 건너편 갈라타 지구로 물러나서 알렉시우스가 약속한 금액을 지불하기를 기다렸다.

권력을 쥔 알렉시우스 4세는 지난해봄에 한 약속을 지킬수 없음을 곧 알게 되었다. 애당초 권력을 쥐기 위해 무리한 약속을 한데다 무능한 전임자가 국고를 바닥냈기 때문에 베네치아와 십자군에 줄 돈이 없었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한 약속은 아버지 황제조차 아연실색하며 아들을 비난하게 했다.

알렉시우스는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엄청난 세금을 매기고 수도의 귀중품들을 지속적으로 수거해 갔다. 당연히 시민들의 반발을 샀고, 일부 과격파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는 베네치아 상인을 보복하고, 베네치아인들이 다시 보복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알렉시우스의 반대파들은 십자군에 대한 빛 상환 약속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부채 상환을 중단했다. 양측은 다시 전쟁이 벌어질 상황으로 치달았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 성내에 진입한 십자군 /위키피디아
1204년 콘스탄티노플 성내에 진입한 십자군 /위키피디아

 

베네치아 총독 단둘로는 돈을 못받을 바에야 비잔티움 제국을 무력으로 정복해 제국의 부를 뜯어내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단둘로에겐 명령만 내리면 움직이는 십자군 병력이 있었다. 그들은 금각만 건너편 갈라타 지역에 기다리며 굶주리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알렉시우스가 물러나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해 있었다. 이런 가운데 알렉시우스 무르주플루스라는 귀족이 반대파를 규합해 알렉시우스 4세를 폐위하고 자신이 알렉시우스 5세로서 제위에 올랐다. 그는 베네치아와 십자군에 대한 채무 불이행을 선언했다.

베네치아와 십자군측은 공격에 앞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에 어떻게 나눠먹을지를 협의했다. 황제는 양측중 한사람이 맡아 제국의 4분의1을 가져가고, 나머지를 베네치아와 십자군측이 반(3/8)씩 나눠먹는다는데 합의가 이뤄졌다.

이제 먹이감을 사냥하는 일만 남았다. 120449일 양측은 총공세에 나섰다. 1년전의 전투와 똑같은 양상이 벌어졌다. 다음날인 410일 비잔티움군은 가교를 통해 탑으로 올라오는 십자군 병사들을 잘 막아냈으나, 한 개의 탑에 프랑스 기사 한명이 올라왔다. 그 기사는 비잔티움군의 무차별 공격을 받아 쓰러졌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났다. 죽은줄 알았던 프랑스군이 살아나자, 탑을 수비하던 비잔티움군이 무서워 모두 도망치면서 탑은 십자군에게 점령되었다. 한 개 첨탑이 무너지자 분위기는 반전되어 십자군이 성내로 들어왔고, 비잔티움군은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베네치아 총독 단둘로는 비잔티움을 함락한 이후 병사들에게 3일간의 약탈을 허용했다. 십자군은 야만인이나 조금도 다를게 없었다. 당대에 세계 최대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은 야만의 파괴와 향연에 물들었다. 아름답고 훌륭한 예술작품들이 무지막지하게 파괴되었다.

한 목격자는 그날의 약탈을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그들은 성상들을 부수고 순교자들의 신성한 유물들을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곳에 집어던지고, 구세주의 살과 피를 여기저기 뿌렸다. …… 소피아 성당의 제단은 파괴되고 그 조각들은 자기들끼리 나눠가졌다. 그들은 말과 노새를 성당 안까지 끌고 들어와 제기, 연단, , 가구들을 닥치는대로 실어 날랐다. 짐을 못이겨 날과 노새 몇 마리가 쓰러지면 그들은 칼로 가차없이 죽어 성당 안에는 온통 짐승들의 피와 악취가 가득했다. …… 고결한 부인이나 정숙한 처녀들, 심지어 신에게 봉헌된 처녀들에게도 전혀 자비가 베풀어지지 않았다.”

 

콘스틴티노플에서 약탈해간 베네치아 산마리코 성당의 네 마리 마상 /위키피디아
콘스틴티노플에서 약탈해간 베네치아 산마리코 성당의 네 마리 마상 /위키피디아

 

서기 340년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로 삼은 이후 콘스탄티노플 역사에 이처럼 치욕적인 순간이 없었다. 150년후 이슬람의 술탄이 함락했을 때에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 와중에 프랑스인들은 광적인 파괴본능을 보였지만, 장사꾼 기질이 몸에 밴 베네치아인들은 냉정을 유지하며 돈이 될만한 보물은 고스란히 보존해 가져갔다. 현재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에 보관된 네 마리 청동 마상은 이 때 가져간 것이다.

질서가 회복된 이후 베네치아와 십자군은 협상을 벌여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황제로 선출했다. 황제는 양측의 합의대로 비잔티움의 4분의1을 차지했다.

황제는 프랑스인에게 넘겨주었지만, 최대수혜자는 베네치아였다. 단둘로는 황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비잔티움의 8분의3을 차지하며 실익을 챙겼다. 베네치아는 크레타, 로도스섬, 그리스의 펠레폰네소스 일대, 흑해 연안을 차지해 본국과 연결한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해 지중해와 흑해의 무역을 독점했다.

 

동로마제국은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공격으로 1261년까지 57년간 역사에서 사라진다. 이 기간을 역사학자들은 라틴 제국(Latin Empire)이라 부른다. 이 기간에 옛 동로마제국의 황실과 귀족들은 소아시아 반도로 건너가 니케아 제국(Empire of Nicaea)을 건설하고, 아드리아해 동부에 에피루스 왕국(Despotate of Epirus), 흑해 남부 해안에 트레비존드 제국(Empire of Trebizond)을 각각 세웠다. 라틴 제국도 내부에 테살로니아 왕국, 아테네 공국, 아케아 공국 등으로 분리되어 이합집산을 하다가 1261년 니케아 제국에 의해 흡수합병되어 다시 동로마제국이 부활하게 된다. 하지만 부활한 동로마 제국은 제국이라 할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곧이어 소아시아에서 발흥한 오스만투르크에 멸망하게 된다.

 

라틴제국 시절의 형세도 /위키피디아
라틴제국 시절의 형세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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