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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국 위기
백인정권 물러난후 서방 자본 유치…투기성 자본 유입으로 수시로 통화위기
만델라의 흑인정권 위협한 투기자본
2019. 10. 10 by 김현민 기자

 

19986월 뉴욕 월가에는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이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관한 나쁜 루머 두어가지가 돌아다녔다.

그 하나는 뱅크오브뉴욕에서 작성된 보고서였다. 보고서의 골자는 남아프리카에 폭동 가능성이 있고, 식량 부족사태가 예견된다는 것이었다. 남아프리카 경제학자들은 이 보고서를 접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월가 외환 딜링룸을 자극했다. 책상 앞에 붙어서 공부만 하는 학생들이 세상물정 모르는 것처럼 하루종일 딜링룸에 근무하는 외환 딜러들은 현지 사정을 잘 모른다. 그들은 보고서 한 장에 의존해, 만델라 정부가 자국 통화 랜드(rand)를 방어하지 못할 것이며, 곧 랜드화가 하락할 것으로 쉽게 판단했다.

여기에다 기름을 얹은 자그마한 사건이 발생했다. 남아프리카 중앙은행이 뉴욕의 한 은행과 오버나이트 론을 연장하는데 실패했다. 은행과 은행 사이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이 사건이 크게 부풀려져 남아프리카 중앙은행의 보유외환이 부족하고, 조만간 랜드화가 하락할 것이라는 분석을 뒷받침했다.

 

한해전(1997) 동남아시아를 공격했던 국제 외환투기자들은 랜드화를 공격했다. 그들은 굳이 남아프리카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컴퓨터와 전화로 일제히 랜드화에 대한 투매에 들어갔다. 6월말 일주일만에 남아프리카 랜드화는 13%나 폭락했다.

만델라 정부는 미국과 영국의 중앙은행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와 영란은행이 즉각 랜드화 시장에 개입했다. 랜드화 폭락이 진정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외환 딜러들은 미국과 영국이 개입한 달러가 남아프리카 중앙은행이 그곳에 개설해 놓은 예금 계좌에서 나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들은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남아프리카 중앙은행은 투기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중앙은행의 단기자본 기준금리를 18.311%를 제시했고, 시중은행들도 우대금리를 2% 포인트 인상한 22.25%로 유지했다.

 

한달 전까지만 해도 투기꾼들이 랜드화를 공격할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동아시아, 러시아, 남미, 뉴질랜드, 호주 통화가 하락하는 와중에서도 랜드화만은 건실하게 버텼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남아프리카 통화가 공격받은데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다. 남아프리카는 아시아 국가에 비해 경제 펀더멘털이 든든했다. 은행들은 보수적으로 경영을 했기 때문에 아시아 은행들처럼 부실 여신으로 고민하지 않았고, 인도네시아처럼 권력형 대출은 거의 없다. 외채 비율도 낮고, 국가 자산도 서서히 민영화되고 있었다. 인플레이션은 5%로 낮은 수준을 유지했고, 중앙은행도 석달치 수입량에 해당하는 외환을 보유하고 있었다. 시중은행의 우대금리도 18%로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외국 자본이 남아프리카를 떠날 이유가 없었다. 예산 적자폭도 낮았고, 외국은행들은 만델라 정부의 경제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아프리카 랜드화는 몇 가지 루머에 의해 일주일만에 투기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중앙은행을 책임지고 있는 크리스 스탈스(Chiris Stals) 총재는 랜드화가 폭락하자 구체적으로 이름을 들지 않았지만, 미국의 헤지펀드들을 강한 톤으로 비난했다.

사실 중앙은행이 실수를 한 것이 하나 있다. 투기꾼들이 몰려오기 훨씬 전에 중앙은행은 단기자금 이자율을 24%까지 인상해 사전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투기꾼들이 몰려오지 않았다. 여기서 중앙은행은 방심을 하고, 이자율을 17%로 낮췄다. 그러자 고금리의 단물을 빨아먹던 일부 단기 자금이 남아프리카를 빠져나갔고, 헤지펀드들이 랜드화를 공격할 틈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25%의 고금리로 영업을 할 기업은 거의 없다. 제조업이 25% 이상의 연간 수익률 내는 것은 웬만해서 어렵다. 중앙은행은 불가불 국내 경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금리를 인하했는데, 결국 헤지펀드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결국 스탈스 총재는 물러나고, 노동부 장관이자, 여당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내 강경파인 티토 엠보웨니(Tito Mboweni)가 중앙은행 총재에 올랐다. 이 소식이 와이어를 타고 국제 시장에 전해지자 외환 딜러들은 랜드화를 또다시 대량 매각했다. 흑인 강성 지도자가 중앙은행을 책임지게 되면 소수 백인 부유층 위주로 보수적으로 운영되던 금융시스템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고, 시장 경제의 후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신임 중앙은행 총재는 국제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키려고 무던히도 해명을 했지만, 국제 외환딜러들은 76일 랜드화 환율을 1달러당 6.76까지 떨어뜨렸다. 하루만에 랜드화는 거의 6%나 폭락했고, 연초 대비 28% 하락했다. 루머에 의해 촉발된 랜드화 하락은 정부가 중앙은행장을 지명했다는 사실로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워싱턴의 IMF 본부가 고민에 빠졌다. 펀더멘털이 좋은 나라를 지원하는 것도 문제고, 그렇다고 수직 하락하는 랜드화를 그냥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꾀를 낸 것이 남아프리카의 경제가 건강하다는 것을 입증할 보고서를 외환 시장에 슬그머니 흘렸다. 외채비율이 낮고, 금융 시스템이 건전하며 잘 관리돼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서 며칠후 로버트 루빈 미국 재무장관이 아프리카 순방차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들러 만델라 정부의 시장 경제원칙을 강력히 뒷받침했다. 이로써 랜드화는 가까스로 진정됐다.

 

2000년 런던정경대(LSE)를 방문한 만델라 /위키피디아
2000년 런던정경대(LSE)를 방문한 만델라 /위키피디아

 

남아프리카는 1994년 만델라의 흑인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까지만 해도 고립주의 경제를 취하고 있었다. 국가 경제가 국제사회에 개방돼 있어야 외환 투기자들이 거래를 하게 되고, 외환위기도 있게 된다. 미국은 아파트헤이드(apartheid)라는 유명한 인종정책을 유지했던 백인 정부에 경제제재를 가했다. 남아프리카는 국제사회와 단절해서 경제를 운영했기 때문에 외환 위기라는 개념을 몰랐다. 백인 정권은 식품, 철강, 화학, 섬유등 기간 산업을 거의 자급자족했고, 심지어 석유수입을 줄이기 위해 석탄에서 가솔린을 생산하는 기술까지 개발했었다.

남아프리카 경제에 시장 경제 원리가 도입되고, 글로벌 경제에 편입된 것은 흑인 정부가 들어서고부터였다. 만델라가 이끄는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선거에서 이긴후 피폐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외국 자본 유치가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오랫동안 백인이 정권을 잡아온 이 나라에 권력이 바뀔 가능성이 높아지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자본이 대거 빠져나가 버렸다.

만델라 정부에겐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의 투자가 절실했다. 백인 정부에 제재를 가하고, 흑인 정부 창출을 배후에서 지원한 것도 미국이었다. 만델라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미국 컨설팅 회사의 자문을 얻어 전현직 재무장관, 상공부장관, 중앙은행 총재등 경제인들을 미국에 대거 보냈다. 이들 사절단은 뉴욕, 보스턴, 워싱턴, 필라델피아, 시카고등 미국의 5개 도시를 다니며 투자를 호소했다.

뉴욕에서는 컬럼비아 대학, 뉴욕대학은 물론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타임스, 포브스, 포천, 비즈니스 위크등 유력 언론의 편집진과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월가 투자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언론인들이 제기하는 거친 질문, 즉 듣기 싫은 질문에도 성심껏 답변했다. 현재의 남아프리카 경제 상황이 무엇인가를 솔직하고 정확하게 대답했고, 나아가 흑인 정부가 들어서 많은 과제가 있지만 경제 개발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약속을 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했다.

뉴욕 월가는 증권시장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세계 각국의 정보가 이곳으로 집약되고, 여기서 걸러진 정보와 투자방향이 세계 자본의 이동을 결정한다. 월가에서 잘못 평가되면 그 나라에 유입된 외국인 자본이 대거 빠져나가 금융공황에 빠지게 되고, 월가의 좋은 평가를 받으면 외국인들이 돈 보따리를 들고 들어온다. 따라서 세계의 각국 정부 지도자들은 늘 월가를 찾아 자국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고, 펀드매니저들의 관심사항을 정확하게 대답하려고 애를 쓴다.

만델라의 사절단은 워싱턴을 방문, 워싱턴 포스트, 시카고에서는 시카고 트리뷴등 유력지 간부들을 만났고, 금융가를 돌았다. 이렇게 빡빡하게 열흘을 보내고 그들은 돌아갔고, 미국의 자본이 서서히 아프리카 남단의 인종차별로 시끄러웠던 나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장 경제는 새로운 문제를 아프리카 남단의 국가에 안겨줬다. 국제 시장의 흐름에 따라, 국제 자본의 이동에 따라 국가 경제 전체가 동요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1996년에도 만델라 대통령이 심장병에 걸렸다는 루머가 국제 금융시장에 돌아 투기꾼들이 랜드화를 공격, 통화 폭락을 겪은 적이 있다.

남아프리카에도 아시아 경제 위기의 여파가 밀려들었다. 세계 최대 금 생산국인 남아프리카는 금값 폭락으로 경제가 침체, 97년 성장률이 2%로 떨어졌다. 기업들은 대량 실업자를 길거리로 밀어냈고, 97년에 13,000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실업율은 33%에 이르렀다.

 

19996월 만델라는 임기를 채우고 물러나고 후임에 타보 엠베키(Thabo Mbeki) 부통령이 선거에 당선,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흑인운동가의 아들로 일찍이 영국으로 건너가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는 혁명 전사로 소련군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공산당과 연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시장 경제 신봉자로서 남아프리카의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고, 외국인 투자자 유치에도 힘쓴 인물이다.

엠베키의 두 어깨에는 남아프리카의 장래가 무겁게 짓눌렀다. 문제는 정치적 혼란이 남아프리카를 어둡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델라의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는 흑인 노동자 연대조직 및 공산당과 연대해, 정권을 운영해왔는데, 흑인 노동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시장주의를 비판했다.

국제 자본은 엠베키 흑인 정권이 혼란을 어떻게 수습할지를 예의주시하며, 틈을 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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