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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1453년 5월 29일, 1123년의 동로마제국, 술탄 메흐메드 2세에 의해 멸망
오스만투르크①…콘스탄티노플 함락하다
2019. 10. 10 by 김현민 기자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Mehmed II)1433년 술탄 무라드 2(Murad II)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하렘의 노예였는데, 아마 그리스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첫째 형은 1439년에 죽었고, 둘째형도 1444년에 잠을 자다가 목이 졸려 죽었다. 덕분에 메흐메드는 술탄 계승자가 되었다.

14512월 아버지 무라드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죽자, 그는 제위를 계승했다. 그때 나이는 19살이었다. 그는 즉위와 동시에 동생을 살해했다. 오스만 초기에 왕자 가운데 한사람이 술탄을 계승하면 제위계승의 분란을 없애기 위해 형제살해의 풍습이 있었다.

메흐메드가 제위에 오르기 2년전인 14491월 콘스탄티누스 11(Constantinus XI)가 동로마제국(비잔티움)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해 동로마제국의 토대를 만든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같다. 476년 고트족에게 제위를 잃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Romulus)가 로마제국의 창시자 로물루스와 이름이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직전(1450년)의 형세도 /위키피디아
콘스탄티노플 함락 직전(1450년)의 형세도 /위키피디아

 

동로마제국의 영토는 이제 수도 콘스탄티노플 밖에 남지 않았다. 소아시아 아나톨리아 반도는 물론 콘스탄티노플을 에워싸고 있는 유럽쪽 트라키아(Thracia) 자역도 이미 오스만 투르크에 넘어가 있었다.

메흐메드 2세 /위키피디아
메흐메드 2세 /위키피디아

 

콘스탄티노플에선 오스만에 어린 술탄이 등극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어려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란 안이한 생각이었다. 메흐메드도 즉위 직후에 비잔티움에 강화를 맺고 전통적 우호관계를 유지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곧바로 무너졌다. 메흐메드는 등극한후 두달이 지난 14514월에 보스포루스 해협 유럽쪽 지역에 큰 성채를 쌓았다. 그 성채는 지금도 위용을 자랑하는 루멜리 히사르(Rumelihisarı) 성이다. 해협 건너편 아시아쪽의 아나돌루 히사르(Anadoluhisarı) 성과 함께 해협에서 가장 좁은 지역을 마주보고 서 있는 성채는 그해 8월말에 준공되었다.

성이 완성되자 새 술탄은 해협을 지나가는 모든 선박들에게 국적을 불문하고 검열을 받으라고 포고령을 내렸다. 당대 지중해의 최대 해상세력이었던 베네치아 선박이 이 포고를 우습게 여겼다. 그해 11월 하순 베네치아 선박이 검열을 무시하고 흑해로 가다가 포격을 받았다. 선박은 침몰되고, 선원들은 살해되었으며, 선장은 꼬챙이에 꿰여 죽었다. 유럽인들은 드디어 어린 술탄이 만만한 인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 때 베네치아 선박을 격침시킨 대포는 한해전에 우르바누스(Urbanus)라는 헝가리 기술자가 개발한 청동제 대포로, 제작자가 바빌론의 성벽도 부술 것이라 말한 최신 무기였다. 그 대포는 길이 9m, 두께 20cm, 구경 15cm, 600kg 포탄을 1.5km 이상 날릴수 있었다고 한다. 이 대포를 옮기는데 60마리의 황소가 앞에서 끌고 200명의 인원이 옆에서 꽉잡고 운반되었다.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이 기독교의 손아귀에 있는 한 오스만 제국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성채만 남은 유럽의 최대도시를 함락하든지, 고사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자면 해군력을 보강해야 했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해, 금각만(골든혼)을 해군으로 포위하고, 육군으로 성벽을 깨고 진입한다는 전술을 구상했다.

즉위 3년째에 들어가는 14531, 술탄은 신하들을 모두 불렀다. 그는 역대 술탄들이 하지 못한 일을 주문했다. 바로 콘스탄티노플 함락이었다.

그는 병력을 준비했다. 정규군 8만명, 비정규군 2만명, 도합 10만의 병력을 모았다. 그리고 오스만의 전 함대를 불러모았다.

두달후인 3월에 어마어마한 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에 닻을 내렸고, 지상병력이 금각만 건너편 갈라타 지역에 집결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투도 /위키피디아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투도 /위키피디아

 

45일 술탄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진을 치고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내용은 뻔하다. 즉시 항복하면 당신과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자비는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콘스탄니누스는 응답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11세 /위키피디아
콘스탄티누스 11세 /위키피디아

 

다음날인 46, 헝가리인이 만든 청동대포가 포문을 열었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황제의 지휘 아래 수도 방어에 들어갔다.

비잔티움측의 병력은 황제 휘하의 병력 5천명, 베네치아와 제노바에서 지원한 외국인 2천명 등을 합쳐 7천명에 악간 모자랐다. 선박은 외국 지원선을 합쳐 26척으로 중과부적이었다. 7천의 병력이 10만의 대군을 맞게 된 것이다.

성벽만 무너지지 않으면, 식량만 충분하다면 버틸수 있다. 콘스탄티노플 성은 4차 십자군에 의해 두 번 함락되기 앞서 1천년 동안 숱한 적들을 방어해 낸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하지만 오스만이 끌고 온 청동대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첫날 공격에 육지쪽 카라시우스문 근처 성벽이 허물어졌다. 비잔티움군은 곧바로 무너진 곳을 보수했다.

해상 방어는 금각만 입구에는 쇠사슬이 쳐져 있는데다 건너편 갈라타 지역에 베네치아 해군이 버티고 있어 오스만군은 성채 남쪽만 포위하고 있었다. 몇척 되지 않았지만 베네치아와 제노바 해군은 오스만 해군을 오도가도 못하게 했다.

만만할 것 같았던 콘스탄티노플은 한줌도 되지 않는 방어군에 의해 굳건히 유지되었다. 보름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메흐메드 2세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선박을 육지로 끌어올리는 모습 /위키피디아
메흐메드 2세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선박을 육지로 끌어올리는 모습 /위키피디아

 

술탄은 무지막지한 계획을 밀어붙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배를 육지로 올려 금각만으로 밀어 넣어 성을 포위한다는 계획이었다. 술탄은 해협에서 오늘날 탁심광장을 지나 금각만에 이르는 도로를 닦았다. 도로 위에 철길을 놓고 거대한 받침대를 제작해 쇠로 된 바퀴를 달았다. 그 위에 무거운 선박을 실었다.

422일 아침 수십마리의 황소들이 이끄는 77척의 선박이 높이 70m의 언덕을 넘어 금각만으로 내려왔다. 콘스탄티노플 시민은 물론 제노바 병력도 모두 깜짝 놀랐다. 믿을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금새 금각만이 육지에서 끌려온 오스만의 선박에 의해 장악되었다.

 

전투 당시 성내의 비잔티움 군대 모습 /위키피디아
전투 당시 성내의 비잔티움 군대 모습 /위키피디아

 

이제 남은 것은 육탄전이었다.

그 무렵 불길한 조짐이 나타났다. 월식이 있었고, 기도를 드리는 중에 성모 성상이 받침에서 떨어졌다. 5월말 밤, 짙은 안개가 깔린 가운데 소피아 성 돔지붕에 붉은 빛이 비치더니 성당 아래에서 꼮대기까지 천천히 훑고 사라졌다. 그 모습은 메흐메드도 보았다. 술탄도 겁에 질렸지만, 점성가가 참된 신앙이 빛나게 되리라는 의미라고 해석해 주었다. 기독교 성지가 이슬람 성자로 바뀐다는 뜻이었다. 술탄도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

성 내에서 황제의 곁에 있던 신하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망명정부를 세우고 제국을 다시 건설하자고 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그 청을 거절했다. 콘스탄티노플은 그의 도시였고, 신민도 그의 백성이었다. 그는 마지막 결전을 준비했다.

 

복원된 콘스탄티노플 육지성벽 /위키피디아
복원된 콘스탄티노플 육지성벽 /위키피디아

 

전투는 한달을 더 끌었다. 526일 술탄은 최후의 결전을 지시했다. 그는 작전회의를 열어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최종 공격 시간은 529일 새벽으로 잡았다.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도 성의 함락을 예견했다. 그는 소피아성당에서 마지막 기도를 가졌다. 전시민이 황제와 함께 기도를 했다.

29일 새벽 한시쯤,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신호를 보냈다. 순식간에 정적이 깨지며 나팔소리, 북소리, 함성와 함께 투르크군이 육지 성벽으로 몰려 왔다. 첫 번째 공격은 비정규군이었다. 방어군은 그들을 막아냈다. 두 번째는 정규군이 들이닥쳤다. 견고한 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로 술탄의 숨겨진 카드 예니체리(yeniçeri)가 돌격했다. 오스만이 점령지에서 기독교인의 어린 남자아이들을 차출해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만든 인간 무기였다. 예니체리는 북과 나팔소리에 발을 맞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했다. 그들은 동료의 시체를 넘어 성벽으로 다가왔다.

예니체리의 공격이 진행되는 시간에 북쪽 성루 한곳에서 투르크의 깃발이 올라갔다. 투르크 비정규군 한명이 성벽에 오르는데 성공해 조그마한 문을 발견했는데, 그곳은 성루로 연결되는 통로였다.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사용된 것과 같은 종류의 오스만 투르크의 대포 /위키피디아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사용된 것과 같은 종류의 오스만 투르크의 대포 /위키피디아

 

성루에서 투르크 깃발이 휘날리자 대세는 급전했다. 여기저기 빈틈으로 투르크군이 성내로 쏟아져 들어갔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육탄전의 한 복판으로 달려가 적들과 싸웠다.

10만의 투르크 병사가 성내로 들어오면서 성은 오스만군이 공격을 개시한지 한달 20여일만에 함락되었다.

이른 아침이었다. 하늘엔 그믐달이 떠 있었다. 성벽에는 죽은 자들이 가득했다. 약탈이 시작되었다. 오스만 육군이 덥친 뒤에 해군이 들이 닥치며 야수처럼 질주했다. 오스만 제국은 승리후 통상 3일간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용하는 게 관례였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나 끝나고 병사들에게 주는 일종의 보상이었다.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아이들은 찔려죽고 성당들은 잿더미가 되었다. 1천여년 동안 보관되어온 고서적들은 찢겨지거나 불탔다.

소피아 성당으로 도망쳐온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성스러운 그곳에서 재앙을 만났다. 정복자들은 아침 예배가 진행되는데도 문을 부수고 들어와 사제는 물론 시민들을 살해했다.

술탄 메흐메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하루만의 약탈을 허용했다. 메흐메드는 오후 늦게 예니체리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소피아성당에 들어갔다. 약탈중이었던 한 병사가 대리석을 뜯고 있었다. 술탄은 그 행동을 중단하라고 명했다.

술탄은 터번을 쓴채 엎드려 알라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 순간부터 소피아 성당은 모스크가 되었다.

메흐메드는 비잔티움 황궁으로 갔다. 11세기 반의 역사를 지닌 황궁은 낡고 황폐했다. 그는 황궁을 둘러보면서 나직히 페르시아 싯구를 읋었다.

카이사르의 궁에는 거미줄만 무성하고, 아프라시아브(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왕)의 탑에는 부엉이만 우는구나

그는 마침내 조상들이 얻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플을 갖게 되었다. 그때 술탄의 나이는 21살이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그림) /위키피디아
콘스탄티노플 함락(그림) /위키피디아

 

동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도망쳤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역사가들은 전사한 것으로 본다. 수많은 비잔티움 군인들의 시체더미와 함께 그도 함께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3305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제국의 수도를 옮긴 이후 1453529일 멸망할 때까지의 기간은 1123년 하고도 18일에 이른다. 그 사이에 라틴제국 시기 빼면 모두 88명의 남녀가 제위에 올랐다.

529일은 그믐이었다. 오늘날 터키 국기에 그려져 있는 달은 초승달이 아니라 그믐달인 것도 이날을 기념한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오늘도 그날의 전투를 기억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로 진입하는 메흐메드 2세 /위키피디아
콘스탄티노플로 진입하는 메흐메드 2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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