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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 위력 확인…베네치아 해군력 우세 입증, 오스만의 지중해 진출 막혀
오스만투르크②…레판토 해전에서 패하다
2019. 10. 11 by 김현민 기자

 

대포로 흥한 나라는 대포로 망한다. 오스만 투르크가 그랬다. 오스만은 1453년 당대 최고기술로 빚은 청동대포로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두드려 깨 함락시켰다. 하지만 1세기를 거치면서 서유럽인들이 오스만의 화력보다 더 강한 대포를 만들었고, 오스만은 그 화포에 패배하게 된다.

1571107일 오스만투르크의 해군은 스페인과 베네치아 해군을 주력으로 한 기독교 신성동맹(Holy League) 군에 의해 괴멸되었다. 그 유명한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이다.

레판토 해전은 지중해 패권을 놓고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력과 유럽의 기독교 세력이 다툰 결정판이었다. 이 전투 이후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력은 지중해를 통해 유럽지역으로 진출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오스만투르크는 1683년 제2차 빈 전투와 함께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레판토 해전(그림) /위키피디아
레판토 해전(그림) /위키피디아

 

이 역사적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은 이탈리아의 해상도시국가 베네치아의 갤리아스(Galleass)라는 전함이었다. 노를 젓는 갤리선을 대형화해 배위에 대포를 설치한 전함이었는데, 갤리아스에서 쏘는 포의 위력이 이슬람 전함들을 무참히 파괴시켰던 것이다.

레판토 위치 /위키피디아
레판토 위치 /위키피디아

 

당시 지중해에서 해상운송업을 주력산업으로 하던 베네치아는 거대한 갤리선을 만들었다. 갤리아스 전선에는 기다란 의자에 앉아 노를 젖는 노잡이들이 32명이 배치되어 배의 엔진 역할을 했고, 배의 중심부에는 거포가 자리잡았으며, 측면엔 좀 더 작은 대포가 진을 쳤다.

베네치아 대포는 조작이 단순하고 기능적이며 표준화되어 있었으며, 그 위력은 치명적이었다. 베네치아는 당시에 유럽에서 가장 공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포를 자체 제작했고, 포탄과 화약도 제조했다. 게다가 여러 세기에 걸친 항해 경험을 가지고 있어, 그동안 전함 운영과 조작에는 오스만 투르크에 앞서 있었다.

 

함선의 수에서는 기독교 군단과 이슬람 군단에서 비슷했다. 신성동맹의 함대는 206척의 갤리선과 6척의 갤리아스선으로 구성되었고, 이슬람 진영에서는 222척의 전투용 갤리선과 56척의 소형 갤리선, 그리고 소형의 함선들이 배치되었다. 기독교 연합군에는 스페인, 베네치아, 제노바, 몰타기사단, 투스카니, 사보이, 스티븐 기사단이 참여했다. 지휘체계는 오히려 기독교 측이 불리했다.

병력에서는 기독교 동맹 함대에는 12,920명의 선원이 전투에 참여했고, 여기에 28,000명에 이르는 병사가 타고 있었다. 오스만 갤리선은 13,000명의 선원에 34,000명의 전투원이 탑승하고 있었다. 숫적으로는 오스만 투르크 쪽이 약간 앞서 있었다.

 

레판토 해전을 승리로 이끈 갤리아스선 /위키피디아
레판토 해전을 승리로 이끈 갤리아스선 /위키피디아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리스 서쪽 파트라스 만 끝에서 벌어진 이날 전투는 기독교 함대의 전열에서 0.5 마일 정도 앞에 배치된 갤리아스 선에서 대포가 불을 뿜으면서 접근하고 있던 이슬람 갤리선이 하나씩 격추되었다. 갤리아스 함선은 다가오는 오스만 갤리선에 포격을 가해 순식간에 70여척을 바다에 가라앉혔다.

5시간이나 양측 전함들이 뒤엉켜 싸운 결과는 오스만 해군의 괴멸이었다.

전투는 오후 4시 쯤에 결판이 났다. 오스만 함대는 약 210척의 함선을 잃었고, 이중에서 117척의 갤리선과 10척의 소형 갤리선이 나포되었다. 기독교측은 20척의 갤리선이 파괴되고 30척이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사상자 수에서 신성 동맹에서 약 7,500명에 달했지만, 오스만측에선 사망자가 25,000명에 달하고, 3,5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레판토해전 전투대형도 /위키피디아
레판토해전 전투대형도 /위키피디아

 

기독교 연합 해군의 우세를 결정지은 것은 함선에 실린 총포였다. 기독교 함선에는 1,815문의 총포가 있었음에 비해 오스만 군에는 750문이 있었고 그나마도 탄약이 불충분한 상태였다. 기독교도들은 훨씬 진보된 화승총병과 머스킷 총병들을 승선시킨 데 비해 오스만군은 복합궁 병사들를 주력으로 했다. 이제 대포의 선진화 여부에 판가름나는 시대로 변해버린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 해전을 BC 31년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이긴 악티움 해전 이후 가장 결정적인 해전으로 여겼다. 유럽인들이 이 전투를 중시하는 것은 지중해로, 육상으로 진출하던 이슬람 세력을 해상에서 봉쇄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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