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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에서 부의 형평성 배우고, 공산주의 폭력성에 혐오감 느껴
리콴유 리더십②…캠브리지서 정치사상 형성
2019. 10. 12 by 이인호 기자

 

리콴유(李光耀)19469월 런던 정경대(LSE)에 입학한다.

그곳에서는 해럴드 라스키(Harold Laski) 교수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 이론강의에 감명을 받고 모든 사람은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하며 정의롭고 질서있는 사회에서는 부()의 격차가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훗날 총리가 된 후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므로 교육과 훈련이 제일 중요하고, 지식과 기술이 부의 원천이 된다고 믿게 된다.

식사, 교통문제 같은 대도시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던 차에 캠브리지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아 19471월 캠브리지로 전학한다.

 

캠브리지 입학 때에 학장이 캠브리지에 들어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특별한 것이다. 육군에 입대하는 것이 아니고 그중 최정예인 근위기병연대(Life Guards)에 가입하는 것과 같다. 게다가 최우수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남들과 다른 무언가(something extra)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리콴유는 1학년부터 최우수학생으로 뽑히게 된다. 다음해 6월에는 약혼녀 콰걱추(柯玉芝)가 여왕 장학생으로 뽑혀 캠브리지에 입학한 후 두 사람은 곧 결혼한다.

 

1949년 옥스퍼드대학과의 모의재판에서 리콴유는 캠브리지 대표가 되고, 졸업 때는 수석명예학생 칭호를 받는다. 약혼녀도 최우수학생으로 선정되어 9학기중 6학기만 마치고 졸업한다.

졸업을 축하하면서 교수 한명은 리콴유 부부에게 아들을 낳게 되면 자기 대학에서 무조건 받아주겠다고 이례적인 호의를 베푼다. 영국대학, 학교에서는 입학시 부모의 자질과 업적을 중시한다.

 

리콴유는 일본군 항복 이후 공백기에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공산당의 만행과 법 절차를 무시한 즉결처분, 그리고 캠브리지 학창시절 공산당의 체코 외무장관 살해, 헝가리 추기경 위협사건 등을 보고 공산주의, 특히 레닌 전략의 잔혹성에 심한 혐오감을 느낀다.

 

영국에 있는 동안 리콴유는 영국이 싱가포르인을 위해 선정을 베풀 수 있는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한다. 그 당시 현지에 있는 영국인들은 식민지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고 본국에서는 취약한 영국화폐 가치유지를 위해 어떻게 하면 말레이시아 고무와 주석 수출로 달러를 더 벌어들이느냐가 주된 관심사였다.

 

리콴유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학생들과 비폭력, 반식민 투쟁을 위해 잦은 모임을 가진다. 1948년 폭력투쟁을 선언한 말레이 공산당과 거리를 두기 위해 리콴유는 비폭력을 주장하면서 식민지 독립에 동정적인 노동당과 유대를 맺고 하원의원 노동당 후보인 대학친구의 선거운동을 도와 지원연설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직과 재정 면에서 공산당 통일전선 활동이 훨씬 우세를 보인다.

 

엄청난 전쟁 후유증 속에도 영국인은 패배주의에 젖어들지 않고 찬란한 승리를 얻고도 오만을 부리지도 않는 영국인 특유의 겸양(under- statement) 속에는 대단한 긍지와 기강이 자리잡고 있다고 리콴유는 생각했다. 영국인 자기들끼리는 물론 외국인에게도 호의와 정중한 모습으로 대하는 것과 운전자들 모두가 서로 양보하고 감사의 손짓을 하는 문명사회모습에 감탄하기도 한다.

 

케임브리지대 유학시절의 리콴유와 약혼녀 콰걱추 /National Archives of Singapore
케임브리지대 유학시절의 리콴유와 약혼녀 콰걱추 /National Archives of Singapore

 

캠브리지에서는 최전선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대학으로 돌아온 학생(다수가 부상)들이 캠브리지대학의 전통을 재건하는데 자신이 곁에서 지켜볼수 있었던 것을 행운이고 특권이었다고 리콴유는 회고한다.

2차대전직후 국민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돌본다는 애틀리(Attlee) 총리의 복지정책은 대전 후 영국 경제력이 감당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것이었지만 격렬한 반대시위를 벌이지 않고 국회와 선거구에서 토론을 통해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원숙한 의회민주주의와 형평, 합리주의 정신에 리콴유는 큰 감명을 받는다.

의사들은 불만이 있어도 명예의식과 전통, 그리고 법질서 존중 습성 때문에 파업을 삼가는 문화인 모습에 매료되기도 한다.

주택식품비 보조, 무료 의료비 혜택, 안경·의약품 무료제공과 같은 복지정책의 혜택을 입었음에도, 리콴유는 과도한 복지정책은 개인들이 혜택을 받는데 큰 관심을 가지게 하므로 발전의 원동력인 개인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리콴유는 평등정의형평사회 달성을 위해 점진주의를 주장하는 페이비언적 접근(Fabian approach)에 한동안 매료되었으나 교육 평준화를 위해 최선의 교사가 최우수학생을 가르치는 현실을 타파하고 최선의 교사는 제일 취약한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는 1970년대 페이비언(Fabian) 주장에 실망하고 결별한다.

 

리콴유는 영국에서는 권력과 부의 이양이 헌정전통과 관용정신 때문에 아무탈 없이 평화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전혀 다른모습(후진성과 불안한 장래)을 비교해보면서 고도로 정치화된 의식과 반식민 신념을 간직하고 영국을 떠나 귀국한다.

 

리콴유 부부의 성공적 캠브리지 유학소식이 싱가포르 언론에 보도된 덕분에 리콴유 부부는 영국인 법률회사에 곧 취직하게 되고, 19509월 그들은 양가 동의를 얻어 정식으로 결혼(영국에서는 비밀결혼)한다.

그당시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유학파들은 리콴유 조부처럼 영국적인 것은 모두 완벽의 극치라고 경외감을 느끼고 자신이나 동족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그들은 굴종 속에 자라나영국에 대항하기는커녕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

그때 말레이 공산당은 무력투쟁(백인농장주 등 살해)을 벌였는데, 그당시 중국 공산화와 한반도에서의 중국 인민해방군의 성공으로 중국위상이 크게 높아져 싱가포르 내 중국계 다수를 공산주의로 전향시킬 수 있었고, 영국 유학파도 포섭할 수 있었다. 리콴유는 자기가 동지들과 적절한 정치적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공산당이 궁극적 승자가 될 것으로 믿었다.

이 무렵 중국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싱가폴 거상의 장례식을 중국에서 주선하는 등 싱가포르 친공산세력을 지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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