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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세계 5위 경제대국…페론주의, 군부독재, 신자유주 거치며 100년만에 경제 추락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여전히 남미 파리인가…강낙규의 아르헨티나 여행③
2019. 10. 20 by 강낙규 전 기술보증기금 전무

 

지난 616일 아르헨티나 전역에 대정전이 발생했다.

812일 대선예비선거후에는 아르헨티나 증시가 대폭락을 하고 아홉 번째 디폴트(채무불이행)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한다.

온화한 기후와 세계 3대 곡창지대의 기름진 땅, 원유, 천연가스, 석탄, 우라늄 등 풍부한 자원의 천혜의 땅으로 한때 세계 5위의 경제부국 아르헨티나가 왜 100년 만에 추락한 것일까?

 

<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여전히 남미의 파리인가? >

 

아르헨티나 근세 140년의 정치, 경제의 격동기를 시기별로 살펴본다.

 

남영주 사진작가
남영주 사진작가

 

(1) 황금기 (1880~1929)

아르헨티나는 농업과 목축업을 주력으로 곡물과 육류의 수출로 국부를 축적한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의 대규모투자 그리고 1차 대전 후 고통과 굶주림의 유럽에서 아르헨티나 드림을 품고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로부터 200만 명이 이민을 온다. 1880년부터 1905년 사이 연평균 8%의 성장을 이루고 국내총생산(GDP)7.5배나 증가하고 인구는 5, 경제는 15배로 확대된다. 1890년부터 1930년 사이 1인당 국민소득은 영국과 프랑스, 캐나다 수준에 이른다. 경제규모가 세계 5위의 황금기를 맞이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로 불린다.

 

(2) 암흑의 10(Decada Infame) (1930~1940)

1916년 아르헨티나는 최초로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이리고옌(Ypolito Yrigoyen)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민주주의로 한발 나아간다. 1930년 석유국유화법 가결과정에 우리부루(Uriburu)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부정선거를 통하여 후스토(Agustin Justo), 오르티스(Ortiz), 카스티요(Castillo) 등이 군부독재를 펼친다. 보수파와 대중, 노동자의 충돌로 정치혼란이 가중되어 불명예스러운 10년이란 비판을 받는다.

 

후안 페론과 에비타 부부 (1947년) /위키피디아
후안 페론과 에비타 부부 (1947년) /위키피디아

 

(3) 페론 집권기 (1946~1955, 1973~1975)

후안 도밍고 페론은 사회정의와 자립경제의 슬로건을 내걸고 중앙집권화 된 정부, 외세배격, 시장경제와 계획경제가 아닌 제3의 경제발전추구,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통합을 추구하였다. 저소득층 임금을 20% 인상하여 내수 진작과 미약한 국내 제조업의 발전을 추진하였으며, 재정지출확대로 복지를 증대 시켰다. 외국산업을 배격하면서 철도와 전화의 국유화 추진과 부패청산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수출용 곡물을 독점적으로 구매하는 IAPI회사를 설립하였는데 1946년과 1947년 세계 식량수요의 증가와 가격상승으로 농축산물 수출의 증가에 따른 외화획득으로 모든 외채를 청산하자 취임 이듬해인 19477월 경제독립을 선언한다. 이로써 사회개혁과 공동사업 투자의 재정을 마련하여 4,000개의 병원과 8,000개의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46~1948년 동안 25%의 성장을 이룬다.

하지만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페론을 파시스트로 간주하고 유럽에 아르헨티나의 곡물 수입금지 압력을 가하여, 1949부터 1952년 동안 무역적자와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하지만 1952년 에바 페론을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대선에 출마하여 연임에 성공한다. 1952년 에바가 사망한 후 개혁에 대한 저항과 1955년 이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법안추진 등으로 카톨릭교회의 반대와 군부의 쿠데타로 망명을 한다.

19731018년 만에 재집권하지만 1973년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제위기는 정치혼란으로 이어진다. 이듬해 1974년 페론은 사망하고 부인이자 부통령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력직위를 승계한다.

 

페론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페론을 현대 포퓰리즘의 원조로 보며 페론주의가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친 원인이라 주장한다. 매년 20%에 달하는 높은 임금 인상과 과도한 복지정책이 아르헨티나 경제를 파탄시켰다는 것이다.

다른 시각은 아르헨티나 경제의 파탄의 실질적 원인은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가 도입한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무분별한 외자유치와 천문학적인 외채,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파탄 났다는 것이다. 오히려 페론집권 시 빈부격차를 해소하면서 빈민율이 4%까지 격감했으며 (2001년 아르헨티나의 빈민율은 74%까지 급증) 1949년부터 1976년 동안 GDP 127%, 국민소득 232%로 성장하였으며,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부의 재분배로 60%의 중산층을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4) 더러운 전쟁 (1976~1983)

이사벨 페론정부의 실정을 빌미로 19763월 호르헤 비델라(Jorge Videla)는 쿠데타를 단행하고 대통령에 취임한다. 워싱턴 컨퍼런스 즉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노동법을 개정하여 노조를 탄압하고, 최저임금을 폐지하여 임금이 대폭 하락한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으로 자본 및 수입자유화를 펼쳤으며, 수입대체산업 전략이 폐기되고 관세를 대폭 인하한다. 외국차관 도입규제가 완화되어 197578억 달러의 외채가 1983년에는 450억 달러로 급증하게 된다. 국영기업을 미국을 비롯하여 외국계 기업에 매각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19754%였던 빈민율이 2년 만에 38%로 폭등한다. 이후 후임자 레오폴드 갈티에르가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켜 전쟁에 패배하자 아르헨티나 경제는 결정타를 맞는다.

비델라 대통령은 취임하자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을 벌인다. 국가에 의한 테러, 납치, 고문, 실종, 정보조작을 하고 전국에 300여개의 죽음의 수용소를 설치, 운영하여 학생과 기자, 페론주의자, 사회주의 추종자가 9천명에서 3만 명이 실종되거나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모든 반란분자들을 죽일 것이며, 다음으로 그들의 협조자들을 죽일 것이다. 그 다음은 그들에게 동정하는 자 들이며, 그 다음은 무관심한 이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저하는 모든 사람을 죽일 것이다.” <장군> (Latin America Political Report. April 29. 1977)

비델라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89세에 마르코스파스 교도소에서 사망한다.

 

(5) 페론주의자 메넴의 신자유주의 실험 (1983~1999)

1983년 라울 알폰신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새 통화 아우스트랄화를 도입하여 일시적으로 경제안정화를 이룬다. 하지만 군사정부의 막대한 외채로 통화신뢰도가 하락하여 물가상승률이 10~20%에서 1989년에는 5,000%로 치솟는다. 결국 대통령 직을 6개월 일찍 사임하고 페론당 카를로스 메넴이 취임한다. 페론당원임에도 불구하고 IMF의 권고에 따라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펼친다. 19921211만 아우스트랄화를 1페소 액면 가액으로 평가절하 한다. 또한 미국달러화와 페소화 환율을 11로 고정시키고 달러화와 교환이 가능한 태환성을 보장한다. 이로써 물가상승률과 페소화는 안정시키며 메넴의 기적이라 찬양받는다. 하지만 달러가 급속히 유출되고 통화의 평가절상과 무역경쟁국인 브라질의 헤알화 가치하락으로 아르헨티나 산업은 경쟁력을 상실하여 1992년 상품수지가 적자로 반전되고, 1991년부터 2001년까지 경상수지가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고 실업률은 급격히 상승한다.

통신, 전기, 가스, 수도, 철도, 방송, 석유, 전화 등 국영기업과 공기업을 민영화하여 400억 달러를 유치하였으나, 공공요금상승으로 서민생활은 악화되었으며 긴축정책으로 경제는 파국을 맞아 2000IMF14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된다.

 

(6) 페론당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부부 대통령 (1999~2014)

1999년 페르난도 루아 대통령 취임 후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IMF 요구에 따라 재정적자 축소를 위한 9번의 긴축조치를 발표하여 노동자와 연금생활자의 희생은 증가한다. 2001년 전체 수신고의 23%에 해당하는 200억 달러의 예금이 인출되자, 1년 동안 모든 은행의 계좌를 동결하는 코랄리토(Corralito 펜스)’조치를 한다. 주력 수출품인 농산물가격의 폭락과 실업률이 20%를 상회하고 국가 부채가 증가하여 국가부도가 예상되자 인출규모를 제한한다.

이에 냄비와 프라이팬을 두드리는 수 만명의 국민들이 모두 떠나라!”(Que se vayan todos!)며 무능한 정부와 IMF를 비난한다. 대규모 시위로 22명의 사망자와 수백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자 2년 만에 루아대통령은 사임하고, 20011223일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 임시대통령이 취임하여 1,320억 달러의 대외 부채상환의 일시중단(Moratorium)을 선언하고 사임한다.

이후 2003525일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당선되어 IMF의 긴축요구에 반대하고 세금인하와 건설경기 진작, 공공요금 인상 억제, 투자유도, 최저임금 대폭인상 등으로 경기를 부양한다. 동시에 페소화의 평가절하와 중국의 대두 소비증가와 대두 국제가격의 상승에 힘입어 수출을 확대한다. 국내산업보호를 위한 수입억제와 수입대체산업을 활성화하여 고용을 창출하여, 재임기간 중 연평균 8.8%의 경제성장과 매년 평균 117억 달러의 무역수지흑자를 기록하여 200613IMF차관 95억 달러를 전액 조기 상환한다.

2007년 부인인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재선까지 한다. 재임 중 공무원을 230만 명에서 390만 명으로 70% 증원했으며, 연금대상자를 360만 명에서 800만 명으로 확대하여 전인구의 5분의 1이 연금수령자가 된다. 집세보조금과 실업급여의 상향조정, 은퇴 시 무상 의약품의 제공 등 재정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정책으로 결국 20147월 채무불이행(디폴트)을 맞이하여 2015년 마크리 현대통령에게 정권을 내준다.

 

(7) 마크리 현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재도입 (2015~)

보카주니어스 구단주로 인기를 얻어 2007년 공화제안당(PRO)을 결성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시장에 당선되고 재임까지 하게 된다. 시장시절 대중교통을 개혁하고 시청 계약직 공무원을 대거 해고한다. 이어서 2015년 대선에서 선거연합 캄비에모스(Cambiemos 변화)를 결성하여 대통령에 당선된다. 철저한 시장주의자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한다. 외환규제철폐, 외자유치, 공공부문개혁의 일환으로 연방공무원 2만명 감축, 정리해고, 전기·가스등 에너지 보조금축소와 공공요금 인상을 하였으나 소비는 급속히 감소하고 경제성장률은 예상 밖으로 하락하게 된다. 지난 811일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페론당 후보에게 패배하자 1027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위해 최저임금인상, 중소기업대출확대, 학자금 지급, 저소득층 보조금지급, 90일간 휘발유가격 동결, 공무원과 군인 보너스 지급 등을 발표했으나 오히려 지지율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현 대통령 /위키피디아
마우리시오 마크리 현 대통령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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