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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이야기
메소포타미아 문명, 물 관리로 번성…과도한 관개에 따른 토지 염분화로 쇠락
[물과 문명] 에덴 동산은 평화롭지 않았다
2019. 04. 02 by 아틀라스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 동산(The Garden of Eden)은 신화적 장소다. 대다수 학자들은 그 곳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만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라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야훼 하느님이 사람을 만든후 에덴 동산을 마련해 그곳에 살게 했다. 하느님께서는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그 땅에 돋아나게 하셨다. 또 그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돋아나게 하셨다. 하느님은 에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다. 이에 이브는 간교한 뱀의 유혹을 받아 금단(禁斷)의 열매를 입에 넣고 말았다.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벌을 내려 에덴 동산에서 추방시켰다.

 

독일 작가 Lucas Cranach der Ältere가 16세기에 그린 에덴 동산 /위키피디아
독일 작가 Lucas Cranach der Ältere가 16세기에 그린 에덴 동산 /위키피디아

 

에덴동산으로 추정되는 메소포타미아는 젖과 꿀이 흐르는 곳만은 아니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합쳐지는 하류에는 홍수가 날 때 강물이 종종 방향을 바꾼다.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그리스어로 강 사이의 땅이라는 의미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비옥한 초승달지역을 말한다.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은 나일강과 달리 범람과 후퇴가 예측하기 힘들다. 게다가 농업 주기와 강물의 변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파종과 경작을 하는 가을에는 물이 가장 필요한데, 이때 수위가 가장 낮다. 작물이 거의 다 자란 늦 봄에는 천둥과 번개와 함께 강한 비가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농작물의 피해가 커지는 위험이 있었다. 홍수가 날 때 강물의 길이 갑자기 만들어 지기 때문에 기존 경지와 공동체에 물 공급이 끊기는 문제가 발생했다. 에덴의 땅은 결코 맛 나는 열매와 곡식이 무성한 곳만은 아니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위키피디아
메소포타미아 문명 /위키피디아

 

메소포타미아의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 여건은 나일강에 비해 가변적이고 불확실했고, 따라서 취약했다. 상류의 침략자들에게 늘상 노출되어 있었고, 강을 따라 형성된 도시들 간에 갈등과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브를 유혹한 사악한 뱀들이 늘상 도사리는 곳이었다. ‘노아의 방주신화처럼 큰 물이 질 때엔 문명을 파괴할 위험도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하부지역은 강수량이 너무 적어 비에 의존해 농사를 짓기 불가능한 곳이다. 하지만 관개시설을 만들어 풍부한 강물을 이용하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이 지역은 BC 6000년에 대규모 관개농업이 실시되고, 그를 토대로 한 도시가 생겨났다. 가장 오래된 수메르(Sumer) 문명은 관개사업을 통해 곡물과 견과류, 대추야자등 과실을 풍부하게 생산했고, 그 지역을 낙원으로 만들었다. 구약성서의 작가들이 이런 모습을 그려 넣었던 것 같다.

BC 3400년에 건설된 우루크(Uruk)는 페르시아만 입구의 늪지에 건설되었고, 구약성서에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Ur)로 추정된다. 우루크는 성벽 안의 도심이 5를 넘어 당시 세계 최대도시였다. 이 곳에는 방어용 해자, 운하, 항구가 있었고, 중심지엔 높이 치솟은 지구라트(ziggurat) 사원이 있었으며, 인구는 2~3만 정도였다.

강이 형성한 수로는 대중교통수단으로서 역할을 했고, 고대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은 구리와 주석을 합금해 청동기 문화를 형성했다. 수메르의 선박들은 홍해를 통해 이집트와 교역하고 인도양을 거쳐 인더스 문화와도 교역했다.

두 강은 운하를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관개용으로 만든 운하는 보트가 다닐 정도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수메르의 지구라트 /위키피디아
수메르의 지구라트 /위키피디아

 

그러면 이 찬란한 문화는 왜 멸망했을까.

그 첫 번째는 과도한 관개사업으로 땅에 염분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분석이다.

배수가 잘 되지 않는 땅에 소금이 누적되면서 지력을 상실했고, 이에 따라 농토가 사라지고 그 토양에서 살아가는 인구도 감소했다는 것이다. BC 18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한 석판에 검은 땅이 하얗게 변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염분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수메르인들은 밀보다 염분에 잘 견디는 보리를 재배했다. BC 3500년에는 밀과 보리를 거의 같은 비율로 재배했지만, 천년 뒤에 밀은 15%정도에 불과했고, BC 1700년에는 밀이 자취를 감추었다. 두 작물의 생산성이 그 사이에 65%나 감소했다.

토지 염분화의 원인은 관개사업이다. 지나친 관개사업으로 지하수 수위가 높아지고, 동시에 모세관 현상으로 염분기가 땅에 스며들어 작물의 뿌리에 달라붙게 된다. 메마른 지역에 수분 증발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토지 사막화와 염분화가 동시에 진행되었던 것이다.

둘째는 숲의 남벌이다. 도시가 형성되면서 인간들은 연료, 주택, 선박, 도구를 나무에서 구했다. 농지를 확보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 냈다. 고대에 무성했던 메소포타미아의 숲이 사라져 갔다. 숲이 없어지면서 강수량도 줄고 토양의 수분도 줄어들었다. 급류가 휘몰아치면서 비옥한 토자기 쓸려가 버렸다.

물이 부족해지면서 도시국가간에 전쟁이 벌어진다. BC 2500~2350년 사이에 움마와 라가시라는 두 도시가 세계 최초로 물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상류에 위치한 움마가 시작해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에 있던 운하를 파괴해버렸다. 이 전쟁을 기록한 비석에 따르면 하류의 라가시가 티그리스강에 관개수로를 건설해 물을 확보하면서 상류 움마의 도전을 극복하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물의 전쟁은 상류의 지배자에게 유리했다. 하류의 농지는 불모지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비가 많고 물을 먼저 취득할 수 있는 상류의 지배자들이 하류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상류의 아카드와 사르곤의 왕조가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BC 19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 300년 동안 메마르고 추운 시기가 지속되었다. 토양층에는 지렁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대 수메르 문명은 이 시기에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건조기가 끝나 다시 비가 오면서 바빌로니아라는 강대한 제국이 건설된다. BC 1766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Hammurabi) 왕은 물을 정치적 수단과 군사 무기로 사용했다. 그는 티그리스강 하류에 위치한 에슈눈나를 진압하기 위해 상류에 댐을 건설한 다음 터트려 다량의 물을 흘려보내 격류가 덮치도록 했다. 그는 니푸르, 우르, 라르샤와 같은 저항 도시를 진압하는데도 유프라테스 강을 막아 제압했다.

함무라비는 인류 최초로 명문화된 법전을 만들었는데, 이 법전의 282개 조항은 2m 높이의 석비에 새겨 넣어 신전에 세워 놓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간결한 내용이 들어 있는 함무라비 법전은 물의 관리에 관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관개 댐의 운용에 관한 개인들의 책임문제, 위반자에 대한 처벌등이 규정되어 있는데, 바빌로나이에서 물의 관리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음을 보여준다.

BC 1500년경에 카프카즈 산맥에서 제철기술이 발전되었다. 이 기술은 메소포타미아에도 전해져 아시리아가 이 기술을 습득해 바빌로니아를 패망시켰다.

아시리아는 철제도구를 사용함과 동시에 물관리에 철저했다. 그들은 역사상 가장 탁월한 물관리 민족으로 꼽힌다. 아시리아인들은 많은 댐을 지었고, 대도시 가정에 용수를 공급하고, 관개를 통해 농사를 지었다.

아시리아인들은 카나트(Qanat)라는 수로를 개발해 지하수를 끌어들이는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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