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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제국의 국고 텅 비고, 각지에서 반란과 독립운동 전개…멸망의 길 촉진
오스만투르크⑧…이기고도 진 크림전쟁
2019. 10. 22 by 김현민 기자

 

명분이 뚜렷하지 않은 전쟁이었다. 강대국 지도자들의 자존심 싸움으로 수십만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영문도 모른채 죽어 나갔다. 총에 맞고 포탄에 다친 것보다 전염병으로 죽은 군인이 더 많았다. 열강 사이에 세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이 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추악하고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185310월부터 18562월까지 발칸반도와 흑해 크림반도에서 벌어진 크림 전쟁(Crimean War)은 아직도 역사학자들의 연구대상이다. 피할수 있는 전쟁이었다.

 

전쟁은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에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에 오르면서 위대한 프랑스를 구현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그는 프랑스가 카톨릭의 맹주이자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황제로서 국내의 카톨릭 인구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는 성지 예루살렘에 카톨릭의 특권을 달라고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에게 요구했다. 당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하고 있었다. 앞서 1774년에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패해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Treaty of Küçük Kaynarca)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지보호권을 러시아에게 넘겨준 상태였다. 조약의 내용에 애매함이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우물쭈물하는 오스만의 술탄 압뒬메지트 1(Abdulmejid I)에게 군대를 동원하겠다고 협박했다. 쇠락하던 오스만 제국은 마지못해 프랑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가 프랑스의 주장에 반대했다. 그리스정교의 수장임을 자부하는 러시아 차르는 이미 체결한 조약을 거론하며 예루살렘 성지의 관리권을 주장했다. 이에 술탄은 프랑스에 대한 약속을 파기하고 러시아의 손을 들어줬다. 술탄의 입장에서는 이쪽에 붙자니 저쪽이 화를 내고, 저쪽을 붙자니 이쪽이 신경 쓰이는 상황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보스포루스의 병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강대국의 요구에 갈팡질팡 했다.

카톨릭과 그리스정교는 한뿌리에서 나왔지만, 15백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갈라지고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었다. 카톨릭의 대표국가임을 내세우는 프랑스와 그리스정교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러시아가 종교문제로 대치한 것이다.

종교와 인종 문제가 끼어들면 전쟁은 광기를 띠게 된다. 피도 눈물도 없어진다. 종교인들이 나서서 화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와 니콜라이 1세는 조금도 양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결국 두 강대국에 끼여 오스만 제국만 험한 꼴을 보게 될 판이었다.

 

크림 전쟁 전투도 /위키피디아
크림 전쟁 전투도 /위키피디아

 

여기에 영국이 끼어들었다. 당대 유럽의 최강자를 다투던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해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두 나라는 오스만 제국에 지원을 약속했다. 이탈리아 통일을 추진하던 사르데냐 왕국도 가담했다. 술탄 압뒬메지트 1세의 입장에서는 지난 100년동안 지기만 했던 러시아를 복수하고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할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되었다.

프랑스가 무력시위에 나섰다. 나폴레옹 3세는 전함을 흑해에 파견해 러시아 차르에 압력을 넣었다. 이에 18537월 러시아군은 지금 루마니아 영토인 몰다비아·왈라키아를 침공해 오스만 투르크를 북쪽에서 위협하며 응수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누가 먼저 선전포고를 하는지의 형식만 남았을 뿐이다.

크림 전쟁은 오스만 투르크가 먼저 걸었다. 1853104일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압둘메지드 1세가 러시아 니콜라스 1세에 선전포고를 했다. 오스만은 당시 중동과 동유럽, 아프리카 북부에서 영토를 빼앗기며 쇠약해 지고, 러시아의 힘이 강해지던 시절이었다. 오스만의 술탄은 영국과 프랑스가 뒷배를 보아준다는데 용기를 얻었다.

전쟁은 처음에 오스만 투르크와 러시아 두 나라 사이에 전개되었지만, 곧이어 프랑스와 영국에 투르크 편에 서고, 사르데냐 왕국이 가담하면서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전투는 흑해 일대와 동유럽의 다뉴브강 일대, 카프카즈 산맥에서 벌어졌다. 전투의 주요 무대는 크림반도였다.

흑해의 크림 반도는 예나 지금이나 화약고다. 160년전에도 지금처럼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확보하려는 이유는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북쪽 발트해와 동쪽 블라디보스톡에 항구를 두고 있지만, 겨울에는 얼어버린다. 러시아로선 겨울에도 배가 드나드는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흑해 연안에 영토를 확보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개별적 전투에 관해 수많은 저작물들이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크림 전쟁의 전투 모습(그림) /위키피디아
크림 전쟁의 전투 모습(그림) /위키피디아

 

이 전쟁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현대 기술이 총동원된 전쟁이었다. 포탄과 철도, 전보가 오갔다. 또 종군기자가 전쟁에 참여해 전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국민들에게 전해주는 첫 전쟁이었으며, 카메라로 담은 전투 장면이 처음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크림 전쟁이 역사적으로 조명받는 이유는 엄청난 사상자를 낸 전쟁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참전 인원만 150만명에 이른다. 투르크등 연합군이 60, 러시아군이 90만명 참전했다. 사망도 많았다. 사망자가 오스만 투르크 45,000, 프랑스 10만명, 영국군 2만명이었고, 러시아 사망자는 무려 14만명에 이르렀다.

물론 최신 무기가 등장했기 때문에 사망자가 큰 탓도 있지만, 전투에서 죽은 사람보다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러시아의 경우 전투를 벌이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무려 37만명이나 되었다. 전염병이 그 원인이다.

크림 전쟁은 전쟁의 비참함과 잔혹함보다 전쟁에서 병참, 의료, 지휘관의 실패 등에 대한 이슈가 더 큰 문제로 부상했다.

 

이 전쟁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나라는 패전국 러시아였다. 니콜라이 1세는 전쟁 중인 18552월에 사망하고, 알렉산드르 2세는 그 뒤를 이어 18563월 파리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그후 러시아에서는 패전을 계기로 근대화 운동이 일어나, 1861년의 농노해방을 비롯하여 일련의 개혁사업이 추진되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승전국이었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으로 영토를 보전한 것 이외에 얻은게 별로 없다. 오히려 전쟁에 쏟아부은 엄청난 비용과 물자로 경제가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국고도 텅 비었다. 전쟁 공채는 살 사람이 없어 휴지조각이 되었다. 물가는 치솟았고 굶주린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왔다. 폭동과 약탈, 방화 등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발칸 반도에서 종족들이 제각기 독립을 요구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오스만 투르크는 서서히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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