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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에 독일 편에 섰다가 패전…종족주의에 빠져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오스만투르크⑨…청년투르크당의 오판
2019. 10. 23 by 김현민 기자

 

이스마일 엔베르(Ismail Enver Pasha) 27, 메흐메트 탈라트(Mehmed Talaat Pasha) 34, 아흐메트 제말(Ahmed Djemal Pasha) 36.

1908513일 테살로니카에 주둔하던 군대를 이스탄불로 끌고와 쿠데타을 일으켰을 때, 주역 세 사람의 나이다. 이들은 헌법을 부활하지 않으며, 왕조가 위험에 처해질 것이라며 술탄 압둘하미드 2(Abdul Hamid II)를 겁박했다. 술탄은 겁이 났다. 73일 술탄은 자신이 폐기한 헌법을 부활해 입헌군주국으로 체제를 바꾸었다.

 

왼쪽에서 이스마일 엔베르, 메흐메트 탈라트, 아흐메트 제말 /위키피디아
왼쪽에서 이스마일 엔베르, 메흐메트 탈라트, 아흐메트 제말 /위키피디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말기에 등장한 청년 투르크당(Young Turk)은 왕조의 전제정치를 반대하고 유럽식 민주주의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며 지하에서 만든 결사체였다. 그들은 나라의 통일과 공화제를 내건 이탈리아 청년당(Young Italy)을 모방해 당명을 지었다. 이스탄불의 군의학교 학생이었던 이브라힘 테모(Ibrahim Temo)가 주도한 이 비밀단체는 1889년에 조직되어 대학생, 젊은 군인, 문학인 등이 참여했다.

그들의 목표는 1876년에 제정된 헌법을 부활하는 것이었다. 이 헌법은 혁신적 정치가였던 미드하트 파샤(Midhat Pasha)가 쿠데타를 일으켜 술탄 압둘라지즈를 퇴위시키고 신임 술탄 압둘하미드 2세에게서 동의를 얻어 만들어진 헌법이다. 이 헌법은 의회 구성, 3권 분립 등 유럽식 민주주의를 제도화했는데, 한 가지 결점이 있었다. 술탄에게 비상계엄령을 선포할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압둘하미드 2세는 영악한 군주였다. 보스니아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자, 술탄은 전쟁을 핑계로 18782월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미드하트 헌법은 12개월만에 폐기되고 말았다.

 

술탄은 청년투르크당을 탄압했다. 주모자는 처형되고 당원들은 체포되었다. 일부는 카이로·나폴리·런던·파리 등지로 망명해 해외에서 활동했다.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오스만의 군대는 패전에 패전을 거듭해 수도 이스탄불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러시아는 대슬라브주의를 표방하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 슬라브족 국가의 독립을 지원했다.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오스만 제3군이 주둔하는 테살로니카(현재 그리스 북부)에서 1906년 청년투르크당원들이 오스만 자유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조직은 군 장교였던 이스마엘 엔베르, 메흐메트 탈라트, 아흐메트 제말 등 세 사람이 주도했고, 1923년 터키공화국을 수립한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도 참여했다.

쿠데타의 발단은 마케도니아 문제였다. 러시아는 마케도니아를 오스만 제국에서 뺏아 슬라브 국가를 만들려 했다. 힘 없는 술탄은 우왕좌왕했다. 그러자 세 장교가 마침내 거병했다.

 

1908년 청년투르크 혁명 성공을 기념한 그림. 혁명 주역인 엔베르(맨 오른쪽)가 망치를 들고 있는 갇혀 있는 상자를 깨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자유(여인)이 해방된 것을 그렸다.
1908년 청년투르크 혁명 성공을 기념한 그림. 혁명 주역인 엔베르(맨 오른쪽)가 망치를 들고 있는 갇혀 있는 상자를 깨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자유(여인)이 해방된 것을 그렸다.

 

세 장교는 술탄에게 헌법의 복귀를 요구했다. 723일 압둘하미트 2세는 쿠데타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헌법을 부활했다. 정권은 청년투르크당이 외곽조직으로 만든 통일과 진보위원회“(CUP: 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에 넘어갔다. 엔베르, 탈라트, 제말 등 쿠데타 주역 세명은 자신들이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군으로 돌아갔고, 권력은 정치인들에게 맡겼다.

하지만 정권을 장악하자 청년투르크당은 분열되었다.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자는 파와 지방 분권화를 주장하는 파로 갈렸다. 얼마 되지 않아 지방분권파는 자유당을 만들어 떨어져 나갔다. 그해 말에 실시된 총선에서 중앙 집권파들이 장악한 CUP가 압승했다.

이번에는 청년투르크당의 반대세력이 결집했다. CUP에서 떨어져 나간 자유당, 술탄 지지파, 반혁명파, 보수 종교세력이 1909331일 쿠데타를 일으켜 CUP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세력은 곧바로 분열되어 정국이 혼미를 거듭했다.

탈출한 청년투르크 세력들은 마케도니아에 주둔하던 마흐무트 셰브케트(Mahmud Shevket Pasha) 장군을 설득했다. 반혁명 쿠데타가 발생한지 한달도 되지 않은 424일 엔베르, 케말 파샤 등이 가담한 또다른 쿠데타가 발생해 술탄 세력을 진압하고 정권을 되찾았다.

두 번째 쿠데타에서 청년투르크당은 술탄을 가만두지 않았다. 혁명파들은 압둘하미드 2세를 퇴위시키고, 그의 동생 메흐메트 5(Mehmed V)를 세웠다.

 

1908년 청년투르크 혁명의 주역들 /위키피디아
1908년 청년투르크 혁명의 주역들 /위키피디아

 

청년투르크당이 다시 집권했지만, 나라의 쇠약을 막을수 없었다. 오스만의 영역이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이에 합병되었고, 자치공국이었던 불가리아는 독립왕국을 세웠다.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 리비아를 침공해 자기네 땅으로 만들었다.

191210월에 발칸전쟁이 터졌다. 500년 이상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 등이 동맹을 맺고 과거 모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그 배후에 러시아가 지원했다. 오스만은 어이없게 패전했다. 이제 유럽지역에서 오스만은 이스탄불과 그 주변 트라키아만 남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그동안 정치일선에 나서지 않았던 엔베르, 탈라트, 제말등 3인이 전면에 나섰다. 그들은 세 번째 쿠데타를 일으켜 1913123일 손쉽게 정권을 장악했다.

세 사람은 권력을 공유해 3두 정치를 했다. 탈라트가 총리, 엔베르가 전쟁상, 제말이 해군상을 맡았다.

 

바야흐로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1914628일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인류의 대재앙이 시작되었다.

이때 엔베르, 탈라트, 제말의 삼두는 거대한 오판을 저질렀다.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삼국동맹,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협상이 벌이는 큰 판의 전쟁에서 그들은 어느 편에 설지를 고민했다. 중립을 지키는 게 최선의 방법이고, 차선은 이기는 쪽에 붙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전황이 악화되면서 그들은 어느 쪽에 붙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승전국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후에 오스만 제국을 갈기갈기 찢어 발릴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면 어느쪽에 붙어야 하는가. 러시아는 수백년 동안 열차례 이상 전쟁을 벌인 지긋지긋한 적대국이고, 영국은 그리스 독립전쟁을 지원했고,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도 오스만의 영토를 빼앗아간 나라다.

엔베르가 가장 적극적으로 독일에 붙자고 주장했다. 독일은 떠오르는 강국이고, 한번도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독일은 오스만의 근대화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기술, 자금, 학자, 군사교육 등을 지원했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당시 독일이 프랑스를 물밀 듯 쳐들어가 초반 전세가 우세해 보였다. 세 사람은 독일과 동맹을 맺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청년투르크의 오스만은 3국 동맹의 일원으로 1차 대전에 참전했다. 하지만 전선은 국내에서 형성되었다. 러시아가 카프카스로 밀려오고, 영국이 터키 해협의 갈리폴리 반도로 침공했다.

 

수용소로 끌려가는 아르메니아인들 /위키피디아
수용소로 끌려가는 아르메니아인들 /위키피디아

 

카프카스 전투에서 고전하던 청년투르크 3인방은 아르메니아인들을 러시아 국경 근처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시리아로 이주시키기로 했다. 그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 편이라고 생각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 영토내 아르메니아인들과 연락을 취해 첩자질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또 기독교 일파인 아르메니아 정교도들에 대한 종교적 편견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엔베르, 탈라트, 제말은 투르크족 우월주의에 빠진 종족주의자들이었다.

앞서 1893~1894년 사이에도 8~30만명에 이르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군에 의해 학살된 적이 있었다.

1915424일 그들은 백만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 전체에 대해 이주명령을 내렸다. 이스탄불과 주요도시에 살던 아르메니아 정치인, 변호사, 의사, 교사, 언론인들은 체포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앙카라 근처의 수용소에 끌려가 감금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수용소에서 학살되었고, 강제로 이주당하는 사람들은 사막지대를 이동하던 중에 집단적으로 학살되기도 했다. 일종의 종족 말살이다. 이때 죽은 아르메니아인이 80~100만이라는 추정이 있다. 당시 오스만 영내에는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살았지만, 이 사건 이후 터키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소멸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이 아르메니아인 소개령을 내린 424일을 민족학살추도일로 정해 매년 추모모임을 갖는다.

1차 대전에서 터키는 패전했다. 청년투르크당을 이끌던 3인의 지도부는 독일 땅으로 도망쳤고, 청년투르크당은 192211월에 해산되었다. 그후 탈라트는 1921315일 베를린에서 아르메니아인에 의해 암살되었고, 제말은 1922721일 조지아(그루지아)에서 아르메니아아 비밀조직에 의해 암살되었다. 엔베르는 192284일 범투르크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타지키스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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