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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40명으로 세 번째 왕국 수립…오스만 제국 약화한 틈에 반도 통합
오스만투르크⑪…와하비즘과 사우디 건국
2019. 10. 25 by 김현민 기자

 

1700년대 이후 오스만투르크가 연전연패하면서 이슬람 세력에 위기감이 돌았다. 유럽의 기독교 세력이 흥하고 오스만 제국을 정점으로 하는 이슬람 세력은 쪼그라들었다. 발칸반도,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인도 등 도처에서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 세력에게 땅을 빼앗기거나 전쟁에서 죽어나갔다.

그러자 이슬람 지도자들 사이에는 새로운 반성이 일어났다. 이슬람의 수세적 처지가 코란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오스만 제국은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그래서 국력을 상실하고 기독교와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북아프리카에서 수피(Sufi) 교단, 인도에서 샤 왈리올라(Shāh Walī Allāh)에 의해 제기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종교학자 무하마드 이븐 압달 와하브(Muhammad ibn Abd al-Wahhab, 1703~1792)에 의해 와하비즘(Wahhabism)으로 발전했다. 와하브 운동은 비이슬람적 풍습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사회를 재편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와하브는 일체의 해석을 배제하고 오로지 코란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야 하며, 이슬람 초기의 원칙으로 돌아갈 것을 역설했다. 오스만 제국이 주도하는 이슬람은 알라신이 예언자에게 계시한 신앙을 잊어버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와하비즘의 메시지는 오스만 제국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렸다. 와하브 추종자들은 아라비아 반도를 장악하고 이라크로 확산되었고, 오스만의 종교적 패권을 위협했다. 와하브 세력은 이슬람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오스만에 의해 혐오스럽고 비이슬람적 사원으로 채워졌다고 설교했다. 압달 와하브는 타락한 메카와 메디나를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리야 토후국의 제1왕국(1744–1818) 영토 /위키피디아
디리야 토후국의 제1왕국(1744–1818) 영토 /위키피디아

 

와하브는 아라비아 반도의 작은 토후(emirate) 무하마드 빈 사우드(Muhammad bin Saud)와 손잡았다. 이 사우드 가문은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조상이다. 사우드 일족의 토후는 1744년 리야드 근처 디리야(Diriyah)에서 토후국을 건설했다. 그땐 사우디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 하나를 통치하는 부족국가에 불과했다.

디리야 토후국이 급성장한 것은 이슬람 수니파의 와하비즘을 받아들이면서부터였다. 디리야 왕국은 이슬람 창시자 무하마드처럼 종교를 앞세워 무력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1803년엔 디리야 토후국은 와하브 추종자들과 함께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하고 잘못된 교리의 사원들을 정화했다.

디리야 토후국과 와하비주의자들의 동맹은 메카와 메디나를 통치하는 것을 정통성으로 삼아 오스만 왕조를 대체하려고 했다. 그들은 점령지에 새로운 가르침을 전파하는 기지로 활용했다.

 

와하비즘과 디리야 토후국의 영토확장은 이슬람 패권자 오스만 투르크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속주인 이집트를 다스리는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파샤에게 디리야 왕국을 정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당시 무하마드 알리 총독이 이끄는 이집트 군대는 지방군으로 최강이었다. 이집트군은 오스만투르크를 대리해 1808년 아라비아 사막을 건너와 메카에 이어 디리야를 공격해 점령했다. 무하마드 알리는 디리야 왕국의 사우드 왕족을 이집트와 오스만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고, 다리야를 파괴했다. 디리야의 왕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처형되었다. 이를 사우디 제1왕국(17441818)이라 한다.

 

네지드 토후국의 제2왕국(1824–1891) 영토 /위키피디아
네지드 토후국의 제2왕국(1824–1891) 영토 /위키피디아

 

오스만투르크의 탄압에서 살아남은 사우드 왕족들이 1818년 왕국을 재건하고, 1824년 리야드를 점령해 새 수도로 삼았다. 이를 역사적으로 사우디 제2왕국(18241891)이라 부르는데, 왕국의 명칭은 네지드 토후국(Emirate of Nejd)이었다. 2왕국은 오스만 투르크와 그 속령이었던 이집트의 방해로 번성하지 못하고 주변 부족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1891년으로 막을 내린다. 남은 왕가는 오스만 투르크령 이라크(쿠웨이트)로 피난을 갔다.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자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위키피디아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자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위키피디아

 

1차 왕국의 건국자 무하마드 빈 사우드의 5대손인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Abdul-Aziz bin Abdulrahman Ibn Saud)가 세 번째 왕국 건설에 나섰다. 그는 족보상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의 건국자가 된다.

쿠웨이트에 망명해 있던 이븐 사우드는 쿠웨이트의 부족장(에미르)에게 병력과 군수물자 지원을 요청하면서 왕국 재건을 시작한다. 쿠웨이트 에미르는 네지드 왕국을 멸한 리시드 가문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병력과 말, 무기 등을 주었다. 그 때 이븐 사우드가 확보한 병력은 40명에 불과했다.

이븐 사우드는 19021월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리야드에 도착했다. 병력수는 적었지만, 그들은 하루 밤 사이에 도시를 점령하고 왕국을 수립했다. 이븐 사우드는 리야드 탈환을 계기로 지도력과 용기, 운이 뒤따르는 국왕으로서의 자질이 입증되었고,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후 이븐 사우드는 연전연승했다. 1902~1906년 사이에 이븐 사우드는 과거 네지드 왕국의 영역을 다시 확보했고, 1913년에는 알하사(Al-Hasa) 지역에 주둔하던 오스만 투르크 군을 추방했다. 이븐 사우드는 1917년 스스로 네지드의 술탄(Sultan)’이라고 선언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과 동등한 지위임을 공포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오스만 투르크는 독일의 편에 섰다. 오스만은 러시아와의 전투에 집중하느라, 중동 지역에서는 권력의 공백이 생겼다.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은 1차 대전에서 패한데다 케말 파샤가 이끄는 터키 공화국에 의해 1922년 해체되었다.

그 틈에 이븐 사우드는 아라비아 반도 통일에 나섰다. 이븐 사우드는 두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1926년 헤자즈 왕국(Kingdom of Hejaz) 정복에 성공했다. 헤자즈 왕국 복속은 이슬람 성지인 메카를 탈환한다는 큰 의미가 있었다. 이븐 사우드는 헤자즈 국왕도 겸했다.

1932923일 이븐 사우드는 본국인 네지드 왕국과 점령국인 헤자즈 왕국을 통합해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했다.

이븐 사우드는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 건설 전후에 쿠웨이트와 전쟁을 벌였지만, 영국의 개입으로 합병에 실패했다. 사우디 아라바아는 1934년 남부 아시르(Asir) 토후국을 합병하고, 현재의 국경선을 정리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 대규모 유전이 발견된 것은 1938년이다. 통일 사우디에 알라신의 은총이 내려진 것이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멸망한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성지 메카를 끌어 않으면서 이슬람과 수니파의 수장국으로서 부상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제3왕국(1902~ ) 영토 /위키피디아
사우디아라비아의 제3왕국(1902~ ) 영토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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