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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위기
마감 시한에 대형 사건 없어 …“사과 몇 개 썩었지만, 과수원 오염되지 않았다”
2002 美 회계부정⑧…의외의 성과, 자수기간 설정
2019. 10. 30 by 김현민 기자

 

199710월말 아시아 통화위기의 태풍이 북상하며 홍콩 증시가 폭락하고, 그 여파가 지구촌을 돌아 뉴욕 증시도 폭락했다. 직후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미국 경제의 기초여건(펀더멘털)은 강하다며 투자자들을 독려했다. 그 순간 뉴욕 증시는 기적과 같이 상승해, 폭락한 만큼 회복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정부와 금융시장 사이에 신뢰가 있었다.

5년후인 2002, 뉴욕 증시가 또다시 연일 폭락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2715일 앨라배마 주에서 미국 경제의 기초여건은 단단하다며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목소리가 방송을 탄 후, 다우존스 지수는 440 포인트까지 곤두박질쳤다. 며칠 전인 79일 부시 대통령이 뉴욕에 와서 기업 회계 투명성 방안을 선언한 후 15일 연설때까지 다우존스 지수는 무려 1,000 포인트나 폭락했다. 시장이 미국 정부를 불신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2001년 가을 9·11 테러로 뉴욕 월가가 잿더미로 변했을 때 테러 세력을 토벌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목소리만 들어도 뉴욕 증시가 올라가던 때와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뉴욕 증시 폭락장세는 기업과 금융부문에서 발생한 신뢰의 위기에서 연유했지만, 부시 행정부에 대한 불신도 한몫을 차지했다. 부시 대통령의 발언이 시장에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의 과거 전력이 회계 스캔들의 와중에 휩쓸려 있고, 기업 개혁 프로그램이 유연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부시 대통령은 1980년대말 석유회사 하켄 에너지에 근무할 때 스톡옵션을 지급받기 위해 시중금리보다 낮은 이자율로 사내 대출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아울러 투자가 감시단체가 체니 부통령이 에너지 회사 핼리버튼의 회장 재직시 회계부정을 눈감아준 의혹에 대해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부시 행정부의 불신을 가중시켰다.

또다른 문제는 폴 오닐 재무장관과 하비 피트 증권거래위원장(SEC)이 시장의 불신을 받았다. 연준(Fed)마저 200111차례의 금리 인하를 단행하며 정책 수단을 거의 다 소모했기 때문에 금융시장에 대한 행정부의 리더십이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뉴욕 월가에서는 부시 행정부의 경제팀이 불신을 받고 있기 때문에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하던 시절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존 맥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은 피트 SEC 위원장의 사퇴를 거듭 주장하며, 부시 대통령의 기업 부정 척결방안보다 강력한 민주당의 회계개혁법안의 지지를 선언했다. 그는 피트 위원장의 친 기업적인 금융규제 정책이 현재의 기업 범죄를 가중시켰다며 피트 위원장의 사퇴가 개혁의 첫단계라고 주장했다. 폴 오닐 재무장관은 미국 달러화가 급락하고 있을 때 한달 동안 아프리카를 순방하며 록 가수 보노와 함께 광대모자를 쓰고 가난 구제에 관한 논쟁을 벌여 비웃음을 샀다.

 

연일 터져나오는 기업 회계부정 사건과 시장 불안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처방은 크게 두 가지였다. 일단 상원과 하원이 기업 회계 개선법안을 조속히 합의go, 시행에 들어가도록 촉구하는 것과 일정 시점(2002814)까지 회계가 잘못됐다고 인정하는 상장회사로 하여금 수정할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부시 행정부 고위관료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범을 잡듯 기동수사대(SWAT)를 만들어 기업 범죄를 척결하겠다고 밝힌 내용은 이미 시장에서 외면당했다. 민주당 주도의 상원 법안이 비록 강경하지만 여론의 지지를 받는다면 이를 수용한다는 것이 부시 행정부의 입장이다. 부시 행정부는 빠른 시일 내에 법안을 통과시키고 시행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시장 안정에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또다른 대안은 20028월 중순까지 회계 부정 사건을 몰아서 터트리겠다는 전략이다. 따라서 이 때까지는 매일 사건이 터져나올 것이지만, 일단 이 시기가 지나면 투자자와 시장이 회계 부정의 악몽을 잊을 게 아니냐는 발상이다.

부시 경제팀이 이처럼 소극적 처방을 제시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회계 부정 사건으로 인한 신뢰의 위기가 정부가 간섭할 성질의 사안이 아니며, 시장의 자체 소화가 필요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시 경제팀에 시장에 영향을 줄만한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부시 행정부의 기업 부정 척결 방안의 초점은 문서나 통신을 통한 기업 사기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내용은 형사 특별 기동대(SWAT) 격의 기업 사기 전담반 신설 기업 범죄에 대한 최고 형량 연장 등 두가지다.

이외에도 기업이 경영진에게 운영자금을 사내 대출할 수 없다 최고경영자(CEO)는 연간 재무제표를 인증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CEO는 급여와 보너스등 보상이 얼마나 되는지를 쉬운 용어로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기업인이 분식회계 등 사기에 통해 증액한 재산은 몰수한다 기업 경영이 악화될 경우 사기 행위로 획득한 기업인의 보상(스톡옵션)은 인정할수 없다 기업 사기범은 다른 상장 법인의 임원이 될수 없다 SEC 수사요원을 100명 증원하고, 예산을 1억 달러 증액한다 SEC 규정을 강화, 기업 임원의 책임성을 높이고, 독립 회계 체계를 구축한다 회계사는 독립적이어야 하며, 상충된 이해관계에 타협해서는 안된다 증권 애널리스트는 소속 회사의 유가증권발행 알선 및 합병 중개를 돕기 위해 영합해서는 안 된다 애널리스트들이 애매한 용어로 투자자들을 오도해서는 안 된다 이사회는 기업 재무재표의 정확성을 점검하고, 회계회사가 CEO와 영합하는 것을 견제하며, 고위 경영진의 보상금이 현실적인지를 확인할수 있도록 주주들은 진실된 사외이사 선임을 요구할수 있다 주주들은 보상위원회의 규정 이행 상태와 회계 투명성을 요구할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데드라인으로 설정한 2002814일까지 더 이상 큰 회계 부정사건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조치가 효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기업 범죄자로 하여금 한꺼번에 자수 기간을 둔 결과는 아주 긍정적이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최고경영자(CEO)와 재무담당책임자(CFO)의 서명을 받아 기존의 재무보고서를 SEC에 제출했다. 엔론월드컴등 그동안 분식회계 사건에 휘말렸던 회사들은 재무제표 제출을 연기했지만, 이들 회사의 문제는 이미 노출되고 시장에 반영된 사안이었다.

이날 서약서 제출 마감시간(530)이 가까워지도록 그동안 우려됐던 새로운 대형 분식회계사건이 터지지 않자, 뉴욕 증시는 진정 기미를 보였다.

애널리스트들은 이날 폭등을 계기로 2001년말 엔론 파산으로부터 시작, 뉴욕 증시 폭락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신뢰의 위기는 일단 큰 획을 그은 것으로 해석했다. 1년 가까이 기업 스캔들에 시달려온 뉴욕 금융시장은 최근들어 기업 및 금융인들의 솔직한 고백에 귀를 기울이는 경향을 보였다. 그동안 사과가 몇 개 썩었을뿐, 과수원은 오염되지 않았다는 부시 행정부의 주장을 뒷받침한 것이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SEC 본청 건물 /위키피디아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SEC 본청 건물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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