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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직전의 회사 물려받아 세계 최대 회사로 육성…대포 개발로 전세계에 각광
독일 크루프 가문③…‘대포 신화’ 2대 알프레트
2019. 11. 03 by 김현민 기자

 

 

독일 크루프 철강왕국의 창업자 프리드리히는 파산 직전의 회사를 아들 알프레트(Alfred Krupp, 1812~1887)에게 넘겨 줬다. 아버지가 죽은 1826, 아들 알프레트는 고작 14세였다. 하지만 알프레트는 소년의 나이를 뛰어 넘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여덟살 때에 아버지의 말을 타고 몇 km 떨어진 곳에 쇳덩어리가 든 자루를 배달하고 고객과 납품업자를 찾아다녔다. 아버지가 죽자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철공소 모루 앞에서 망치를 휘두르고 가마를 달구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극심한 가난이 닥쳐 왔다. 빵가 감자, 커피, 약간의 고기가 전부였고, 공장내 숙소 다락방에서 미래의 어두움을 걱정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하루 벌어 하루 먹으며 살았다. 그래서 반드시 모든 일에 성공해야 한다.” 7명의 직원들이 모두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 직원들은 그를 어린 크루프씨라 부르며 지시를 따랐다.

 

알프레트 크루프 /위키피디아
알프레트 크루프 /위키피디아

 

하지만 2대 크루프는 창업자보다 운이 좋았다. 독일에 통일의 기운이 달아 올랐고, 산업화가 추진되었다. 선구자의 비극을 겪었던 아버지에 비해 아들은 시운이 따랐다.

1834년 독일의 제후국들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관세동맹을 체결해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형성했다. 22세의 알프레트는 동생 헤르만(Hermann)과 함께 독일 제후국들을 방문하며 주문을 받았다. 그 때 받은 주문량이 이전 판매량의 세배에 달했다. 생산량도 많아져 직원이 45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 정도의 주문으로 오랫동안 누적된 적자를 해결하지 못했다.

1838년 알프레트는 공장을 동생에게 맡기고 산업혁명의 본고장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영국을 흠모하게 되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알프리트(Alfried)였지만, 영국식으로 알프레트(Alfred)로 바꾸었다. 그는 15개월 동안 영국의 압연공장, 단조공장, 철광, 제련소를 돌아다니며 산업스파이 역할을 했다. 앞선 영국의 기술을 눈에 담아 에센으로 돌아왔다.

그가 영국에서 염탐질을 할 때인 1841년 공장을 맡았던 동생 헤르만은 스픈-롤러(spoon-roller)라는 압연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특허를 얻어 회사에 많은 이익을 남겨주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공장을 확장하고, 강철 생산량을 늘렸다.

 

알프레트가 대포를 처음 만든 것은 1847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포는 청동으로 만들었다. 알프레트가 만든 대포의 재질은 강철이었다.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세계 최초로 세계박람회(Great Exhibition)가 열렸다. 알프레트는 자신의 공장에서 만든 4,300 파운드 강철 대포를 선보였다. 그의 대포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크루프 대포의 포신은 청동이 아니라 강철로 만들어졌다. 알프레트 크루프는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땄고, 그의 명성은 하룻밤 사이에 전 유럽에 퍼졌다.

프랑스도 1855년에 파리에서 세계박람회를 개최했다. 알프레트는 또다른 강철 대포를 전시했다. 대포는 워낙 무거워 전시장 바닥을 무너뜨렸고, 그 해프닝이 그를 더 유명하게 했다.

두 번의 박람회를 통해 크루프 대포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러시아와 이집트가 크루프 대포를 주문했다. 크루프의 강철 덩어리(잉곳, ingot)는 무결점이라는 소문이 났다. 잉곳 주문량이 1851년 런던 박람회 때 45천파운드에서 1855년 파리박람회 때 10만 파운드로 두배 이상 증가했다. 이제 알프레트의 크루프사는 국제적 명성을 얻음과 동시에 아버지가 물려준 경제적 어려움을 완전하게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크루프 로고 /위키피디아
크루프 로고 /위키피디아

 

순풍에 돛단다는 말처럼 기사회생한 크루프에게 또다른 신제품이 개발되었다. 바로 철도 바퀴였다. 그동안 철도바퀴는 두 개의 반원을 주조해 붙였는데, 잘 부서졌다. 크루프 철강회사는 이음새 없이 하나의 원으로 바퀴를 만드는 방식을 개발했다. 마크인 바퀴라는 이 신 제품은 한창 철도사업이 진행 중이던 미국으로 팔려 나갔다. 크루프의 로고인 고리 3개는 철도 바퀴를 상징한다.

크루프는 장전 방식을 바꾼 대포도 개발했다. 그동안 대포는 포신 앞부분에서 포탄을 밀어넣고 격발하는 전장식이었는데, 크르푸사는 후방의 약실에서 장전해 격발하는 후장식 대포를 개발했다. 이 대포는 과거 대포에 비해 장전 속도가 빨랐고, 사거리도 늘어 나고 명중률도 높았다.

알프레트는 후장식 대포의 성능이 재래식보다 월등히 우수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정작 독일 군대가 이 대포의 사용을 꺼렸다. 독일 포병장교들은 재래식 무기에 익숙해 있었고, 새로운 대포의 성능을 믿지 못했다. 알프레트는 프로이센 왕실에 신제품을 선물했다. 하지만 당시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Friedrich Wilhelm IV)는 대포의 성능을 이해하지 못하고 왕실 장식용으로 전시했다. 그 대포의 성능을 알아본 사람은 국왕의 동생 빌헬름(Wilhelm)이었다. 후에 독일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는 빌헬름은 혁신 무기의 성능을 깨닫고 있었다. 1859년 빌헬름이 섭정이 되면서 프로이센은 크루프의 후장식 대포를 채택하게 된다. 프로이센은 크루프에서 312대 신식 대포를 주문했고, 프로이센 육군의 주요 장비로 배치했다.

쿠르프 대포의 위력은 독일 통일을 위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에서 증명했다. 청동으로 만든 전장식 대포를 사용하던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대포에 굴복했다. 크루프는 프랑스에도 후장식 대포를 살 것을 권했다. 나폴레옹 3세는 크루프 대포 수입에 찬성했지만, 군부가 반대했다. 그 결과는 전쟁에서 나타났다. 크루프가 만든 최신 대포로 무장한 프로이센 군대는 순식간에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파리를 점령했다. 청동대포와 강철대포, 전장식과 후장식의 대결은 어느 쪽이 우수한지 해답을 주었다. 독일인들은 크루프의 대포, 크루프의 강철이 프랑스군을 무찔렀다고 말했다.

크루프 대포는 유럽 열강에 무기경쟁을 촉발했다. 프랑스, 영국도 무기 개발에 나섰고, 통일 독일도 크루프를 앞세워 무기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독일제 대포의 성능이 알려지면서 세계 각국이 크루프 대포를 샀다. 1887년까지 러시아는 크루프에서 대포 3,096대를 샀고, 경쟁국 오스만 투르크도 2,773대를 샀다. 20세기초 발칸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에 불가리아는 517, 그리스 356, 오스트리아-헝가리 298, 몬테네그로 25, 세르비아도 5대를 샀다. 1차 세계대전 직전에 발어진 발칸 전쟁은 크루프 대포의 전쟁이었다.

 

장사가 잘 되면서 알프레트는 대대적으로 사업확장에 나섰다. 스페인의 광산을 메입하고 네덜란드의 조선소를 사들였다. 크루프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회사가 되었다. 하지만 1873년 금융위기가 닥쳐오면서 크루프는 심각한 재정위기에 봉착했다. 이때 크루프를 도운 사람은 빌헬름 1세 황제였다. 황제는 프로이센 국립은행을 주간사은행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해 3천억 마르크의 구제금융을 지원했다. 대포회사, 강철회사를 파산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재정위기를 해소하고 알프레트는 188771475세의 나이로 세상과 이별했다. 14살에 경영에 입문했으니, 60년 이상 크루프를 경영하면서 세계 제1의 회사로 키운 것이다.

 

크루프 가문의 저택 ‘언덕위의 집’ /위키피디아
크루프 가문의 저택 ‘언덕위의 집’ /위키피디아

 

알프레트는 기업을 경영하는데는 수완이 있었지만, 가족은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에센시 높은 곳에 대궐 같은 언덕위의 집’(Villa Hügel)을 지었지만, 아내 베르타(Bertha)은 가부장적인 남편과 시끄러운 공장이 싫어 말년에 남편 곁을 떠났다가 그가 죽자 돌아왔다.

알프레트는 권위주의적이었고, 크루프를 국가내 국가로 통치하듯 경영했다. 1인 주주로 경영해야 한다는 원칙을 후대에도 남겼다.

그는 복지주의자였다. 사회주의자를 극도로 싫어하며 대신에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복지혜택을 주었다. 직원들에게 의료보험에서 주택에 이르기까지 제공했다. 그는 노동자를 굶주리게 하는 하는 기업은 문을 닫아야 한다고 했다. 크루프의 복지제도는 유럽의 다른 회사들이 배워갔고, 각국 정부도 모델로 삼았다.

그는 일의 목적은 공동의 행복이어야 한다면서 물건을 제작할 때에는 가능한 한 완벽한 작업을 수행하도록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는 고객들에게 양질의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을 늘 강조했다. 그게 크루프의 신화를 만들었다.

그는 이런 구절을 남겼다. “돈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잃는 게 아니다.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은 것을 잃는 것이며, 용기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

알프레트가 죽은후 그의 장남 프리드리히 알프레트(Friedrich Alfred Krupp)가 회사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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