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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낙규 여행기
모랄레스 현 대통령, 4선 도전에 개표조작 의혹…한국 교포 정치현도 득표율 3위
볼리바르의 꿈은 이루어지는가?…강낙규의 볼리비아 여행③
2019. 11. 06 by 강낙규 전 기술보증기금 전무

 

1999년 볼리비아의 코차밤바 상수도시스템이 미국 벡텔사에게 매각된 직후 벡텔사는 물 값을 세 배로 올린다. 모랄레스는 코차밤바 물 전쟁의 선봉에 나서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결국 상수도시스템은 다시 국유화 된다. 모랄레스는 2003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친 대통령 탄핵과 시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떠올랐고, 2005년 조기 대선에서 과반 득표로 승리함으로써 첫 원주민 대통령에 당선된다.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위키피디아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위키피디아

 

< 에보 모랄레스(Juan Evo Morales Ayma, 1959) >

 

집권 이후 천연가스 사업의 국유화 조치를 통하여 재정수입을 증대시켜 볼리비아는 만성 재정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선다. 효율적인 인프라 건설과 보조금을 통한 물가억제, 건설업 호황으로 1인당 GDP2000년대 중반까지 1,000달러 수준에서 2014년에는 3,000달러대로 상승한다. 2015년 이후로 남미국가들이 성장 둔화에 빠졌음에도 볼리비아는 4~5%대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한다. 2017년 중순에는 볼리비아의 최저임금이 브라질과 페루를 추월한다. 경제적인 성과를 통해서 빈곤율과 문맹률을 크게 끌어내려 그 동안 빈민층 신세로 살았던 대다수 원주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권위주의적인 성향이나 즉흥적인 성격으로 환경단체와 언론으로부터 비판받는다. 20164번째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찬성 48.7%, 반대 51.3%로 부결되자, 20171128일 볼리비아 헌법재판소로부터 4선 도전(현행 헌법상으로 3)이 합법이라는 판결을 받아내어 20191020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대선당일 전자개표가 83% 완료됐을 때 선거관리위원회가 모랄레스 대통령과 메사 후보의 격차가 7.1%포인트라는 결과를 공개한 뒤 갑자기 결과 발표를 중단했다가 하루 만에 개표 95% 상황을 공개했는데, 두 후보 간 격차는 10.1%포인트로 크게 벌어진다. 볼리비아의 선거제도는 1,2위 간 격차가 10%이상 되면 결선투표를 하지 않는다.

모랄레스 현 대통령의 개표 조작의혹으로 시위가 격화되어 2명이 사망하고, 일부 도시에서는 행정이 마비되고 도로가 봉쇄된다. 득표율 3위를 기록한 한국인 교민 정치현 후보 측이 한 지역의 개표 결과를 분석해보니, 정 후보의 득표율이 모랄레스 득표율로 둔갑됐다며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한다. 모랄레스 대통령과 선거관리당국은 조작을 부인했다. 미주대륙의 협력을 위해 창립된 미주기구는 개표 감사에 착수하지만, 야권은 여당이 참여한 감사를 반대하고 있어 향후 정치 일정이 불확실하다.

 

정치현 후보 포스터 /정치현 페이스북
정치현 후보 포스터 /정치현 페이스북

 

스페인으로부터 해방 그리고 페루로부터 독립을 시킨 볼리바르의 고마움에 국가명도 볼리비아로 명명한 볼리비아. 시몬 볼리바르가 지금의 사태를 보면 어떤 심정일까? 시몬 볼리바르의 위대한 발자취와 비극적 생애를 만나보자.

 

<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

 

남아메리카 건국의 아버지, 불굴의 선각자, 남아메리카의 해방자, 최초이자 최후의 남아메리카인, 남아메리카와 결혼한 남자.

그가 1년만 더 살았다면 혹은 범아메리카 연맹 조약체결을 위한 파나마회의에 참석하였다면 라틴아메리카는 200년 동안의 독재와 미국으로 부터의 착취를 피했을까?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3개의 목장과 은광산, 구리광산을 소유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볼리바르가 4세에, 어머니는 9세에 사망하고, 줄루족 흑인여성인 히폴리타가 보모 겸 어머니로 평생 볼리바르를 보살핀다. 히폴리타의 영향으로 볼리바르는 노예해방을 선언한다. 유럽에서 교육을 받던 중 마리아 테레사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져 청혼을 하지만 장인이 반대한다. 1년 후에도 사랑이 변치 않으면 혼인을 승낙하겠다는 장인의 약속대로 1년 후 결혼하고 베네수엘라로 돌아온다. 하지만 아내는 베네수엘라에서 풍토병에 걸려 10개월 만에 사망한다. 볼리바르는 라틴아메리카의 독립만이 나의 유일한 신부라고 선언하며 평생 독신으로 산다.

나 자신의 명예와 하느님의 이름과 조국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스페인의 권력이 우리를 속박한 그 사슬을 깨뜨릴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을 것이다.” 로마 아벤틴 언덕에서 한 맹세를 실천하고자 집안 재산을 팔아 부하들을 무장시키고 독립전쟁에 참가한다.

 

남영주 사진작가
남영주 사진작가

 

1810년 미란다장군과 함께 독립전쟁에 출전하였으나 카라카스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많은 희생을 치르고 퇴각한다. 1812년 총사령관이 되어 스페인 군을 격퇴하고 카라카스에 입성하자 해방자(El Libertador)란 칭호를 받는다. 그러나 1814년 스페인군의 반격에 자메이카로 피신한다. 18163월 아이티 페티옹 대통령으로부터 7척의 소형선박과 250명의 군인, 4,000명을 무장시킬 무기를 지원받아 자유의 이름으로 항해하여 베네수엘라 마르가니타 섬에 상륙한다. 이 때 베네수엘라 평원의 목동 야네로(Llanero)들이 볼리바르를 지지하며 합세한다. 181653일 베네수엘라의 독립과 노예해방을 선언한다. 링컨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포한 1862922일 보다 46년이 앞선다.

1819년 안데스산맥을 넘어 보야카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하여 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 콜롬비아), 1821년 베네수엘라를, 1822년 키토(Quito 에콰도르)를 해방시킨다. 18219월에는 세 국가를 합한 대()콜롬비아 연방을 수립하여 종신대통령으로 추대된다.

1822년 에콰도르의 과야킬(Guayaquil)에서 라틴아메리카를 해방시킨 두 주역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San Martín)이 페루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만난다. 산 마르틴은 칠레를 해방시키고 페루 독립을 선언했다. 둘만의 비밀회담으로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두 사람의 견해는 달랐다. 볼리바르는 공화주의자로 대()라틴국가 건립을 위해 강력한 대통령제 실시를 주장한 반면, 산 마르틴은 왕정주의자로 유럽왕실에서 왕자를 받아들여 입헌군주제 실시를 주장하였다. 회담 이후 산 마르틴은 라틴아메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갔고 185072세의 나이로 프랑스에서 사망한다.

볼리바르는 1824년 페루 아야쿠초(Ayacucho) 전투의 승리로 1825년 페루를 해방한다. 또 페루 북부 알토 페루(Alto Peru 안데스 고원지역)에 남아 있는 에스파냐군의 잔당을 그의 친구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Sucre)에게 소탕시키게 하여, 알토 페루까지 해방시킨다. 1825년 페루와 볼리비아 지역의 통치를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에게 맡긴다. 그래서 볼리비아 초대 대통령은 시몬 볼리바르이고, 두 번째 대통령이 수크레다.

볼리비아 사람들은 해방자 볼리바르와 아야쿠초 전투 승리자 수크레, 두 영웅을 기리기 위해 국호를 볼리비아공화국, 헌법상의 수도를 수크레(Sucre)로 명명한다.

볼리바르는 미국처럼 라틴아메리카 합중국을 건설하고 인종차별 없는 국가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독립전쟁이 일단락된 1826년 아메리카총회를 파나마에 소집하였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참석하지 못한다. 당시 미국 전권대사 리처드 클러프 앤더슨는 볼리바르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회의에 참석해서 볼리바르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앤더슨은 건강 악화로 사망하여 아메리카총회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라틴아메리카 합중국이라는 강력한 연방에 미국은 반대 입장이었다. 당초 아르헨티나를 제외하고 칠레, 브라질, 멕시코, 과테말라, 페루, 볼리비아, 콜롬비아가 참석한다고 했는데 멕시코, 과테말라, 콜롬비아, 페루 4개국만 참석한다. 노예제 폐지와 경제, 사회에 대한 국가 간의 대립과 독립전쟁 선봉이었던 지도자 까우디요(Caudillo)들이 경제력과 사병(私兵)을 바탕으로 군벌로 성장하면서 이해관계 차이로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183064일 친구 수크레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심해서 친구에게 편지를 보낸다. “남아메리카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했던 당시, 우리는 바다에서 쟁기질을 했던 거야!”

1830년 대콜롬비아 연방 마저 해체되자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얼마 후 ! 결국 미로에 갇혀버리고 말았군!” 이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마르케스 <미로속의 장군> ) 사후 발표된 유언장에서 마지막 말을 남긴다. “나의 죽음이 아메리카연맹을 화해시키고, 통합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나는 편안히 땅 속에 묻힐 것입니다.”

영화 리버레이터(Libertador)에서 볼리바르의 일대기를 볼 수 있다.

1826년 그가 소집한 파나마회의는 범아메리카주의의 기초가 되어 170년 후 200112월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미주대륙을 위한 볼리바르 동맹’ ALBA(새벽)을 제안한다. 200412월 정식 출범한 이후 현재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쿠바, 니카라과 등 9개국이 가입되어 있다. 시몬 볼리바르의 정신을 이어받아 라틴아메리카의 단결과 통합, 사회정의의 달성을 시도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연대에 의한 교역질서를 위하여 무역결제 수단인 수크레(sucre)를 창설하였다.

시몬 볼리바르는 바다 속이 아니라 거친 황야에서 쟁기질 한 것이다.

 

시몬 볼리바르 /위키피디아
시몬 볼리바르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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