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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간 세계 2위의 철강회사 일궈낸 기업인…정치활동으로 외유길
철강왕 박태준①…TJ사단의 몰락
2019. 11. 09 by 김현민 기자

 

철강왕 박태준(朴泰俊, 1927~2011)은 대한민국을 철강대국으로 만든 경영인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정신으로 197369일 포항제철 제1 고로에서 첫 쇳물 생산을 생산했다. 그는 오늘의 포스코를 만든 창업자였다.

1982년 광양제철소를 완공한 후 10년만에 포항제철(나중에 포스코로 사명 변경)2,100만톤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가 35년에 걸쳐 연산 조강 1,000만톤을 이뤘지만, '한국의 철강왕' 박태준은 25년만에 기술도 자본도 없는 상태에서 2,100만톤을 달성했다. 그의 업적은 세계 철강업계에서 신화창조였다.

그는 인생 후반기에 정치를 했다. 199210월 포철 회장직에서 물러나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김영삼 민자당 대선후보가 선거대책위원장을 부탁했지만, 거절하는 바람에 국회위원직을 사퇴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후 포철에 대한 압력이 들어왔다. 그는 일본을 전전했다.

김영삼 정부 말기에 1997년 자민련 총재가 되었고,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그는 20111213일 호흡곤란 증세로 치료받다 병세가 악화하면서 향년 85세로 별세했다.

우리는 여기서 박태준이 포스코를 떠나 정치인으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를 정리한다. /편집자주

 

포항제철 주주총회를 열흘 앞둔 19933월초의 어느날, 포항제철(당시 사명, 이하 포철)의 조말수 부사장은 정부 고위층으로부터 긴급 지시를 받는다. 박태준이 없는 포철을 구상하라는 내용이었다. 새 정부로서는 박태준씨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고 철강경기가 어려운 터에 그의 능력을 활용하고는 싶지만 더 이상 개혁정치에는 불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조 부사장은 장중웅 상무와 함께 새 정부에 호응하는 포철 개혁안을 서둘러 마련해 청와대에 보고했다. 그 개혁안에는 박태준 시대의 단절, 부정부패 척결 등이 골자였다. 이는 청와대가 박태준 없는 포철을 결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조 부사장은 또 정명식 부회장을 찾아가 박태준-황경로 회장의 공백을 메워줄 것을 요청, 응낙을 받아냈다. 정 회장, 조 사장, 장 상무를 주축으로 하는 포철 개혁세력의 근간이 형성됐다. 이들은 TJ(박태준의 이니셜) 사단을 중심으로 퇴임할 임원들의 명단을 짰다. 그리고 312일의 주총을 기다렸다.

연산 2,100만톤의 조강능력, 매출액 61,000여억원으로 세계 제2의 철강회사, 제조업 부분 국내매출 1위의 포철 주총은 그야말로 박태준 사단에 대한 대학살이었다.

포철 주총의 숨 막히는 진행은 40여분만에 끝나고 정명식-조말수의 체제가 정식 출범을 선언했다. 그러면 포철 신화를 창조, 성장한국의 심벌로 여겨졌던 박태준 왕국의 대폭 물갈이의 실체는 무엇인가. 자본금의 50% 이상을 쥐고 있는 정부가 칼자루를 흔든 것인가. 아니면 백태준 사단의 내부 궁정반란인가. 포철을 떠난 임원과 개혁세력에 가담해 잔류하고 있는 간부들의 뒷얘기를 요약하면 후자에 가깝다. 즉 박태준과 그의 사단이 새 정부의 눈에 거슬려 약화된 틈을 타고 조말수 사장을 정점으로 하는 개혁세력이 정부의 원격 지원을 받아 25년간 장기집권의 구세력을 뒤엎을 무혈 쿠데타의 성격이라는 것이었다.

대외 이미지는 정 회장이, 총책임은 조 사장이, 이론은 장 상무가 각각 분담했다. 5·16 당시로 치면, 장도영, 박정희, 김종필씨의 역할 그대로였고, 20여년간 백태준을 모신 측근 그룹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개혁론은 로마제국 초기 브루투스의 칼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아니면 가시를 품고 화사하게 피어난 배반의 장미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같은 해석은 ‘TJ사단의 시각일 뿐 많은 포철인들은 시대상황 변화의 당연한 귀결로 받아 들였다.

퇴임 간부의 말이다. “조말수 사장, 장중웅 상무가 청와대로부터 고위층의 뜻을 전달받은 것은 주총 열흘전 쯤이었습니다. 장 상무는 조 부사장을 만나 포철 개혁안을 짰습니다. 이 개혁안이 청와대에 올려졌고, 그 안에는 주총 때 퇴임할 임원, 그후 인사에서 포철을 떠나야 할 임원의 개략적인 내용과 박태준 이후의 포철 경영구상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조말수 사장이 청와대에 보고한 포철 개혁안의 내용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당사자들은 일체 함구했다. 그러나 새 경영진 출범 전후에 진행된 일련의 개혁을 거꾸로 짚어보면 그 실체가 드러난다.

그 첫 번째가 박태준 사단의 제거다. 이에 대해 장중웅 상무는 단절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박태준 체제의 승계, ‘청산이냐로 고민했지요. 두 가지 반대의 개념을 변증법적으로 승화시킨 것을 포철 개혁의 논리로 보면 적절할 것입니다.”

조말수 사장이 구심점이 된 포철개혁 세력들은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고 박태준 사단의 제거를 단행했다. 당초 예상한 박태준 명예회장, 황경로 회장, 박득표 사장, 이대공 부사장 이외에 여상환 부사장, 구자영 상무, 차동해 감사도 개혁의 대상에 포함됐다. 여 부사장은 조 사장의 선배였고, 구 상무는 박태준이 외유할 때 이대공 부사장으로부터 날라온 정세판단 메시지를 전달해온 장본인이었다. 박 사장, 구상무, 차 감사는 박태준씨와 같은 경남 양산 출신이었다.

2차 칼날은 327일 이사회에서였다. 장경환 사장대우, 최주선 거양상사 사장 등 89명이 미리 사표를 내거나 퇴임 통보를 받아 물러 났다. 31일에는 철강협회 부회장 송기옥씨도 일신상의 이유로 자진사퇴해 이른바 박태준 사단에 대한 숙청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포철의 새로운 집행부가 비록 선배의 가슴에 못질을 해 내몰아쳤어도 가슴 아픈 고뇌의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조 사장은 박태준씨의 비서 생활을 오래 해 TJ의 분신이나 다름 없지요. 포철을 살리는 길이 이것 외에 더 있겠습니까. 새 정부는 서슬 퍼렇게 포철을 바라보고 있고, 시대도 뭔가 포철의 변화를 바라고 있습니다. 정 회장, 조 사장의 심성으로 보아 TJ인맥을 차단함으로써 TJ를 살리고 포철을 구한다는 역설의 논리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박태준 측근에 의한 박태준 사단의 몰락이었다. 이는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발생한 일이지만, 노태우 정부의 6공화국 후반에 정치에 참여한 박태준 전 포철 회장에 대한 마무리였다.

 

1976년 포항 2고로에 화입하는 박정희 대통령 /포스코
1976년 포항 2고로에 화입하는 박정희 대통령 /포스코

 

그러면 박태준이 왜 김영삼 정부에 미운털이 박혔을까. 스토리는 1989년으로 거슬러간다. 그해 1213일 포철 회장이었던 박태준은 회사일로 출국해 파리에 머물던 중에 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을로부터 민정당 대표를 맡아달라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박태준은 몇차례 고사를 했으나 노태우 대통령과의 정분으로 더 이상 물리칠수 없었고, 결국 정치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박태준씨가 민정당 대표, 3당 통합후 민자당 최고위원을 맡는 시기는 나라 경제가 이른바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던 시기였고, 경제를 아는 당대표가 필요할 때였다.

벅탸준은 제14대 총선, 대선을 거치면서 반YS(김영삼의 이니셜) 입장을 고수했다. YS 당선이 확정되면서 부산 출신의 박득표 전 사장은 인맥, 지연을 동원해 박태준 구명을 호소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최형우 민자당 사무총장이 두 번이나 김영삼 대통령에게 TJ 구명을 건의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그런 얘기는 다시 하지 마시오라고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물론 청와대가 TJ의 제거를 결심하는데는 TJ가 없어도 포철의 경영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포철 개혁팀의 건의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이 소식이 포철에 전해진 것은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인 19932월말이다. 이 무렵 포철 내에서도 박태준씨가 포철을 떠난다는 설이 요지부동의 사실로 굳어졌다.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려 했던 것, 대선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물리친 것, 선거 전날(1217) 민자당의 사신공개에 항의해 의원직을 내던져 버린 일들이 권력을 쥔 세력의 눈에 곱게 비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13일 시작한 국세청 세무조사는 정치자금 유출에 집중되었고, 짐을 쌀 임원의 구분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주총을 이틀 앞둔 310일 오전 9시경, 경칩이 지났건만 김포벌의 한기는 봄을 느낄수 없었고 금세라도 비가 올 듯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박태준씨가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에 나타났다. “어디가지 가야 한단 말인가.” 늘 수족처럼 따라 다니던 포철의 이대공 부사장을 뒤로 한 채 박태준은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1973년 포항제철소 제1고로의 불을 당기고 흘러나오는 쇳물에 감격의 눈물을 감추지 않았던 철강인으로서의 모습도,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려 했을 때의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문민정부가 들어섰다고는 하는데, 개혁의 시대가 돌아왔다고들 하는데,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또다시 이 나라를 떠나야만 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봄이 왔건만 붐 같지 않은 그날의 날씨가 바로 그의 착잡한 심정이었다.

박태준은 탑승구로 향했다. VIP 대접을 받던 화려한 과거의 행차와는 달리 의전실 직원들의 도움을 받지 않은채 일반승객 사이에 섞여 출국소속을 밟았다.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언제 돌아올지에 대해 자신조차 모르는 출국이었다. 그의 출국읜 자의에 의한 것이었지만, 세불리에 따른 신변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포철 총수 25, 국회의원 12, 집권당 대표·최고위원 3년의 경력만으로도 경제인으로, 정치인으로 화려했던 박태준의 입지를 웅변해준다. 그러나 그의 야누스적 두 모습은 모두 실패로 귀결된다. 경제인으로서의 화려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치가로서의 변신에는 실패해 결국 포철을 떠나야만 했다.

영일만의 불모지와 광양만의 갯벌에 빈손으로 세계적 철강단지를 일궈낸 박태준과 그 사단의 몰락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만들어 낸 국민당의 붕괴와 함게 경제인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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