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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그후
미국은 로마제국보다 영국 제국주의 닮아…주권 통제보다 우호적 정권 수립
9/11 그후⑩…영국의 유산
2019. 11. 10 by 아틀라스

 

미국은 로마 제국인가. 일부 저널리스트가 규정했듯이 제4 로마제국인가. 미국의 극우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의 나라가 로마 제국이라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미국은 로마 제국과 다르고, 로마 제국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국은 세계 유일의 슈퍼파워이었으며, 프랑스의 외무장관 위베르 베르딘이 좀더 강력한 표현으로 사용한 하이퍼파워(hyperpower)’일 뿐이었다. 동서 냉전시절엔 슈퍼파워가 미국과 소련등 둘이었다. 둘중 하나가 무너지면서 미국은 마지막 남은 슈퍼파워(the last remaining superpower)’였다.

제국주의는 식민지 또는 준식민지에 모국의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행사한다. 로마 제국은 군대를 파견해 반란을 진압하고, 위임 통치자를 마음대로 교체하며, 통치를 강화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런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미국은 독일에 수만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지만 독일 총선 과정에서 어느 장관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정책을 아돌프 히틀러의 그것에 비유했지만, 미국은 아무런 행동을 취할수 없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끊임없는 유혈충돌을 벌였지만 미국은 양자간 대화를 중재할 뿐, 전쟁과 테러를 종식시킬 힘을 보유하지 못했다.

로마는 점령지를 초토화시키고, 패배한 적군을 몰살시키고, 백성들은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지중해의 해양국가 카르타고는 한때 기름진 옥토였으나 로마군이 입성해 바닷물을 끌어들여 폐허로 만들었다.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카르타고의 자취를 찾을수 없는 것은 로마군의 잔혹함을 보여준 것이다. 이에 비해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여러 로마장수들의 품에 안기면서 로마에 고분고분했던 이집트는 그나마 백성과 문화를 유지할수 있었다. 항복해서 명령에 따르면 살려주고, 저항하면 완전히 없애버리는 그야말로 야만의 제국이었던 것이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들은 폐허로 만들고,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다고 썼다. 로마 제국에 의한 평화,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한마디로 군사력에 의한 평화였다. 동맹국이나 우방 따위는 없었고, 적이냐, 지배냐의 양자택일만이 있었다. 로마는 북에는 게르만족, 동에는 훈족, 서에는 페르시아족과의 싸움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군사력을 유지해야 했다. 로마는 그 군사력의 한계점에서 영토의 일부를 잃고, 동서로 분리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로마 제국과 미국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주권에 대한 지배력이다. 미국은 2,000년 전의 로마만큼 넒긴 하지만,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지 못했다. 알카에다 테러세력과 탈레반 정권을 와해시키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지만 그곳을 미국령으로 만들지 못했다. 다만 대통령의 친미정권을 세웠을 뿐이다. 이라크를 공격,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제거시키는 계획은 이라크를 점령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친미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것이었다.

로마제국은 자신의 영토에 마음대로 군대를 이동시켜 지배했지만, 미국은 그렇지 못하다. 현지 정부가 미군이 필요 없다면 떠나야 한다. 미국은 1990년대초에 필리핀 정부의 요청으로 수빅만 해군과 클라크 공군기지를 철수했으며, 파나마 운하 점령지를 내주어야 했다.

로마 제국의 황제는 전쟁의 영웅이며, 원로원이라는 고위정치집단에 의해 선출된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은 전쟁 영웅이 아니며, 복잡한 선거 절차에 의해 선출된다. 미국의 대통령을 로마 황제에 비교할 수 없다.

미국은 또 로마제국과 달리 적대국에게도 적대감을 순화시키기 위해 경제적 도움을 준다. 북한 경수로 사업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한때 친미 정권이었고,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훈련을 받았지만 반미로 돌아섰다. 미국이 지나치게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더 많은 무력을 유지함으로써 그 결과로 로마의 길을 걸을 가능성이 커진다.

홍콩의 마지막 영국 총독을 마치고, 유럽연합(EU)의 대외관계 담당 집행위원을 맡고 있는 크리스 패튼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대해 이렇게 걱정했다. “미국은 아주 위험한 본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이 군사력에 의존, 대외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우방을 선택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미국의 세계 헤게머니 장악은 두단계를 걸쳐 전개된다.

첫째 시기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영국이 쇠약해지고, 미국이 서방세계에 제1의 강국으로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구권과 대치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 소련이 공산주의 실험을 거치고, 2차 대전후 유럽이 약화된 틈을 타서 동유럽과 중국, 북한, 베트남으로 세력을 확대해갔다. 서방세계의 강자 미국은 공산주의 강자 미국과 세계 분할을 위해 치열할 각축전을 펼치게 된다.

두번째 시기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공산권이 와해되고, 미국이 이른바 세계 유일의 슈퍼파워로 등장하는 시기이다. 20세기 마지막 10년동안 향유한 미국의 절대적 우위는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그 초입에 당한 9·11 테러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1990년대 10년간의 미국은 부드러운 수퍼파워라면, 테러 이후의 미국은 성난 수퍼파워’, 또는 강경한 수퍼파워라고 규정할수 있다.

미국은 세계 지배를 위해 21세기초에 전세계 600여개 기지에 20만 가까운 미국을 주둔시켰다. 주요 병력 배치를 보면, 유럽에 10, 중동지역에 25,000, 한국에 37,000, 일본에 2만명 등이다. 대영제국이 전성기인 19세기말에 55개 대대, 4만명의 군대로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을 유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군사력을 배치하고, 군비를 지출했다.

 

대영제국의 판도 /위키피디아
대영제국의 판도 /위키피디아

 

미국의 세계 지배는 2천년 전의 로마 제국보다는 2백년 전에 미국을 건너온 초기 이민자들의 조상인 대영제국의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의 제국주의 속성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보다는 대영 제국의 그것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영국에 의한 세계 평화, 즉 팍스 브리태니카(Pax Britannica)18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200년을 지속했다.

대영 제국이 대규모 전함대를 구축, 5대양 6대주의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 것은 바로 경제적 이유였다.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에 의하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형태다. 레닌은 제국주의가 독점자본과 금융자본의 결과물임을 입증했다. 그의 이론 자체는 당시 유럽 제국주의를 설명하는데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대영 제국은 프랑스나 독일, 오스트리아 제국보다 앞서 산업혁명에 성공했고, 산업 자본이 독점화하는 과정에서 제국주의를 강화했다. 자본주의 실험에 성공한 영국은 무역 자유주의, 해양 자유주의를 주창한다. 전세계 바다를 장악한 영국은 무역을 통해 값싼 원료와 자원을 들여와 본국의 공산품을 해외에 팔았다. 영국의 로이드 보험은 영국 상선대와 무역을 뒷바침하는 당대 최대의 금융회사였고, 런던의 금융가(the City of London)는 오늘날 뉴욕 월가처럼 세계 금융의 중심지였다. 로이터 통신은 전세계 교역 자료와 각국간 환율 변동, 금값 동향, 항해 일지를 영어로 서비스했고, 로이터의 정보가 곧 세계 뉴스였다. 런던 금융시장에선 전세계의 석탄, 선박, 보험, 금화가 거래됐고, 영국은 전세계 무역 거래의 선두주자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영국은 미국이 독립한 후에도 미국 서부철도 건설, 아프리카의 금 채굴, 아르헨티나의 팜파 초원 개척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했다.

오늘날 말하는 세계화또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은 해양 제국 영국이 이룩한 것이다.

로마 제국은 피점령지에서 각종 재화와 사람을 획득하는 착취적 노예제국가였다. 로마는 교역을 위해 군사력을 동원한 적이 없다. 로마군이 카르타고를 불태워버린 것은 그들이 원한 것이 노예였지, 농경지나 상거래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대영 제국은 중상주의 국가였다. 영국이 원한 것은 교역 상대였고, 이를 위해 때론 무력을 동원해 상선대 보호를 위해 전세계 항해 요지에 등대를 설치하고, 대양 거점에 군대를 파견했다.

대영 제국은 아주 효율적인 제국주의를 유지했다. 영국군은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1차 세계 대전과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1899~1902) 때에도 15만명을 넘지 않았고, 그것도 해외주둔 군대가 4만명에 불과했다. 지금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력만큼으로 영국은 세계를 지배한 것이다. 그 비결은 점령과 지배를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영국은 상선대 보호를 위해 지브롤터, 몰타, 수에즈, 포클랜드, 키프러스, 싱가포르, 홍콩, 케이프타운 등 전세계 대양에 점점이 작은 영국 해군 주둔지를 조성했지만,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은 가급적 피했다. 점령과 지배는 엄청난 군사력과 비용이 필요하고, 로마가 망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영국의 제국주의화 시기는 학자들에 따라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영국군이 미국 독립군에 의해 버지니아주 요크타운에서 물러나던 1781년 이후부터라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이전까지 영국은 세계를 지배하기보다는 유럽의 여러 제국과 각축전을 벌어던 단계였고, 미국을 잃고난후부터 영국은 본격적인 제국주의 길을 갔다. 이전까지 영국은 동인도 회사, 허드슨만 회사 등 식민 회사를 통해 해외 식민사업에 주력했고, 영국의 하류층을 형성했던 종교적 이단자, 부랑자, 빈민이 이주해간 해외 거주지역을 물리적으로 통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다.

미국 동부 13개주를 잃고부터 영국은 본격적으로 영국해군(Royal Navy)’을 강화했다. 대영 제국은 해외 영국 상선대, 자본이 가차없이 막강한 해군을 동원했다. 그리스에서 영국 상인의 창고가 불탔을 때 영국 해군은 그리스 항구를 가차없이 포격하고, 그리스 정부로부터 사과와 대가를 받아냈다. 로마인이 제국 내에서 자유인이듯, 영국인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유인이었고, 그것을 전세계에 깔려있는 영국 함대가 뒷받침했다.

1876년 이집트가 영국의 빚을 갚지 않자 군대를 보내 채무이행 조약을 체결하고, 수에즈 운하 건설 및 운영권을 획득했다. 대영제국의 세계지배는 가급적 점령과 지배를 피하고, 현지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선호했다. 영국은 이집트 왕조와 내각, 군대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이집트 왕정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내륙에 뚜렷한 정부가 없는 곳에는 총독을 보내 직접 통치했다.

영국이 전쟁을 일으켜 직접 통치한 곳은 남아프리카와 인도다. 두 곳에는 현지 주민으로 세포이(sepoy) 군대를 조직했는데, 이 인원이 로마 제국의 군대 수를 웃도는 35만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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