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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이야기
대수층까지 지하에 물길을 뚫어…이란, 아프가니스탄, 중국 신장 등에서 활용
[물과 문명] 사막지대의 생명선, 지하수로 카나트
2019. 04. 03 by 아틀라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고대문명을 일군 아시리아(Assyria) 인들은 도시의 음용수를 얻는 방식으로 카나트(Qanat)라는 돌파구를 개척했다. 카나트는 터키 동쪽에서 이란 북서쪽의 산악지역에서 기원해 오늘날까지 이란은 물론 중동국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중국,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사용되고 있다. 로마인들도 그들이 정복한 나라에 카나트를 설치했다. 스페인과 모로코에서도 카나트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훗날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멕시코에서도 카나트를 전파했다.

카나트는 산의 지하 대수층까지 뚫은 길고 깊은 지하 터널을 말한다. 이 지하수로는 중력을 이용해 저지대의 인구밀집지역으로 물을 보낼수 있다. 지하에 설치되어 있으므로, 물이 증발될 위험이 없다. 사막 지형에서는 고온으로 인한 물의 증발이 가장 큰 문제이므로 지하에 수로를 뚫었다.

 

카나트의 원리 /위키피디아
카나트의 원리 /위키피디아

 

카나트는 이란 고원이나 중국 투르판과 같은 고온 건조한 지역에 고대부터 만들어졌다. 이란에서는 카나트라고 부르고, 일부 지역에서는 카리즈 또는 카레즈 등으로 불린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카나트는 이란 동부 산악지대에 있는 고나바드(Gonabad)라는 카나트인데, BC 700~50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총길이 33km427개의 우물이 뚤려져 있다. 이 카나트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나바드 카나트는 2700년이 지난 지금도 4만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농업용수와 식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주요 우물은 깊이가 360m 이상이며, 그 길이만 해도 45km에 이른다. 야즈드, 코락산, 케르만 등의 도시가 이 카나트를 사용한다.

이란 고원지역에선 5분의4 정도가 카나트 방식으로 물을 공급받는다. 현대에 이란에서 만들어지는 카나트는 옛날이 것보다 효율이 훨씬 떨어진다. 카나트를 만드는 노하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대의 기술력은 지하를 뚫어 우물을 파는 방식이므로 그 장점이 많이 퇴색되어 버렸다.

 

이란 고나바드 카라트 /위키피디아
이란 고나바드 카라트 /위키피디아

 

고고학자들은 카나트가 BC 1000년 이전, 멀리는 BC 3000년부터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하에 수로를 뚫기 위해서는 철제도구는 물론 정교한 채굴과 공학적 능력이 필요했다. 경사도를 정확하게 측정해야 했고, 중간에 접근로를 만들기 위해 수직통로를 뚫는 기술이 요구되었다.

고대 아시리아인들은 카나트의 깊은 우물에서 많은 물을 긷기 위해 도르래를 이용한 양수기술을 개발했다.

파키스탄에서도 북서쪽의 발로치스탄과 차가이 지역에서 카나트(현지어로 카레즈)를 널리 볼 수 있다.

인도 카나타카에는 수랑가라고 불리는 지하로 물을 대는 카나트 구조의 관계수로가 있다.

중국의 북서쪽 사막에 위치한 투루판의 오아시스는 카나트에서 공급하는 물을 오랫동안 사용해 왔다. 투루판은 오래된 비옥한 오아시스의 중심지였으며, 실크로드 북로에 위치한 중요한 무역도시였기 때문에 카나트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었다. 이 시스템의 첫 사료의 기록은 한()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에서 카레즈 관계 시스템의 수는 1,000개에 육박하며, 전체 길이는 5,000km에 이르는 엄청난 대공사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카나트를 카리즈라고 부르며, 수백 년을 사용해 왔다. 카리즈 구조물은 남부의 칸다하르, 우루즈간, 님로즈, 힐만드 등지에서 발견된다. 최근 극심한 내전으로 수많은 고대유적들이 파괴되었다.

 

중국 신장 투루판 카레즈 물박물관의 모형 /위키피디아
중국 신장 투루판 카레즈 물박물관의 모형 /위키피디아

 

지하의 물길을 활용한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BC 701년에 아시리아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장기간 포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아시리아의 포위를 이겨냈다.

바로 기혼샘(Gihon Spring) 덕분이다. 예루살렘의 수원지는 성벽 바깥에 있는 기혼샘이었다. 유대인 이전에 이곳을 지배했던 여부스인들이 이 샘까지 360m에 이르는 지하 비밀터널을 파두었다. 유대인들이 여부스인들을 몰아낼 때 이 터널의 소재를 파악하고 터널을 통해 시내로 들어와 기습공격해 예루살렘을 장악했다.

다윗의 후계자 솔로몬왕은 왕국을 건설하는 방책의 하나로 밋물을 모아두는 탱크를 설치하도록 했다. 이어 그 후대 왕들은 예루살렘 아래로 새 지하비밀터널을 뚫도록 했다. 깎아지르는듯한 암반에 정확한 경사로 550mS자형 터널을 파 중단 없이 물을 공급받은 결과로 아시리아의 포위망을 견딜수 있었던 것이다. 아시리아 군대는 기혼샘과 비밀터널을 끝내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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