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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단성 있는 조치…1980년대 S&L 정리 이어 대형은행 파산·매각처리
美 금융파워②…1990년대 뼈를 깎는 구조조정
2019. 11. 14 by 김현민 기자

 

1991년초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 은행(Bank of New England)이 막대한 부실 채권으로 부도 직전에 몰렸다. 은행 파산으로 예금한 돈이 날아갈 것을 두려워한 예금주들이 은행 창구로 몰려들었다. 소액 예금주들은 지갑과 큰 종이봉투를 들고 은행 로비에 줄줄이 기다렸고, 수백만 달러를 움직이는 대규모 예금주들은 컴퓨터 온라인망과 텔렉스를 통해 예금을 빼돌렸다. 이른바 예금인출 사태(bank run)가 빚어졌다. 뉴잉글랜드 은행의 예금은 이틀만에 10억 달러나 빠져나갔다. 연방 수사국(FBI)은 혼란을 틈타 은행을 털려는 무장 강도의 음모를 적발했다는 무시무시한 발표를 했다.

미국의 은행 구조조정은 엄청난 소란과 반발 속에 진행됐다. 뉴잉글랜드 은행이 파산 상태에 빠지자, 금융감독 기관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타이밍을 기다렸다. FDIC는 일요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은행을 전격 폐쇄하고(close), 예금주의 예금을 보호한다고 발표했다. 연방 금융당국이 개입하자, 예금인출 사태는 진정되고, 뉴잉글랜드 은행은 파산 절차를 밟아나갔다.

고객들 사이에선 연방 정부가 혹시 예금을 제대로 갚아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의 목소리도 있었으나, 미국의 예금보험제도는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우려는 곧 잠잠해졌다. 대형 은행 파산에 따른 패닉 현상은 진정됐다. 연방 정부가 10만 달러 이하의 예금에 대해서는 지급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에 일부 기업인등 대형 예금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개인 예금자는 예금보호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금융산업에 있어서 한 은행이 지급불능상태에 빠지면 다른 은행에도 그 여파가 확산돼, 금융 시스템 전체가 위기로 치달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1980년대에 이런 현상을 경험했다. 부실 여신으로 허덕이던 저축대부조합(S&L:Savings & Loans Association) 정리 사건이다. 1990년대에 미국 경제가 장기호황을 누린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장점이기 앞서, 부실 금융기관을 대대적으로 정리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1997년 하반기 이후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이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일제히 금융개혁을 단행했다. 미국과 IMF는 아시아 국가에 1980년대 미국이 경험한 금융기관 정리의 과정을 권고, 솔직하게 표현하면 강요했다. 그러면 미국은 어떤 과정을 거쳤기에 자신들의 경험을 요구했던 것일까.

 

1980년대 들어서자 미국 금융산업은 부실 여신이 누적되면서 동맥경화현상에 빠졌다. 1980년에서 1994년까지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의 관리를 받는 금융기관중 1,600개가 문을 닫거나 금융감독당국의 지원금을 받았다. 당시 은행 폐업은 1929년 대공황 때보다 숫적으로도 많았고, 규모도 컸다. 미국 최대은행인 시티은행이 부실에 허덕이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의 도움으로 회생한 것은 당시 미국 금융계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설명한다.

연방 정부는 부실 은행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미국 경제의 경쟁력을 살리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 자동차 산업은 일제 자동차의 공격에 무너져 내렸고, 미국의 자존심이라던 컬럼비아 영화사와 뉴욕의 록펠러 센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일본에 팔려갔다. 일본과 독일이 국채를 사주었기 때문에 연방정부는 재정적자를 근근히 메울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시중은행이 흔들리자 레이건 행정부는 동정론을 폈다. 어느 정부나 악역을 하기 싫어한다. 미국의 연방 은행법에는 부실 은행에 대해 원칙적으로 부보된 예금에 한해 지급보험금 이상의 정부부담을 활용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19845월 미국 내 8위 은행인 컨티넨탈 일리노이 은행이 지급불능(부도) 상태에 이르자, 레이건 정부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시중은행이 무너지면 금융시스템 전체가 흔들릴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중앙은행인 연준(Fed)FDIC를 통해 대규모 구제금융을 지원했다.

그러나 정부의 구제금융은 부실 은행의 목숨을 연장시켰을뿐, 금융시스템의 중병은 오히려 악화되기만 했다. 게다가 일리노이 은행에 대한 정부의 구제금융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 다름 아닌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였다. 금융당국의 변칙 구제금융은 대형은행은 도산하지 않는다는 기대를 확산시켰다. 미국판 대마불사(大馬不死)’론이다. 즉 은행이 부실해지면 정부가 구제금융을 줄 것이므로, 부실 여신을 확대해도 된다는 심리가 은행업계에 확산됐고, 은행의 자율적인 규제기능이 약화됐다. 은행의 경영자, 주주들도 대출의 안전성보다는 수익이 많은 리스크가 높은 대출을 선호하게 됐다.

미국 내에서도 여론이 바뀌기 시작했다. 부실 은행을 지원해주는 것은 도덕적 해이를 가중시키고, 금융산업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우려가 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다. 부실 금융기관 정리의 악역은 레이건 대통령에 이어 당선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맡았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레이건 대통령의 부실 금융시스템을 떠안고 19893월 임기를 시작했다. 의회 상원은 민주당이 장악해,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취임 3개월 후 이른바 허니문 기간이 끝나자마자 금융기관에 수술의 칼을 시퍼렇게 들이댔다. 부시 행정부는 1989금융기관 개혁, 구제 및 규제강화법(FIRREA)’에 이어 1991연방예금보험공사법(FDICIA)’을 제정했다. 그리고 부실 여신이 가장 많은 S&L에 대한 정리에 들어갔다.

부시 정부는 4,000개에 이르는 S&L을 실사했다. 그리고 S&L을 정리할 한시기구로 정리신탁공사(RTC : Resolution Trust Corporation)’를 신설했다. 이 조직은 199512월에 임무를 마치고 해체됐다.

은행 구조조정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원칙은 S&L을 비롯, 부실 금융기관을 폐쇄시키되 금융기관의 악성 여신을 정부가 사주는 것이었다. 부실 금융기관을 다른 금융기관에 넘기기보다는 아예 퇴출시키되 부채는 정부가 떠 안았다. 한국이 외환위기 대응 과정에서 동화, 대동은행등 5개 시중은행을 퇴출시키면서 채택한 P&A(자산 및 부채 인수) 방식과는 크게 다르다.

레이건 행정부때 구제금융을 받은 컨티넨털 일리노이 은행, 퍼스트 리퍼블릭 은행, 뉴잉글랜드 은행등 대형 시중은행들도 부시 행정부에 들어와선 파산을 선고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폐쇄시켰다.

부시 행정부는 금융감독기관인 FDIC를 통해 수술의 칼을 들이댔다. 당시 FDIC4대 원칙은 부담해야 할 정리 비용의 규모 금융시스템에 미치는 영향 시장 규율(market discipline)에 미치는 영향 공평성 및 일관성의 유지 등이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리비용이었다. 정리비용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정리비용이 과중할 경우 다른 원칙을 기준으로 정리할 은행과 구제할 은행의 기준을 정했다.

그 결과 FDIC1980~94년중 부실 은행 1,559건을 정리했다. 이중 76.1%1,186건은 매각했고, 11.2%174건은 부보 예금 양도방식으로, 7.8%122건은 청산 방식으로 각각 정리했다. 구제금융을 지원, 살려낸 부실 은행은 76(4.9%)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부실 은행의 부동산과 다른 재산을 상대적으로 빨리 매각할수록 더 좋다고 주장했지만, 부실 자산 정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방 정부가 S&L 정리를 위해 1,560억 달러의 재원을 조달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

정리를 맡은 RTC는 도산한 747S&L의 장부가 4,340억 달러의 자산을 처리했다. RTC는 기본적으로 S&L의 부실 자산을 장부에서 제거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빈 사무용 빌딩, 여행객 없는 레조트 시설, 사용하지 않는 쇼핑센터, 정크본드등 부실 자산은 6년에 걸쳐 매각됐다. RTC는 최대의 부동산 소유자가 됐지만, 장부가 이하로 매각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세금을 동원했다.

시중은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퍼스트 트러스트 뱅크는 1995년 금융 당국에 의해 폐쇄가 결정됐다. FDIC는 이 은행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인수를 원하는 은행들을 모아 입찰을 실시, 처리 비용을 낮추는 방법을 선택했다.

19911월에 폐쇄한 뉴잉글랜드 은행은 FDIC가교은행(bridge bank)’을 설치, 폐쇄된 다음 3개월 후에 플릿-노스타 그룹에 매각했다. 연방 정부는 인수자가 부실 채권 인수에 따른 손실을 3년간 부담해 주었다.

FDIC의 부실 은행 퇴출은 철저한 보안을 유지한 가운데 영업이 끝난 금요일 오후에 단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은행 퇴출에 따른 예금인출과 행원들의 저항등 소요사태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FDIC 로고 /위키피디아
미국 FDIC 로고 /위키피디아

 

P&A 방식에 의해 인수되는 은행의 퇴출은 군사작전과 같이 전격적으로 전개됐다. 인수 작전팀은 금요일 일찍 비밀리에 퇴출 은행의 주변에 도착해 진을 치고 기다린다. 영업시간 종료 15분전에 탐색조 일부가 피인수 은행에 비밀리에 잠입한다. 인수팀 전원이 퇴출 은행의 전산망, 금고, 은행장실 또는 지점장실등 요지를 점령할 무렵 FDIC는 퇴출 경영진에게 퇴출 사실을 통보하고, 언론에 발표한다.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일요일을 거쳐 인수팀은 밤샘작업을 하면서 업무를 완전히 파악, 인수작업을 완료한다. 월요일부터 정상영업에 들어가 고객에 대한 후속조치를 실시한다. 그러나 뉴잉글랜드 은행의 경우와 같이 퇴출 사실이 미리 새나가 아수라장이 벌어진 경우도 있다.

은행 폐쇄과정에서 도덕적 해이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됐다. 물론 연방정부가 금융기관의 부실 자산을 장부가 이하로 후려쳐 정리했지만, 국민의 세금을 동원했으므로 부실 은행의 경영자에겐 도덕적 책임을 지웠다.

부시 정부는 이 도덕적 해이문제를 금융기관과 부실 기업의 경영자에게 전가했다. 연방정부는 S&L 구제 당시 핵심인물이었던 찰스 키팅 2세를 기소했고, 그는 4년반의 형을 살았다. 29898월이후 2995년까지 2,331명이 기소됐고, 이중 2085명이 실형을 살았다. 재산을 추징한 건수가 1,657, 그 금액은 6억 달러에 이르렀다.

미국에서도 은행가와 기업주가 은행과 회사는 망해도 은행가와 기업주는 산다는 신화가 있었다. 그러나 금융 구조조정 과정에서 그런 신화는 여지 없이 무너져야 했다. 세금을 낸 시민들은 죄질이 나쁜 은행가와 기업인이 감옥에 갔기 때문에 자신들의 세금이 금융 시스템 복원에 사용됐다는데서 만족을 느꼈다.

미국 은행들은 당시 국내의 부실 채권만 많은 게 아니었다.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등 제3세계에 많은 차관을 빌려 주었지만 받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당시 니콜라스 브래디(Nicholas Brady) 재무장관은 꾀를 냈다. 미국 은행이 중남미 국가에 빌려준 차관을 연방 정부가 지급보증 해주는 조건으로 국제시장에서 채권으로 전환한다는 방안이었다. 이른바 브래디 본드(Brady Bond)’였다. 막대한 무역흑자를 내고 있던 일본과 독일이 브래디 본드를 사주었고, 미국 정부는 돈 한푼 안들이고 중남미에 물린 미국 은행들의 부실 차관을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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