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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헤센 영주의 어용상인으로 출발…‘화살 다섯’ 교훈으로 가족 유대 강조
로스차일드의 비밀①…다섯 아들이 가장 큰 재산
2019. 11. 18 by 김현민 기자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19세기와 20세기 전반기에 유럽의 금융을 쥐고 흔들던 유대인 가문이다. 독일,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가 국가주의에 함몰해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 그들은 국제주의를 지향해 거대한 금융재벌을 일궜고, 그들의 지원이 없으면 어느 국가도 전쟁이 이길수 없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독일 나치의 주요 타깃이 되어 곤욕을 치른 반면에 오늘날 이스라엘을 건국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후대에 들어가면서 선대의 공격적 날카로움이 무뎌진데다 2차 대전 때에 큰 피해를 입었고, 현대적 대중금융에 적응하지 못했다. 오늘날 가문은 과거의 비밀스러움이 오히려 각종 음모론의 주인공으로 지목되고 있을뿐, 글로벌 금융시장의 영향력은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편집자주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공동묘지의 한 분묘에 이작 엘하난 로트실트(Izaak Elchanan Rothschild), 1585년 사망이라는 비명(碑銘)에서 시작된다. 독일어로 붉은 방패’(rothen Schild)라는 의미로, 이 집안은 빨간색 방패를 가문의 문장(紋章)으로 사용했다.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구속력 없는 연방체제에 235개 공국과 공작령, 51개의 자유시로 분열해 있었고, 각자가 사실상 독립 국가를 운영하고 있었다. 독일 전역에서 반유대주의가 강력하게 유지되어 유대인들은 게토(geto)라는 분리된 지역에 갇혀 살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특히 심해 게토 주민은 허가를 받지 않고 시내에 들어갈 수 없고, 유대인 주부는 상점에서 물건을 살수 없고 아이들은 길가에 놀수 없었다. 1750년에 3천명의 유대인이 게토의 2백채 집에 가축 우리에 갇히듯 살고 있었다. 토지는 소유할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유대인들이 할수 있는 것은 상업 밖에 없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 /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 /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 금융그룹의 창업자는 이작 엘하난의 후손 가운데 마이어 암셸(Mayer Amschel Rothschild, 1744~1812)이라는 사람이다.

마이어의 아버지는 암셸 모제스(Amschel Moses Rothschild), 1750년대에 환전상을 했다. 모제스는 하노버에서 은행업을 하는 유대인 오펜하이머 가문에게 접근해 그 은행업의 일부를 맡게 되었다. 모제스는 결혼해 장남 마이어 암셸을 낳았다.

마이어 암셸 /위키피디아
마이어 암셸 /위키피디아

 

마이어는 아버지의 지시로 집에서 2km 떨어진 곳에 있는 랍비양성학교에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독실한 유대교도가 되었으나, 중도에 학업을 그만두었다.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 가족의 생계를 돌보아야 하는데다 어쩐지 성직자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이어는 부친과 인연이 있는 하노버 오펜하이머 가문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금융업을 공부했다. 그는 오펜하이머에서 6년간 근무하면서 세상에 눈을 떴다. 귀족과 부호의 돈줄을 잡아야 한다는 것, 귀족들의 취미와 생활, 사고방식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당시 유럽의 귀족들은 예술작품이든, 골동품을 수집해 자신의 명성을 과시했다. 마이어는 옛 화폐에 관심을 가지고 나름 전문적 식견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1764년 고향인 프랑크푸르트의 게토로 돌아와 아버지의 가업인 환전상을 이어 나갔다. 마이어는 귀향해서도 옛화폐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환전소를 운영하면서 번 돈으로 옛화폐를 수집해 카탈로그를 만들었다.

기회는 우연하게 왔다. 하노버에 있을 때 폰 에스토르프 장군의 심부름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장군이 프랑크푸르트 인근 하나우 성에 머물고 있었다. 마이어가 찾아갔더니 에스토르프 장군은 그를 알아보았다. 마이어는 귀족들이 옛화폐와 골동품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서 장군에게 자신의 수집품들을 설명했다. 장군은 그의 해박한 지식에 경탄하고 그가 수집하는 옛화폐와 골동품을 샀고, 귀족들에게도 마이어의 옛 화폐를 소개했다.

옛 화폐로 인한 인연은 헤센 하나우가의 빌헬름(Wilhelm) 공으로 연결되었다. 빌헬름 공의 어머니는 영국 조지 2세의 딸 메리 공주로, 그의 집안은 독일 내에서 영향력 있는 영주 가문이었다. 당시 헤센의 주요산업은 군대였다. 역대 헤센 영주는 용병부대를 양성해 영국 프로이센 스웨덴 등에 투입해 돈을 받았고 용병이 죽을 때마다 머리수를 계산해 특별위로금을 챙겼다. 헤센은 죽음을 팔아 돈을 벌었고, 그 돈을 다른 정부에 빌려주고 고리대를 뜯었다. 빌헬름은 독일의 다른 영주들에 비해 많은 재산을 불렸다.

 

헤센의 빌헬름공 /위키피디아
헤센의 빌헬름공 /위키피디아

 

마이어는 당대 독일 최대부자이자 헤센의 후계자인 빌헬름과의 접촉에 많은 공을 들였다. 자신이 수집한 진기한 물건을 세세히 정리하고, 카탈로그를 귀족들에게 보냈다. 소소한 장사는 동생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권력자와 부유층을 만나러 다녔다. 조금씩 계약이 맺어졌다.

그는 단골고객으로 만든 투른탁시스 집안의 우편조직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투른탁시스 가문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여러 곳에 사무소를 두고 속달우편을 재빠르게 배달하는 업무를 하고 있었다. 그 집안의 업무는 험한 길과 강물을 건너, 산적의 위험을 무릅쓰고 황제국과 공국들 사이에 우편물과 상품을 재빠르게 전달했는데, 그 사업이 여러 권력자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마이어는 이 우편물 사업을 보고 빠른 정보가 부()를 낳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아들들에게 가르치게 된다.

 

25세가 되던 1769, 마이어는 빌헬름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소인 로트실트에게 하명해 주신다면 언제든 높으신 영주님께 즐거움이 되도록 모든 힘과 자금을 바치겠습니다. 영주님께서 궁정어용상인으로 임명하심을 베풀어준다면 저는 그 일에 온갖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그해 9, 헤센 영주는 마이어에게 궁정어용상인(Court Factor)으로 임명했다.

궁정어용상인은 특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명예직에 불과한 지리였지만, 높디 높은 게르만 영주와 거래의 문이 열렸다는데서 마이어는 흥분했다. 그는 곧이어 좋아하던 여인 구틀레(Guttle Schnapper)의 아버지에게서 결혼 승낙을 얻었다.

 

결혼 후 마이어의 가장 큰 자산은 자식이었다. 부부는 결혼후 22년 동안에 16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중 여섯 명은 일찍 죽고 아들 다섯, 딸 여섯 등 도합 열 명의 자녀가 살아 남았다.

프랑크푸르트 게토의 로스차일드 집 /위키피디아
프랑크푸르트 게토의 로스차일드 집 /위키피디아

 

마이어는 사업과 상속에 대원칙을 정했다. 아들은 사업에 참여하고 유산을 물려받되, 딸들은 지참금을 주어 시집보낸 후에 사업에 간여하거나 상속을 받지 못하게 했다. 사위도 일절 사업에 가담하거나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다.

아들 순으로 보면, 장남 암셸 마이어(Amschel Mayer)에 이어 둘째 살로만 마이어(Salomon Mayer), 셋째 나탄 마이어(Nathan Mayer), 넷째 카를 마이어(Carl Mayer), 막내 야콥 마이어(Jacob Mayer). 후에 넷째 카를은 칼만(Calmann) , 다섯째 야콥은 제임스(James)로 이름을 바꾼다.

 

여기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다섯 개 화살의 전설이 나온다. 아버지 마이어는 아들들에게 카스피해 동부지역에 강력한 국가를 형성했던 스키타이의 어느 왕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스키타이 왕은 임종을 맞아 자식들을 불러 놓고 화살 하나씩 꺾어보라고 했다. 모두들 화살을 꺾었다. 이번에는 다섯 개 화살을 묵은 다발을 내밀면서 한사람씩 꺾어 보라고 했다. 아무도 꺽지 못했다. 왕은 너희들이 결속해 있는 한 그 힘은 강력할 것이다. 그러나 흩어지면 그 번영은 끝난다.”고 말하고 세상을 하직했다.“

이 교훈은 로스차일드 후손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되었고, 다섯 개 화살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에도 새겨져 대대손손 내려갔다.

 

마이어는 아들이 성장하는대로 가업에 종사시켰다. 만일 그에게 다섯 아들이 없었더라면 독일 한 영주의 이름없는 어용상인에 그쳤고, 그의 사업은 흔적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마이어는 자신이 피땀 흘려 배운 장사의 기술을 가르쳤고, 수확한 이득을 아들들에게 나눠줘 사업 씨자금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아내 구텔레의 뱃속에서 나온 다섯명의 아들들은 두려움 없이 진군하는 장군처럼 유럽을 진격했다. 큰아들 암셸은 프랑크푸르트에 남고, 둘째 살로만은 오스트리아 빈으로, 셋째 나탄은 영국 런던으로, 넷째 칼만은 이탈리아 나폴리로, 막내 제임스는 프랑스 파리로 가서 은행을 세웠다.

유럽 열강의 금융이 마이어의 다섯 아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프랑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제패하려다 실패했고, 독일 호엔쫄레른 왕가도 유럽 정복에 좌절했지만, 프랑크족도 게르만족도 아닌 미천한 유대인의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황제로 유럽을 200년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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