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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 금융자본 요구로 자본시장 자유화 강요…김영삼 정부, 수용
美 금융파워⑥…월가 자본의 해외 공략
2019. 11. 19 by 김현민 기자

 

19916,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1년반 정도 남은 시기의 일이다.

뉴욕 월가 한 호텔 프라이빗 룸에는 미국 금융가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북적거렸다. 그들은 빌 클린턴이라는 촌뜨기를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미국에서도 아칸소주는 농사만 짓는 시골로 알려져 있다. 주지사 클린턴은 으리으리한 월가의 거물들 앞에 처음으로 섰다. 그들의 눈에 이 시골뜨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치자금이라곤 국물도 없다. 어느 나라에서건 아무리 유능한 후보라도 정치자금이 없으면 선거에 출마조차 하지 못한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가 더 많은 정치자금을 모금했는지 여부가 선거의 당락에 크게 영향을 준다.

라운드 테이블에 스테이크 요리가 식탁에 올라오고, 그 주변에 둘러 앉은 월가 거장들이 클린턴의 말을 주시했다. 이런 모임은 클린턴 후보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월가 수뇌부는 모든 대통령 후보를 모아 놓고 그들의 정책 방향을 점검했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집권하면 월가 금융가에 이익이 되는 정책을 내놓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들은 말 주변이 좋은 클린턴을 몰아붙이며 질문을 퍼부어 댔다. 클린턴은 월가 고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파란색 나비 넥타이를 하고 자유무역시장 자유주의를 역설했다.

당시 참석자의 말에 따르면 그날 논의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민주당 정부가 구성되면 새로운 경제질서를 구축한다는 계획이었다. 모임에서 클린턴은 월가 사람들로부터 경제 교육을 받았는데, 이때부터 보호무역주의를 폐기하고, 아시아와 전 세계에 시장 개방 압력을 넣는다는 경제정책 원칙을 세우게 됐다는 게 그의 측근들의 얘기다.

이날 모임의 또 다른 중요한 포인트는 클린턴이 월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골드만삭스사의 로버트 루빈 회장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첫 만남은 냉랭했다. 그러나 월가의 수장격인 루빈은 곧바로 클린턴 지지로 마음을 먹었고, 클린턴 당선을 위해 정치자금 모금의 핵심 역할을 했다. 루빈은 1995년부터 99년까지 4년간 클린턴 행정부의 재무장관을 역임하면서 전세계에 미국 금융산업의 이익을 대변해 다른 어떤 재무 장관보다 강력한 수단을 동원하며 아시아와 전세계에 시장 개방 압력을 넣었다. 그는 멕시코 위기와 아시아 사태, 러시아 사태등 전세계 금융위기의 원인 제공자이자, 해결사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1993년 집권과 동시에 외국에 시장개방 압력을 넣었다. 민주당 정부는 물건이 오가는 교역의 자유화는 물론 돈이 오가는 금융시장 자유화를 동시에 강요했다.

초기 클린턴 정부의 시장 개방 압력은 나중에 아시아 위기를 불러일으킨 원인(遠因)이 되었다는 주장이 미국 행정부와 학계에서 제기되었다. 예컨대 태국, 브라질, 러시아와 같이 금융시장 구조가 취약한 나라가 개방을 할 경우 월가의 투기자금이 들어가 주식, 채권등 현지의 금융자산 가격을 하늘 높이 띄워 올린 후 어느 날 갑자기 빠져 나감으로써 경제를 붕괴시켰다는 주장이다.

클린턴 정권 초기에 연방정부 고위관료를 지냈던 사람들도 클린턴 정부가 금융시장과 자본 이동의 자유화를 지나치게 밀어붙였음을 인정했다. 시장을 개방한 나라들은 처음엔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해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지만, 결국 지나친 개방이 금융위기와 은행의 부실을 초래하게 됐다는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상무부 장관을 지냈던 미키 캔터(Mickey Kantor)씨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금융 자유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우리는 조금더 치밀하게 문제를 직시했어야 했다. 결국 기초를 세우지 않고 고층 건물을 짓도록 한 것과 다름없게 됐다.”

클린턴 행정부는 금융시장 자유화가 다른 나라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지지자였던 월가 은행들이 원했던 바였기 때문에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클린턴 정부에서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지냈던 로라 드앤드레아 타이슨(Laura D'Andrea Tyson)씨도 이점을 인정했다. “미국의 금융산업이 이 시장(해외 자본시장)에 들어가길 원했다. 나는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이 중소국가나 금융산업이 취약한 국가를 위협할 것임을 우려했다.”

클린턴 행정부 초기에 대통령 경제비서관을 지냈다가 나중에 세계은행 부총재를 역임한 조셉 스티글리츠씨도 금융시장 개방 요구를 완화하자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은 세계 금융시장 자유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추진했고, 미국은 이를 빌미로 삼아 한국의 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은 법률적, 제도적 여건이나 자본시장 현대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의 시장 개방 요구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금융위기를 겪게 됐다.

 

1993년 7월 10일 김염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만찬을 갖고 건배를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1993년 7월 10일 김염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만찬을 갖고 건배를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뉴욕타임스지는 1999215일부터 4회에 걸쳐 글로벌 전염이라는 주제로 국제금융시장의 문제점과 경제 위기를 진단하는 시리즈물을 게재한 적이 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미국의 시장 자유화 요구가 아시아 위기의 원인이 됐다고 주장, 주목을 끌었다.

당시 뉴욕타임스 시리즈물중 한국에 관한 대목을 옮겨보자. 1)

미국은 칠레에 대한 개방 압력이 미국 의회의 패스트 트랙(신속처리법안) 통과 반대로 무산된 직후 한국을 시장 자유화의 매력적인 대상으로 생각했다. 1996620일에 작성된 미 재무부 비망록에 한국은 미 재무부가 추구하는 시장 자유화 우선대상국에 포함되어 있다. 미국은 한국 시장을 열기 위해 OECD를 이용했으며, 미 재무부는 비망록에서 이들 지역(아시아)이 미국 금융산업의 이해가 걸린 곳이라고 밝혔다. 미 행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한국이 OECD에 가입하기 위해 당초 계획 이상으로 시장을 개방하기로 합의했으며, 한국 정부가 지나치게 빨리 시장을 개방하면 상당수 금융기관이 적응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은 미국과의 합의에 따라 채권 및 주식시장, 단기차관 도입을 개방했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들은 외국의 단기자본 시장에 접근함으로써 급작스런 자본 이탈이 있을 경우 패닉 상황에 처할 위험이 커져갔다.

한국은 장기 자본 시장을 묶어둔채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단기자본 시장을 개방하는 잘못을 행했다. 미국은 자본 이동 자유화를 진전시키는 내용을 IMF 강령으로 채택하도록 요구, IMF가 이를 들어주었다.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IMF 이사회는 967월에 금융시장을 개방한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환영한다고 밝혔다.”

 

자본시장 개방으로 아시아에는 막대한 자본이 흘러 들어가 번영을 구가했지만, 한꺼번에 빠져나갈 때 금융공황이 발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1) NYT, 1999216‘How U.S. Wooed Asia To Let Cash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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