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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금융시장에 뛰어들다…런던에 지점 설치, 오스트리아-덴마크와 거래 성사
로스차일드의 비밀②…돈이 되면 어디든 뛴다
2019. 11. 19 by 김현민 기자

 

1785년 독일의 소국 헤센에 권력 변화가 생겼다. 영주 프리드리히 2(Friedrich II)가 죽고 아들 빌헬름 공이 백작 자리를 이어받아 빌헬름 9(Wilhelm IX)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영주 자리에 올랐다.

새 영주 빌헬름 백작은 군대 장사와 영지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입을 대부분 채권거래에 투자했다. 당시 독일 금융가는 배트만 브러더스, 루펠 운트 하니에르 등 프랑크푸르트 기반의 대형은행들이 주류를 이뤘다. 영주 빌헬름은 로스차일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이어 로스차일드의 아들들은 몸으로 뛰었다. 그들은 대형은행들을 찾아가 억센 독일계 유대어인 이디시어로 인사를 했다. “성미 까다로운 빌헬름 백작과 당신 은행을 연결하는 중개인으로 저희들을 써 주십시오. 내세울 것은 없지만 저희에게 주문만 해주시면 언제라도 응할 수 있습니다.” 맨땅에 헤딩하기 식이다.

프랑크푸르트의 게르만족 대형은행들은 처음엔 유대인 촌뜨기들을 무시했지만, 그들이 열의를 가지고 덤벼드는 모습에 조금씩 마음을 움직였다. 이때 빌헬름 백작의 재무담당관 부데루스가 로스차일드의 아들들을 은밀히 후원했다. 마침내 대형은행들이 그들을 받아들여 적은 액수나마 채권을 맡겼다. 마침내 로스차일드는 헤센의 궁정어용 금융기관에 가입하게 되었고, 은행을 세우게 되었다. 장남 암셸은 빌헬름 백작의 저당 일을 맡았고, 차남 살로먼은 헤센의 수도 카셀에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다.

로스차일드의 아들들은 채권을 가지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어디라도 뛰어 다니며 팔았다. 그들은 에너지가 넘쳤다. 돈이 되는 곳은 어디에도 뛰어 다녔다. 금융업에 뛰어들면서 로스차일드의 수입은 급격하게 불어났다. 지난 20년동안 세금으로 낸 돈이 연평균 2천 굴렌이었는데, 1795년 두배로 늘어났고, 그 이듬해에 15천 굴렌으로 수직상승했다. 그 액수는 그들이 살고 있던 게토에서 최대금액이었다.

 

바야흐로 나폴레옹의 시대였다. 나폴레옹은 독일로 군대를 진군시켰고, 프로이센은 굴복하고 오스트리아만 프랑스에 대항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압박하기 위해 전 독일에 오스트리아와의 거래를 중단시켰다. 돈을 주체할 수 없었던 헤센의 빌헬름 영주는 프랑스 몰래 오스트리아와 돈 거래를 하려 했다. 대형은행들은 나폴레옹에 들켜 패가망신할 것을 걱정해 빌헬름의 제의를 거부했고, 유대은행인 로스차일드가 일을 떠맡았다. 그들은 비밀거래의 명수였다. 마이어의 아들들은 프랑스군의 눈길을 피해 알프스로 가 오스트리아와 채권 중계를 성사시켰다.

1799년 오스트리아 황제는 로스차일드 가문에 황실어용상인이라는 명예를 하사했다. 그리고 무기를 지닐수 있는 권리, 영내에서 자유로운 이동의 특권을 부여했다. 이제 로스차일드는 국제적 금융가로 변신했다.

 

로스차일드 가계도 /사진=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 가계도 /사진=위키피디아

 

보다 본격적인 국제금융은 셋째 아들 나탄(Nathan Mayer, 영어발음으로는 네이선)1798년 영국으로 건너가면서 시작되었다. 나탄의 영국 이주는 전기작가에 따라 아버지 마이어가 보냈다는 설과 스스로 영국을 동경해 건너갔다는 설이 있다. 여러 주장을 종합하면 후자에 가깝다. 나탄은 보수적이고 좁은 독일의 게토에서 사는 것을 답답해 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진행중이었고, 자유주의가 풍미했으며 유대인에 대한 거부감이 가장 약했던 곳이었다. 그는 아버지 마이어와의 편지에서 여러차례 다투었고, 아버지가 죽기 전에 단 한번 귀향했었다고 한다.

가족과의 갈등은 있었지만, 나탄은 아버지가 가르친 가족과의 단합이라는 원칙은 철저하게 따랐다. 나탄의 가출은 오히려 로스차일드가에 런던 지점을 확보하는 긍정적 효과롤 나타나게 되었다.

나탄의 영국행에는 매형인 베네딕트 보름스(Benedikt Worms)가 동행했다. 두 사람은 영국산 직물 수입에 손을 댔다. 나탄이 영국쪽 일을, 보름스는 독일쪽 일을 각각 분담했다. 이 때 나탄이 들고간 씨자금은 2만 파운드였다고 한다. 지금 돈으로 210만 파운드에 해당한다.

나탄은 영국 공업도시 맨체스터로 갔다. 유대인들의 단결력은 여기서도 보인다. 이제 막 입국한 나탄은 의욕만 앞섰지 영어도 서툰데다 거래처를 뚫을 방법이 없었다. 그런 나탄을 영국 유대공동체 지도자들이 따듯하게 맞아주고, 사업에 도움이 되는 거래선을 연결해 주었다.

나탄은 열심히 일하고 고객의 요구에 철저히 주의하는 상술을 발휘했다. 그는 빠르게 신용을 얻었다. 게다가 영국에선 독일에서처럼 유대인 억압도 없었고, 유대인 전통에 얽매일 필요도 없었다.

나탄은 철저하게 현금 위주의 영업을 했다. 당시 영국 직물업은 가내수공업이었다. 소공장들은 물건을 팔고 대금을 몇 달 후에 받았다. 그런데 나탄은 물건을 사고 현금을 그 자리에서 주었다. 자연스럽게 직물업자들은 값을 깎아 주었고, 그는 경쟁자들보다 저렴하게 물건을 팔수 있었다.

나탄은 현금이 부족할 때에 여러 은행에서도 돈을 빌렸고, 프랑크푸르트의 아버지에게서도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는 말을 잘듣지 않았던 아들이었지만 돈을 선뜻 대주었다. 2~3년 지나자 나탄의 영국 사업은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영국산, 인도산, 북미산 직물들을 사서 유럽 대륙에 팔았다.

그는 본가의 주력인 금융업에도 손을 댔다. 그는 대륙 어음에 수수료를 1%만 적용했는데, 당시 평균수수료율 1.5~2%보다 훨씬 낮은 수수료였다. 1800년으로 접어들면서 로스차일드가의 영국 자산은 크게 늘어났다.

 

프랑크푸르트에 남은 로스차일드 일가는 1804년에 덴마크에서 당대 게르만족의 대형은행들을 비밀전쟁을 치렀다. 대상은 헤센의 영주 빌헬름 9세의 네덜란드 대출 건이었다. 빌헬름 9세의 어머니는 영국 공주였고, 부인은 덴마크-스웨덴 왕국의 공주 빌헬미나 카롤리네(Wilhelmina Caroline)였다. 덴마크는 재정적자에 허덕였고, 사위인 빌헬름 공작은 돈이 남아도는 부자였다. 그렇다고 사위는 처가 나라에 돈을 빌려주어 소문이 나는 것을 싫어 했다. 배트만 브러더스, 루펠 운트 하니에르 등 대형은행은 믿을수 없었다.

그때 빌헬름 9세의 재무담당 부데루스가 마이어 로스차일드에게 백작의 어려운 사정을 귀뜸해 주었다. 마이어는 무슨 뜻인지 곧바로 알아들었다. 마이어 아들들이 마차에 올라타 코펜하겐으로 달려가 헤센과 덴마크 사이에 채권거래를 마무리했다.

처음에는 배트만 브러더스와 루펠 운트 하니에르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숨이 넘어가던 덴마크가 조용해지고 로스차일드 아들들이 어딘가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이상해 보였다. 그들은 덴마크 재무관리에게 물어보았더니 로스차일드라고 알려줬다.

두 은행은 격노했다. 어찌 기독교 국가들이 이교도들을 상대로 영업을 할수 있느냐고 성토했고, 헤센의 귀족들도 들고 일어났다. 유대인들의 책략에 넘어갔다는 비난도 쏟아졌다.

빌헬름은 긍정도 부정도 대답하지 않았다. 결과는 로스차일드의 승리였다. 빌헬름 백작은 로스차일드를 궁전의 최고어용상인으로 임명했고, 마이어의 첫째 아들 암셸과 둘쩨 살로만을 헤센 용병의 급여를 담당하는 대리인으로 삼았다.

그들은 유대인이었기에 게르만족이나 앵글로 색슨족, 프랑크족이 하지 못한 일을 할수 있었다. 국가나 종교에 기반을 둔 은행들은 국왕이나 영주들의 정치적, 종교적 성향에 따라 좌지우지되었지만, 유대 상인들은 그들이 꺼려하는 타국과의 거래를 비밀리에 수행하기에 적합했다. 오스트리아와, 덴마크와의 비밀 거래는 유대 은행이었기에 가능했다.

창업자 마이어와 다섯 아들이 로스차일드를 반석 위에 올려 놓았을 때 유럽은 대형 정치풍파에 시달린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영국을 겨냥해 대륙봉쇄령을 내린 것이다. 다른 은행들보다 국제화에 앞서 나갔던 로스차일드에겐 타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폴레옹 전쟁을 역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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