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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봉쇄령에 맞서 밀무역, 귀족들의 자산관리, 영국과 동맹국의 전비 마련 등
로스차일드의 비밀③…나폴레옹을 이기다
2019. 11. 20 by 김현민 기자

 

금융사업자는 일반적으로 전쟁을 싫어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주식과 채권 등 금융자산의 가격이 폭락하기 때문이다. 승전국에 투자해도 경제가 망가지므로, 불투명한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또 투자한 나라가 패전하면 모든 게 사라진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을 기회로 활용했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을 역이용해 영국과 대륙의 상품가격차를 활용하고, 도주하는 귀족들의 자산을 관리해주고, 영국의 전비 마련을 주선하면서 전쟁이 끝난 후 유럽 금융계의 강자로 부상했다. 로스차일드의 비판자들은 그들이 밀수를 하고 남의 돈을 횡령하고 전쟁 정보를 악용해 재산을 늘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의 포위망을 뚫고 하이리스크 사업을 펼쳤으며, 자본 위탁자들의 재산을 불려주었고, 연합국의 국채를 사들여 승전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유대인이건 반유대주의자건 전기작가들은 로스차일드가가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행한 활동을 과장되게 서술하지만, 그들은 남들이 하지 못하는 과감하고 탁월한 투자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무력으로 유럽을 제패하려던 나폴레옹의 야욕에 꺾고 로스차일드는 금융으로 유럽을 지배하게 되었다.

 

180610월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에게 패한 보복조치로 영국 상품을 유럽대륙에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영국은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물산이 풍부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봉쇄를 견뎌냈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싼 영국산 상품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물가가 올라갔다.

이미 영국에 진출한 마이어 로스차일드의 셋째 아들 나탄 마이어(Nathan Mayer)는 맨체스터 사무소를 폐쇄하고 런던에 사무소를 냈다. 그는 프랑스의 대륙봉쇄령을 역이용해 큰 이문을 남겨줄 사업을 구상했다. 싼 영국산 물건을 유럽 국가에 팔면 가뜩이나 물가가 오른 상태에서 높은 수익률을 낼수 있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불법이요 밀수이지만, 영국에서는 합법적인 장사였다.

나탄은 프랑크푸르트의 형제들에게 비밀 연락을 취해 영국산 물건을 대륙에서 파는 사업을 모색했다. 나폴레옹 황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나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장들을 고용했다. 해적의 나라 영국에는 그런 뱃사람들이 많았다. 위험의 댓가는 충분히 지불했다. 어쩌다 밀수 행위가 적발되면 뇌물을 써서 넘어 갔다. 전쟁 상황에 타락한 장교들이 많았다

프랑크푸르트의 형제들은 겉으로는 프랑스에 충성하는 척 하면서 영국의 나탄이 보내오는 물건을 반입해 팔았다. 영국산 면포, 식료품, 영국 식민지산 상품이 형제들의 비밀 루트를 통해 유럽 각국에 팔려나갔다. 그들은 물건들을 독일,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 프랑스 각지로 뿌렸고, 담배와 커피 설탕 염료 등을 비싸게 팔았다. 물건이 희귀했기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이었다. 당시 독일내 프랑스 괴뢰정부인 라인연방을 책임지고 있던 카를 폰 달베르크(Karl Theodor von Dalberg)공작도 로스차일드 형제들의 사업을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 달베르크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재정적 후원 관계에 있었다.

아무리 유럽 전 해안을 막아도 밀수품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자 프랑스는 봉쇄 4년만인 1810년에 교역 허가제로 전환했다.

 

1812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 영향권 /위키피디아
1812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 영향권 /위키피디아

 

1809년 나탄 마이어는 런던 금융지구 시티(City of London) 뉴코트 2번가에 사무실을 옮겼다. 1811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따 N.M. 로스차일드 형제상회(N M Rothschild & Sons)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프랑크푸르트의 법인과 달리 독자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기간에 나탄이 한 두 번째 사업은 부자들의 자산 신탁관리였다. 그 첫 번째 고객은 헤센의 영주 빌헬름 백작이었다. 빌헬름은 나폴레옹의 감시를 벗어나 처가인 덴마크와 헝가리 프라하를 오갔다. 백작은 나폴레옹이 점령한 자신의 영지에 감춰뒀던 재산을 불리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로스차일드의 창업자 마이어와 빌헬름 백작은 오랫동안 동반자 관계였다. 백작은 나폴레옹군이 몰려오자 재산을 마이어에게 맡기고 도주했다. 마이어는 프랑크푸르트 자택 지하에 백작의 채권 장부와 귀금속, 보석을 묻어두고 프랑스의 감시를 벗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작은 마이어 덕분에 자신의 장부와 보물들을 되찾을수 있었다. 또 로스차일드 아들들은 유럽 각국을 뛰어다니며 빌헬름 백작의 채권을 회수해 돌려주기도 했다. 물론 적당한 수수료는 챙겼다.

영국의 나탄이 빌헬름 백작의 재산을 관리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아버지 마이어도 백작을 설득했다. 재산관리에 민감한 빌헬름은 반신반의하며 나탄에게 15만 파운드씩 두차례에 걸쳐 모두 30만 파운드를 맡겼다. 일정의 수익률을 보장하는 조건이었다.

나탄은 이 돈을 영국 금융자산에 투자하기 앞서 자신이 먼저 굴렸다. 당대 런던 금융가에 나탄만큼 금융종목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빌헬름이 위탁한 돈으로 자신의 몫을 만들고 난 후에 영국 국채를 샀다. 빌헬름은 나폴레옹의 적이었으므로,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길 꺼렸고, 나탄이 제 돈처럼 투자를 하고 약속한 수익률을 보태서 돌려줬다. 여기서 나탄은 상당한 돈을 벌었다고 한다.

나탄이 빌헬름의 돈을 관리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독일의 소영주들은 영국으로 자금을 빼돌려 로스차일드 형제상회에 위탁했다.

 

이제 로스차일드의 중심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런던으로 옮겨졌다. 아버지 마이어는 노쇠해 움직이지 못했고, 프랑크푸르트의 형제들이 독일 귀족들의 자산을 모아 런던으로 보내면 나탄이 거래를 움직였다.

막내 제임스 마이어(James Mayer)는 프랑스를 들락거리다가 1810년부터 파리에 정착했다. 이제 로스차일드가는 프랑크푸르트, 런던, 파리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1812년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편성해 러시아 원정에 나섰으나 패하고 퇴각했다. 이 군대의 3분의2가 프랑스의 위성국가에서 징발되었는데, 막내 카를과 제임스가 징병 연령에 해당했다. 전기작가들에 따르면, 아버지가 아들의 병역면제를 받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썼다고 한다.

어쨌든 전쟁 막바지에 들어가면서 연합군 주축인 영국은 물론 동맹국인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전비가 바닥이 났다.

이때 또 로스차일드가 나섰다. 영국의 병참본부 책임자 존 찰스 해러스는 나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포르투갈에서는 영국의 웰링턴 공이 프랑스 서부전선을 공격하고 있었다. 웰링턴은 군자금이 부족했다. 전시에는 경화()만 통용되었다.

이 대목에서 과장된 전설이 만들어진다. 로스차일드 형제들은 프랑스 정부를 속여 금괴를 프랑스 해안으로 이송했고, 남프랑스를 지나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웰링턴 공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로스차일드 형제들이 영국정부의 군자금을 웰링턴 장군에게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비밀 루트에 대해선 아직도 밝혀진 게 없다.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된 스토리라는 견해가 많다. 어쨌든 웰링턴 장군은 로스차일드가 건네준 군자금으로 프랑스군을 스페인에서 내쫓고 나폴레옹의 몰락에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815년 워털루 전쟁에서의 영국 웰링턴 장군 (Alexander Hillingford 작) /위키피디아
1815년 워털루 전쟁에서의 영국 웰링턴 장군 (Alexander Hillingford 작) /위키피디아

 

18144월 나폴레옹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이탈리아 해안의 엘바섬으로 유배를 갔다. 나폴레옹의 위협이 사라지자 유럽 전역에 반동의 시대가 돌아왔다. 로스차일드가에 의지했던 귀족들은 유대인들을 멸시했다. 런던과 프랑크푸르트, 빈에서 혜성같이 나타난 로스차일드를 배척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반동의 혼란을 되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18153월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해 파리에 입성해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유럽에 다시 전운이 드리워졌다. 영국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로스차일드에 의지했다.

영국의 나탄 마이어는 반프랑스 전선에 뛰어들었다. 로스차일드는 자기 은행의 돈 뿐 아니라 여러 채널의 자금 조달을 통해 1815년 한해에 980만 파운드를 조성해 영국과 연합군의 군비를 지원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이 금액은 현재 가치로 87천만 달러에 해당하며,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100억 달러로 추정된다고 한다. 로스차일드 형제들은 모든 정보망을 활용해 전세를 파악해 각국 정부에 전달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815618일의 워털루 전투 승전소식이었다. 런던의 나탄이 로스차일드 정보망을 통해 승전소식을 알게 된 것은 영국정부의 정보망보다 하루 앞섰다고 한다. 나탄은 총리실에 승전 사실을 곧바로 알렸고, 총리는 긴가민가 하다가 하루 뒤인 21일 밤 11시에 육군본부의 보고를 듣고 확인했다고 한다.

여기서 또 로스차일드의 음모론이 나온다. 나탄은 로스차일드 정보를 가지고 증권거래소에 나가 영국 국채를 팔아 가격을 떨어뜨린 후 몰래 채권을 사서 하루 후에 전달된 정부 소식에 채권 가격이 채권가격이 상승하게 되어 엄청난 매매차익을 올렸다는 것이다.

실제의 이야기는 다르다. 나탄 마이어는 전쟁이 끝난후 영국의 재정상태가 호전될 것으로 보고 영국 국채를 시가보다 비싸게 대량으로 사서 2년후에 40%의 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나폴레옹 전쟁의 급류가 유럽을 휩쓸 때 로스차일드 가문에는 큰 슬품이 있었다. 창업자인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가 1812919일 세상을 떠났다. 장남 암셸과 넷째 카를만 임종을 지켰고, 세 아들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나이 68살이었다. 마이어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돈이 유대인을 구원하는 단 하나의 무기라는 것을 늘 명심하라.”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로스차일드는 큰 돈을 벌었고, 또한 2세의 시데를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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