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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후 국채 판매에서 출발해 사이버 혁명까지…거래속도는 초단위로 빨라져
美 금융파워⑪…진화하는 증권거래
2019. 11. 24 by 김현민 기자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 11번지 건물 주변에는 늘상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뉴욕 증권거래소(NYSE)를 구경하기 위해 외국에서, 그리고 미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이다. NYSE는 세계 최대 증권거래소로서 월가의 상징이자 뉴욕의 명물이다.

 

1906년 네덜란드 식민자들이 맨해튼섬을 발견, 남단에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고 모피 중계소를 세월을 때 그곳은 앨공퀸 인디언들이 사는 숲이었다. 식민자들은 인디언들에게 24 달러와 구슬 몇 개로 섬을 매입하고, 그들의 공격에 대비, 허둥지둥 담(Wall)을 만들었다. ‘월스트리트(Wall Street)’라는 이름이 여기서 생겨났다. 당시 월가 자리는 진흙 투성이의 더러운 길에 지나지 않았다.

월가는 상업 중심지로 출발했다. 유럽에서 수입된 모피, 담배가 이스트강에서 하역돼 월가에서 거래됐다. 상인들은 많은 이문을 남겼다. 그들은 보험회사를 차렸고, 부동산 매입에 나섰다. 그러나 증권거래는 미국 독립 이전까지 이뤄지지 못했다.

미국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1789년 월가의 페더럴 홀에서 역사적인 취임선서를 했다. 갓 태어난 미 연방정부는 독립 전쟁을 치르면서 발생한 비용을 채권 발행을 통해 충당키로 하고, 8,000만 달러의 국채를 월가에 내놓았다. 2년후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튼이 국립은행을 발족하면서 처음으로 은행주를 월가에 공개입찰에 부쳤다. 그때가지만 해도 주식이나 채권의 거래가 매도자와 매입자 사이에 1차 거래로만 이뤄졌을 뿐이다.

1792년 월가는 초호황을 구가했다. 돈을 많이 번 상인들은 길거리 좌판을 만들어 놓고 물건을 팔 듯이 주식을 거래했다. ‘장외(Over the counter) 거래란 말이 여기서 탄생했다. 독립 직후에 사업은 번창했고, 100개의 은행주가 월가 좌판대에서 거래됐다. 주식거래에 재미를 본 상인들은 아예 매일 정오에 거래를 하기로 약정하고 증권거래 사무소(Stock Exchange Office)’를 설립했다. 그해 3월 월가의 리더들이 코리스 호텔에 모여 증권거래 수수료를 일정 비율로 받기로 정식 의견을 모았다. 여기서 24명이 서명했다.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시작된 증권거래소는 이듬해 인근 커피숍으로 옮아갔고, 브로커들은 스스로의 규정을 만들어 주식 거래 체계를 형성해 나갔다. 뉴욕증권거래소는 190317층짜리 건물이 건축돼 세계 금융시장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뉴욕증권거래소는 출발부터 멤버십 제도로 운영됐다. 멤버십을 갖지 않은 사람은 거래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접어들면서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고, 철도 산업이 번창하면서 증권 시장이 양적, 질적으로 팽창하자, 멤버십이 없는 거래자들이 장외에서 주식 거래에 나섰다.

장외거래자들은 1911년 뉴욕 장외거래소(NYCE)를 설립, 뉴욕증권거래소에 이어 제2의 증권거래소를 조직했다. 1921년 트리니티 성장 뒤편 빌딩에 입주, 마침내 야외생활을 청산했다. 장외거래소는 1953년에 미국 증권거래소(AMEX)로 개칭했다.

 

미국 독립직후 1789년 월스트리트 /위키피디아
미국 독립직후 1789년 월스트리트 /위키피디아

 

미국에는 여래개의 증권거래소가 있다. 가장 큰 것이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뉴욕증권거래소(NYSE)이다. 이외에도 뉴욕을 본거지로 한 나스닥과 미국 증권거래소(AMEX)가 있다.

뉴욕 이외의 지역에는 여러 개의 증권거래소가 있었다. 지방에서 가장 큰 3개의 거래소가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등록, 규제를 받고 있다. 필라델피아, 워싱턴, 볼티모어의 거래소가 합병한 필라델피아 거래소 세인트폴, 시카고, 클리블랜드 거래소가 합병한 미드웨스트 증권거래소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퍼시픽 증권거래소가 그곳이다. 뉴욕의 2개 거래소와 지방 3개 거래소, 신시내티, 보스턴 거래소등 모두 8개 거래소가 전산망을 통해 거래 정보를 주고 받는다. 이 정보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닌다.

증권거래소 사이에도 경쟁이 치열하다. 더 많은 기업, 더 좋은 기업을 상장시키려고 거래소 회장들은 기업 유치에 힘쓰고, 합병과 인수를 거듭한다.

NYSE20세기말에 거래액 기준으로 미국내 증권거래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NYSE의 시장 잠식을 걱정하는 곳은 당연 나스닥과 AMEX. 20세기초 제2 증권거래소로 출발한 AMEX는 후발 나스닥에 밀려 뉴욕 3위의 거래소로 전락했다. 워낙 공룡인 NYSE가 버티고 있는 바람에 국내외 대기업이 나스닥에 상장하길 꺼렸다. 그래서 나스닥과 AMEX1998년에 합병을 단행했다. 두 거래소는 단일 지주회사의 계열사로 운영되며, 기존의 거래소와 거래방식은 종전대로 유지하고 있다.

나스닥은 1971년 증권딜러협회(NASD)가 창설한 거래소로 인텔, 마이크로소프트등 하이테크 업체들이 대거 상장돼 있다. 투기성이 강하고, 모험자본의 참여율이 높기 때문에 1980년대 이후 급성장, AMEX를 제치고 제2의 증권거래소로 부상했다.

 

199961일 미국 최대증권회사인 메릴린치사는 뉴욕 월가를 깜짝 놀랄 중대발표를 내놓았다. 1년전까지만 해도 철저하게 무시했던 온라인 브로커 사업을 전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뉴욕 증시의 개미군단들이 이-트레이드(E-Trade)나 아메리트레이드(Ameritrade)와 같은 온라인 브로커 회사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월가 최고의 증권 브로커 회사로서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주식투자자로부터 고리를 뜯어먹고 사는 증권 브로커 회사로서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메릴린치가 제살을 깎아먹으면서 온라인 사업에 진출한 것은 앞서 등장한 신생 온라인 브로커 업체들의 가공할만한 위협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었다.

 

뉴욕 월가는 증권 투자를 중개해주는 투지회사들이 밀집해 잇는 곳이다. 메릴린치, 골드만 삭스, 살러먼 스미스 바니, 모건 스탠리, 리먼 브러더스 등의 투자은행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이들 투자회사들은 은밀하게 담합, 세계 최대의 증시를 이끌고 나아가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투자은행들은 투자 자금의 3~5%의 수수료를 받아, 연봉 100만 달러를 넘는 펀드 매니저들을 고용하고 있다.

도도하기만 하던 월가의 투자 카르텔은 1996년부터 사이버 유령에 의해 위협받았다. 다름 아닌 온라인 브로커(Online Broker)’ 또는 -브로커(E-Broker)’라고 불리는 집단이다. 뉴욕 월가(Wall Street)는 인터넷에 의한 새로운 투자 은행, ‘웹 스트리트(Web Street)’ 또는 넷 스트리트(Net Street)’에 서서히 잠식되고 있는 것이다.

급격한 신장세를 보인 온라인 브로커 집단의 선두 주자는 찰스 스왑과 이-트레이드, 아메리트레이드 등이다. 19966월말 현재 온라인 브로커의 고객 자산규모는 4,200억 달러, 구좌수는 730만 개로 1년전에 비해 각각 두배로 늘어났다. 온라인 브로커들이 뉴욕 증시의 증권 거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97년초 8%에서 99년엔 15%를 넘어섰다.

온라인 브로커는 저렴한 수수료와 투자 자문,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때문에 고객들로서는 거만한 재래식 투자회사보다는 가정에서 안락하게 컴퓨터에 앉아서 온라인 브로커를 찾으려고 한다.

온라인 브로커들은 1997년에 수수료를 50% 인하한데 이어, 99년부터 각사마다 치열한 수수료 인하 경쟁을 벌였다. 예컨데 1999년 하반기에 20달러 짜리 주식 200 를 살 때 이-트레이드는 8달러, 아메리트레이드는 15달러, 찰스 스왑은 30달러를 받았다.

 

월스트리트 도로표지판 /위키피디아
월스트리트 도로표지판 /위키피디아

 

사이버 증권거래는 월가 200년 역사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첫째 월가 투자회사들의 담합을 깼다. 증권감독당국은 1975년 투자회사 또는 딜러들의 수수료 담합을 금지했다. 그후 메이저 회사가 일정액의 수수료를 정해 선도하면, 다른 회사가 따라가는 방식으로 고정 요율을 지켜왔다. 그러나 이-브로커들이 시장의 일각을 장악하면서 월가 브로커들의 암묵적 담합이 무너졌다.

둘째 개인투자 그룹을 활성화했다. 컴퓨터 앞에서 이-브로커의 지도를 받으며 주식을 거래하는 새로운 풍조를 만들어냈다. 이른바 데이트레이딩이다.

셋째 미국 일반인들이 찾는 뮤추얼 펀드도 이-브로커들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다. 거대한 자금줄의 일부가 온라인 거래로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 뮤추얼 펀드에 유입되는 자금량이 98년에 비해 40%나 줄어들었다. 줄어든 자금 규모는 금액으로 1,000억 달러에 이르는데, 이 자금이 온라인 브로커 회사로 넘어간 것이다.

 

뉴욕 증시의 장기호황과 인터넷등 첨단 기술의 발달은 데이트레이더라는 새로운 개인투자군단을 만들어냈다.

데이트레이더는 1990년대 후반에 등장, 한여름 잡초처럼 급속하게 번식했다. 양간의 수수료를 받고 데이트레이더를 도와주는 회사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데이트레이더의 선구자격 하비 하웃킨(Harvey Houtkin)데이트레이딩이 금융시장의 민주주의를 여는 혁명이라는 찬사를 늘어놓았다.

데이트레이더는 크게 두가지 부류가 있다. 첫째 부류는 하루종일 집에 칩거하며 컴퓨터에 매달려 주식투자를 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올테크와 같이 데이트레이딩 전문회사에서 컴퓨터를 빌려 거래를 하는 경우다.

데이트레이딩은 증권 브로커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거래액의 2%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내지 않는다. 다만 온라인 브로커를 통해 금액에 상관없이 20 달러 정도의 수수료만 내면 된다. 따라서 특정회사의 주식 1만 달러 어치를 사고 팔 때 종전엔 브로커에게 400~500 달러를 주어야 했다. 개인 투자자로선 투자에서 큰 이익이 나지 않는 한 엄청난 수수료만 물어하고, 증권 브로커회사들은 이런 점을 이용해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온라인 브로커를 이용하면 같은 금액이면 40 달러만 주면 된다. 따라서 과거보다 10배 이상의 주식을 사고 팔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데이트레이딩은 순간적으로 변하는 주가 변동에 여러 차례 베팅을 걸어도 큰 비용을 물지 않기 때문에 단기투자 경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데이트레이더의 세계에서 단기투자란 몇 분 사이에 사고 파는 것을 말한다. 오전에 사서 오후에 파는 것은 장기투자에 해당한다. 몇 년씩 주식을 보유하던 주식 거래관행은 데이트레이더들에겐 전설 속에 나오는 스토리에 불과하다.

데이 트레이더들이 기승을 부린 종목은 1999년의 인터넷 주식이었다. 인터넷 책방인 아마존(amazon.com)사의 전체 발행주식은 데이 트레이더들에 의해 1주일에 평균 두 번 주인이 바뀌었다. 데이트레이더로 불리는 사이버 군단은 주식 거래를 대중화하고, 도도하던 브로커 회사들의 수수료를 낮추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증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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