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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후 유럽금융 지배자로 각국 재정에 간여…교황도 감사표시
로스차일드의 비밀④…기독교 세계 지배한 유대왕
2019. 11. 24 by 김현민 기자

 

나폴레옹 전쟁에서 전선을 누비며 연합군에 군비를 지원했던 로스차일드 다섯 형제들은 평화가 오자 기독교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형제들은 벼락부자가 되었고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으로 되돌린 유럽의 군주들은 로스차일드의 자금력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구체제는 다시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노골화되는 반동력도 회복해 로스차일드 일가는 비밀주의라는 특유의 거래행위를 강화하게 된다. 유럽의 군주, 귀족들은 유대금융가와 거래하는 것을 드러내지 않길 원했고, 로스차일드도 사시의 눈으로 보는 세태에서 피하고 싶었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지 1년후인 1816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Franz II)는 영국의 나탄을 제외하고 4명의 로스차일드 형제들에게 백작 지위를 수여하고 가문에 문장(紋章)을 하사했다.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무너졌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 제일의 왕가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늙은 제국이었다. 독일의 경쟁자 프로이센이 부상하고 프랑스와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서 오스트리아는 자금이 필요했고, 그 자금을 로스차일드에게서 얻길 원했다.

로스차일드 형제들에게 귀족 칭호를 주자고 제의한 것은 재상 메테르니히(Metternich)였다. 당시 유럽 은행 가운데 전후 처리보상금이며 배상금을 가장 빠르게 지불해준 은행은 로스차일드 하나밖에 없었다. 메테르니히는 현실주의자였다. 유대인에게 돈을 받는다는 비난을 받더라도 쇠퇴하는 제국을 일으켜 세우는데 이교도의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합스부르크 내부에서도 유대인에게 귀족 칭호를 주는데 갈등이 있었다. 기독교 금융회사들의 시기심을 자극하고, 반유대 정서가 자신들에게 날아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추밀원에서는 유대인에게 귀족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부당하며, 적당히 선물을 주는 것으로 끝내자고 했다. 난처해진 프란츠 2세는 메테르니히와 의논했고, 메테르니히는 유대 은행가들에게 뭔가 으스댈 것을 주어야 한다고 권했다. 암셸, 살로몬, 카를, 제임스 등 네 형제가 백작 칭호를 받았는데 영국의 나탄(영어로 네이선)만 빠졌다. 영국 로스차일드가 프랑크프루트와는 다른 회사라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화살 4개를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형제들은 일단 4개의 화살로 만족했다. 하지만 암셸과 살로몬의 끊임없는 요구로 2년후 1818년에 나탄에게도 백작 칭호가 돌아가고 문장의 화살이 다섯 개로 늘어났다.

 

영국 버킹엄셔의 로스차일드 하우스. 1957년 영국 내셔널트러스트에 기탁했다. /위키피디아
영국 버킹엄셔의 로스차일드 하우스. 1957년 영국 내셔널트러스트에 기탁했다. /위키피디아

 

마이어 암셸의 아들 대에는 영국에 가 있는 셋째 나탄이 가문의 금융업을 사실상 주도했다. 나탄은 엄청나 부와 권력을 행사했다. 독일 문필가 퓌클러-무스카우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아직시오에서 조용히 태어나 지구상의 모든 왕자를 뒤흔들었다. 나는 눈사태를 떠올린다. 찌르레기의 조그마한 발의 움직임으로 발생해 마을을 통째로 삼키는 눈사태. 로스차일도도 아버지는 잡화점 상인이었다. 그런데 유럽의 어느 군주도 로스차일드 없이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다.”

 

나폴레옹이 패배한 이후 다시 돌아온 유럽의 구체제는 로스차일드에게 보이지 않는 규제를 가했다. 프랑스가 국채를 발행하는데 로스차일드가 배제되었다. 로스차일드에 개인적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의 참여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도 베어링 그룹이 로스차일드의 자리를 잠식해 들어왔다.

형제들은 반격의 기회를 찾았다. 18189월 유럽의 지도자들이 엑스 라 샤펠(Aix-la-Chapelle. 현재 독일의 아헨)에 모여 전후 복구와 평화유지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패전국 프랑스 국채 추가 발행이 주요 의제로 제기되었다.

로스차일드는 각국의 지점을 풀가동했다. 회의가 진행되던 어느날, 프랑스 국채가 한순간 급격히 상승하는가 싶더니 폭락세로 돌변했다.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의 로스차일드 은행이 일제히 프랑스 국채를 팔아 제낀 것이었다. 프랑스 채권이 반토막 났다.

아무도 로스차일드가 프랑스 국채 발행에 참여하는데 반대하지 않았다. 엑스 라 샤펠 회의는 로스차일드의 금융패권을 인정하는 회의였다. 군주도, 대공도, 대신도 모두 형제들에게 아첨을 했다.

그해 프로이센이 긴급하게 돈이 필요했다. 베를린의 게르만 은행들은 높은 금리를 요구했다. 급한 사람은 높은 금리를 지불하는 게 시장 원리다. 프로이센 정부는 자국 은행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자 영국의 나탄에게 대출을 신청했다. 나탄 로스차일드는 선선히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었다.

한때 형제들에게 귀족 지위를 부여하면서 나탄만 뺐던 오스트리아가 1820년 나탄을 런던주재 총영사로 임명했다. 메테르니히가 나탄의 영향력을 인정한 것이다. 나탄은 면책특권을 얻게 되었고, 사업상, 개인용 우편에 외교행낭을 이용할수 있게 되었다. 나탄은 오스트리아 사업을 형인 살로몬에게 맡겼다.

 

합스부르크는 외국인, 특히 유대인에게 토지와 건물 소유를 금지했다. 살로몬은 빈에 거주하면서 자택을 임대하지 않고 최고급 호텔을 선택해 모든 방을 모조리 사무실로 쓰고 가족들의 거처로 바꾸었다. 뢰미셰르 카이저 호텔(Romischer Kaiser Hotel)에 머물던 VIP들은 다른 호텔로 가야했다. 살로몬은 이 호텔에서 만찬과 파티, 무도회를 열어 합스부르크 귀족들과 어울렸다. 살로몬은 병원 건설에서 빈의 급수시설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돈을 기부하면서 시민권을 요청했다. 마침내 그는 시민권을 얻어 호텔을 소유하게 되었다.

메테르니히는 살로몬이 빈에 살게 된 것을 기뻐했다. 로스차일드만 보유하고 있는 정보를 알려줬고, 국고가 빌 때 자금을 대주었기 때문이다. 1822929일 오스트리아 제국은 다섯형제와 남자 자손들을 모두 남작으로 서품했다. 또 독수리와 사자를 조합하고, 방패를 사용한 문장이 주어졌다. 문장에는 화합, 성실, 근면’(Concordia, Integritas, Industria)이란 세단어가 새겨졌고, 다섯 개의 화살을 쥔 손이 그려졌다.

메테르니히는 로스차일드를 비호했다. 로스차일드를 반동적 제국의 재정적 기둥이라고 비판한 일게마이네 자이퉁 신문의 판매를 오스트리아 전지역에서 금지했다.

오스트리아 뿐 아니다. 로스차일드는 1920, 1830년대에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벨기에, 스페인, 나폴리, 포르투갈, 브라질, 독일 여러나라와 거래했다. 당시 유럽에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고대에 유대인들은 한 왕을 받들었다. 이제 유럽의 왕들이 한 유대인을 받들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 /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 /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는 중앙은행의 구제자이기도 했다. 182511월 영국에 경제위기가 닥쳐왔다. 70개 은행이 파산하고, 고객들이 은행창구에 밀려들었다. 중앙은행은 1파운드 짜리 금화 10만개가 필요했는데 그 돈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내각이 위태로왔다. 이듬해에 걸쳐 145개 은행이 쓰러졌다.

이때 영국 정부가 나탄 로스차일드를 찾아갔다. 그는 좀더 일찍 찾아왔으면 위기를 미리 막을수 있었을 텐데하면서 금화를 모아 잉글랜드 은행에 보냈다. 그 돈으로도 모자랐다. 나탄은 각국에 배를 띄워 금화를 긁어 모았다. 각국의 형제들, 조카들이 뛰었다. 금화 1천만 파운드가 모아졌고, 잉글랜드 은행은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영국을 보호했다.

또다른 일화. 영국 국채가 폭락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나탄은 조카 솔로몬에게 웰링턴 공작을 만나보라고 했다. 당시 웰링턴 공은 워털루 전쟁 주역으로 총리보다 정치적 영향력이 높은 위치에 있었다. 솔로몬이 웰링턴의 집을 찾아가 만나자는 전갈을 보냈다. 하인은 주인이 약속 없이 찾아오는 사람과 만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로스차일드라고 이름을 댔다. 웰링턴 경은 가운을 입고 나타났다. “무슨 일이오.” 솔로몬은 국채 소동을 언급하면서 나탄이 지시한 대로 정부 중매인 콜을 불러 국채를 무한정 사들이라고 언질을 주었다. 그날 웰링턴공은 로스차일드가 시키는대로 했다. 콜은 영국 국채를 대량으로 사들였고, 패닉은 잠잠해 졌다.

 

로스차일드는 아무에게나 돈을 주지 않았다. 반동 정권이나 급진파 세력에게는 군비 지원을 거부했다. 로스차일드는 이들에게 군비를 대주면 전쟁이 일어나고 평화가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가문은 자칭 평화주의자였다.

네덜란드에서 독립하려는 벨기에 반란세력이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로스차일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당신들에게 돈을 주면 무장 투쟁을 지원하게 되고, 전쟁이 불가피하다, 그러니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벨기에 혁명세력은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평화시위를 통해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로스차일드 형제들에게는 유대교 사제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821년 오스트리아 라이바흐(Laibac, 지금의 슬로베니아 류블라냐)에서 열강들이 모였다. 라이바흐 회의에서는 열강들은 나폴리에 부르봉 왕조를 재건하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 이에 필요한 병력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이탈리아 북부지역에서는 자유주의 과격파인 자코바트 일당이 불만을 품고 봉기를 일으켰다. 나폴리 왕은 피렌체에서 벌벌 떨었다. 오스트리아군가 군대를 파병하기로 했는데 군비가 모자랐다. 이탈리아 은행들이 콘소시엄을 형성해 오스트리아 국채를 사들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는 로스차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제들은 넷째 카를을 나폴리로 파견했다.

1827년 카를은 나폴리로 가서 은행을 설립하고 오스트리아 국채를 거래해 전부 소진시켰다. 카를의 활약으로 나폴리 왕국은 전개하게 되었고, 반란이 진압된 후 합스부르크 군대는 철수했다.

교황 그레고리 16세가 로스차일드에게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카를을 교황청으로 불렀다. 기독교 수장이 유대인을 부른 것이다. 카를 로스차일드는 그레고리 16세의 손에 입을 맞추고 극진흔 공경을 표하고 방을 나섰다. 대부분 기독교 군주들은 베드로 후계자를 알현할 때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유대인 왕으로 불렸던 로스차일드는 허리만 약간 굽힌채 보다 고귀한 교황의 손에 입을 맞춘 것이다.

이 사건은 기독교 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던졌다. 교황은 한발 더 나가 이 유대인 남작에게 훈장을 달아주었다 돈이 종교의 깊은 골을 메웠던 것이다.

 

위세 당당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에도 세월은 흘렀다. 영국에서 맹활약하고 사실상 형제들을 리드한 나탄 마이어가 1836년 딸을 결혼시킨 날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 나이 59세였다. 이로써 로스차일드의 주도권은 나탄이 살던 런던에서 막내 제임스가 있는 파리로 이동하게 된다.

 

영국 로스차일드를 설립한 나탄 마이어 /위키피디아
영국 로스차일드를 설립한 나탄 마이어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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