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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경험 재현하나…라틴-스칸디니비아 동맹 실패, 미국과 독일 연방통화 성공
美 금융파워⑬…공동통화 유로의 도전
2019. 11. 26 by 김현민 기자

 

20세기가 끝나갈 무렵인 1999122일 빔 두이젠베르그(Wim Duisenberg) 유럽 중앙은행(ECB) 총재가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독일 정부에 포문을 열었다. “유럽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독일이다. 독일이 경기 부양을 위한 조치를 질질 끌고 있다. 독일이 미리 지향적이고, 다이내믹한 경제를 끌고 가기보다는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럽 11개국 단일 통화인 유로화가 탄생한지 11개월째 되던 날 유럽 중앙은행 총재는 유로랜드(유로를 채택하는 경제권)의 최대 경제대국이자, 맹주격인 독일 정부를 실날하게 비난했다. 유럽 공동체(EC) 국가들은 연초에 미국 달러화의 독주를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달러보다 약간 높은 가격(1유로=1.16 달러)으로 새로운 통화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1년도 못돼 1221유로=1달러로 떨어졌다. 유럽의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이젠베르그 총재는 독일이 자국 건설업체를 도와주기 위해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바람에 국제 금융시장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독일을 비난했다. 유럽마저도 국제 금융시장을 주도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니고 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그러면 유럽 국가들의 단일 통화는 가능한 것일까. 유럽의 학자들은 자신감에 차 있지만, 과거의 역사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유로화 동전과 지폐 /위키피디아
유로화 동전과 지폐 /위키피디아

 

유럽은 18세기에도 단일 통화를 경험했다. 1873년에 창설된 스칸디나비아 통화동맹은 1924년에 막을 내렸고, 1865년에 창설된 라틴 통화동맹도 비슷한 시기에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또 아프리카에서는 케냐와 탄자니아, 우간다등 세나라가 1967년에 단일 통화로 실링을 채택했으나, 10년만인 1977년에 제각기 통화 제도를 운영해 공조체제를 끝낸 경험이 있다.

과거 공동통화 실패가 반드시 유로의 실패를 귀결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단일 통화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해 준다. 중요한 사실은 과거의 공동 통화가 국가 간 정치적 통합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유로화의 앞날이 어두운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라틴 통화동맹은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이탈리아 등 4개국으로 출발했고, 나중에 그리스가 참여했다. 라틴 동맹은 금과 은을 공동 통화 가치로 설정, 금화와 은화를 주조해 법정 통화로 유통시켰다. 영국은 20세기말의 유로화 창설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에도 어느 통화동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의 경제학자였던 월터 베이지핫(Walter Bagehot)우리(영국)가 아무데도 가입하지 않는다면, 찬바람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국도 라틴 동맹에 가입할 것을 고려했으나, 끝내 가입하지 않았다.

몇 년후 스웨덴과 노르웨이, 덴마크가 스칸디나비아 동맹을 체결, 스칸디나비안 크라운을 단일 통화단위로 채택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각국 정부가 자국 통화를 유지하되, 크라운에 환율을 고정시킴으로써 초기의 유로화 형태를 취했다. (유로는 20021월부터 공동 화폐를 사용하고, 그 이전에는 3년을 과도기간으로 정해 각국 통화가 가상의 화폐인 유로화를 기준으로 일정 비율로 교환되는 것으로 정했다.) 금으로 만든 크라운 동전은 은화 크라운보다 높은 가치를 유지했다. 세 나라는 지폐 은행권도 법정 통화로 자유롭게 운영되었다.

두 통화 동맹은 불안한 상태를 수십년 간 지속했다. 두 통화동맹의 붕괴의 원인은 많지만, 결정적으로 1차 대전과 함께 동맹국가 간 정치-경제적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18세기 유럽 통화동맹에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정치적 동맹의 결여였다. 따라서 동맹국들은 자국 경제문제를 당면해 동맹의 이익보다는 이기적으로 문제를 대처했으며, 동맹 체제에 문제가 생기면 각국 국민들도 자신의 문제에 집착했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덴마크와 노르웨이 경제가 스웨덴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통화팽창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스웨덴보다 통화가치를 하락시켜야 했다. 지폐는 각국이 현지 화폐를 썼지만, 동전으로 만들어낸 금화와 은화가 문제였다. 동맹국 내에서 동전은 통화 협약에 의해 동맹국 내에서 같은 스웨덴의 1크라운 금화와 덴마크의 1크라운 금화가 같은 조건으로 유통됐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여기서도 돈을 벌 기회를 포착했다. 오늘날로 치면 환투기꾼이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자리를 잡고 있다. 해협을 오가며 동전을 교환함으로써 통화가치의 차이를 먹는 투기자들이 생겨났다.

당시 투기자들의 수법을 보자. 투기자들은 돈값이 싼 덴마크에서 금화를 샀다. 페리를 타고 스웨덴으로 건너가 11 조건으로 덴마크 금화를 스웨덴 금화로 교환한다. 스웨덴 금화를 덴마크로 가져와 더 많은 덴마크 금화로 바꾼다. 스웨덴 금화의 실제가치가 덴마크의 것보다 높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투기자는 스웨덴과 덴마크를 오가며 쉽게 돈을 벌었다. 경제력의 차이로 각국간 통화가치의 등가성에 틈이 생겼고, 동맹국들이 통화 협약을 이행할 의지가 해이해진 것이다. 마침내 스웨덴은 동맹 탈퇴를 선언, 동맹은 깨졌다.

라틴 동맹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탈리아가 재정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이기적인 정책을 채택했고, 결국 이탈리아 통화의 시장 가치는 법정 가치 이하로 떨어졌다. 게다가 라틴 동맹은 금화와 은화 사이에 고정 환율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신대륙에서 은화가 대량 유입되면서 환율 체계에 균열이 생겼다. 라틴 동맹은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전비를 마련하느라 나라마다 지폐를 남발했다. 지폐는 통화 협약에서 금지되었다. 통화 동맹이 파기되었다.

 

달러와 유로 세력 구도 /위키피디아
달러와 유로 세력 구도 /위키피디아

 

인류 역사상 단일 통화의 노력이 성공한 케이스도 있다. 미국과 독일의 경우가 대표적 케이스다.

미국은 독립 초기에 지방 정부()의 힘이 연방 정부보다 강했다. 따라서 각 주마다 발권 은행을 지정, 지폐를 발행했다.

1840년대 테네시주의 플랜터스 은행이 발행한 1달러는 필라델피아에서 80센트에 교환됐다. 일리노이 주립은행이 발행한 1달러는 필라델피아에서 50센트의 값으로밖에 쳐주지 않았다. 일리노이주의 발권은행이 부도가 날 경우 지폐가 휴지로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의 경제력, 주정부의 과세 규모, 주 인가 발권은행의 금보유 정도 등이 각주간 통화가치를 재는 기준이었다. 미국은 초기에 하나의 연방 정부를 형성해 달러라는 공동통화를 채택했지만, 실제로는 수십개의 통화가 존재했다.

미국의 통화 제도는 식민지 시절부터 문제가 많았다. 영국에서 독립을 획득한 후 미국 연방 헌법은 의회에 동전 주조권을 법률로 위임했다. 1792년 주화법(Coinage Act)이 제정돼 연방 정부는 금과 은의 중량을 기준으로 동전을 제조했다. 그러나 미국이 독립과 동시에 단일 통화를 유지했다고 볼 수 없다. 주 정부는 금화 또는 은화와 호환성을 전제로 지폐를 찍었다. 제임스 핵스비라는 사람이 1782년부터 1866년까지 발행된 미국의 지폐를 모아보니 72천 가지나 됐다. 보스턴의 하이드&레더 은행, 로드아일랜드의 왓치어 은행 등 이름도 자금력도 없는 은행들이 5센트에서 5천 달러에 이르는 지폐를 마구 찍어 유통시켰다. 당시는 금본위제도였기 때문에 지폐는 금이나 은으로 교환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그런데 은행들이 충분한 금()을 보유하지 않은채 지폐를 찍어내 교환성에 문제가 있었다. 부도나는 은행의 지폐는 휴지나 다름없다. 따라서 발행 은행의 신용도에 따라 돈값이 매겨졌다. 또 먼 곳에 유통되는 돈을 가치가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켄터키주에서 발행된 1달러 지폐가 버지니아에서 90센트라면, 매사추세츠주에서는 80센트였다. 당시에도 마차에 돈 더미를 싣고 메릴랜드, 버지니아, 테네시, 켄터키주를 돌아다니며 돈을 교환하는 환전꾼이 있었다. 1842년 뉴욕시에는 타주 지폐를 교환해주는 환전소가 51곳이나 됐다.

남북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미국은 주마다 다른 경제 단위를 형성했다. 미국의 통화제도가 정착된 것은 1863년 남북전쟁 발발후 연방정부가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통화법(National Currency Act)을 제정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연방 정부가 발행한 초록색 지폐(Greenback)가 미국의 단일 통화로 정착됐고, 주 단위의 지폐 발행이 금지됐다.

유럽이 전쟁으로 공동통화에 실패한데 비해, 미국은 전쟁으로 단일 통화를 형성한 것이다. 아마 두 대륙 사이에 경제력의 헤게모니가 바뀐 것은 여기에서 출발했을수도 있다.

미국은 단일 통화를 형성함으로써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1878년 미국은 한해동안 연방 통화를 유통함으로써 2천만~6천만 달러를 절감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 GDP1%에 해당하는 규모엿다.

독일도 1870년대에 연방내 통화동맹을 체결, 탈러(Thaler)라는 통화를 채택했다. 독일은 이전부터 한자 동맹등 경제공동체를 체결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통화 동맹이 연방 내에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당시 통화동맹의 주도국가인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했다는 점이다. 통일 독일은 철의 재상비스마르크에 의해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졌다. 유로화가 탄생하기 이전에 세계 3대 기축통화의 하나였던 마르크는 공동통화의 산물이다.

오늘날 미국 달러와 1999년 이전의 독일 마르크는 공동통화의 경험을 토대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유로랜드 11개국이 유로의 성공을 바라며 드는 예가 미국과 독일의 경험이다.

 

유로존 /위키피디아
유로존 /위키피디아

 

유로화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유로랜드 국가들은 성공을 자신하지만, 출범 1년만에 그 한계를 노출했다. 유로는 출범과 동시에 유로랜드의 정치에 연동해 움직였다. 외환 딜러들은 그동안 일본 엔화를 정치 통화(Political Currency)’라고 불렀으나, 이젠 유로에도 같은 표현을 갖다 붙였다.

유로가 출범한지 얼마후인 19993월 오스카 라폰타이네(Oskar Lafontaine) 독일 재무장관이 물러났다.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영국의 언론들은 그를 가르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지목했다. 며칠후 유럽위원회(EC) 위원들이 전원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유럽 국가들이 공동통화를 창설해 놓고도 단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들이었다.

1999년 하반기 유로랜드에 가입하지 않은 영국의 전화회사 보다폰사가 미국 골드만 삭스를 앞세워 독일 통신회사인 만네스만에 대해 적대적 인수를 하려고 덤벼들자 유럽 국가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감정을 못이기고 독일은 앵글로색슨 경제 모델을 따르지 않겠다고 내뱉었다. 피인수 회사의 의사와 관계 없이 인수자가 증시를 통해 주식을 매집, 인수하는 것이 미국과 영국의 경제 관행이다. 유럽 중도좌파의 기수임을 자처하는 슈뢰더 총리는 독일의 대표적 기업이 영국 기업에 먹히는 것을 가만 두지 않았던 것이다.

독일 총리는 앵글로색슨족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국제 외환시장은 런던과 뉴욕이 중심이다. 가장 많은 거래가 이뤄지고, 두 곳의 외환 딜러들이 시장 분위기를 좌우한다. 런던은 앵글로색슨족의 금융중심지고, 뉴욕은 독일에 유태인이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태인들은 아직도 독일에 대한 원한에 사무쳐 있다.

슈뢰더 총리는 또다른 모험을 감행했다. 건설회사인 필립스 홀츠만사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독일 정부가 1억 달러 이상의 정부 자금을 지원 구제해주기로 한 것이다. 구제 금융은 시장 원리에 어긋난다. 재무구조가 건실하지 못한 기업은 시장 원리에 의해 도태되어야 한다. 유로랜드의 맹주격인 독일은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자국 기업을 보호하는데 주력했다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런던과 뉴욕의 외환 딜러들이 독일을 처단(punish)했다. 대상은 독일이 중심이 된 유로화였다. 외환 딜러들의 공격을 받은 유로는 한때 심리적 지지선인 ‘1달러=1유로이하로 떨어졌다. 유로는 1년전 출범 가격보다 15% 가라앉아 달러에 대한 우위성을 잃고 말았다.

 

유럽 단일 통화는 유럽 국가들이 하나의 주권 국가로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갈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통화는 지금까지 하나의 주권을 단위로 형성된 게 관례였다. 정치적 단일 주권이 전제될 경우 달러나 마르크처럼 성공하고, 정치적 동맹이 형성되지 않고 동맹국이 질투와 이기심에 사로잡힌다면 실패한다는 과거의 경험이 유로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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