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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자 풀드-페레르, 신흥 은행 창설해 도전…장기전에서 자금력으로 승리
로스차일드의 비밀⑤…경쟁자 풀드를 짓밟다
2019. 11. 26 by 김현민 기자

 

19세기초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철도라는 괴물이 등장했다. 1830년 영국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 45km의 철도가 연결되었다. 그해 9월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살로몬 로스차일드가 공과대학 교수들로 팀을 만들어 영국에 파견했다. 공학자들은 기차를 타보고 꼼꼼히 체크해 두 부의 보고서를 만들었다. 하나는 프랑스의 제임스 로스차일드에게, 또다른 하나는 빈의 살로몬 로스차일드에게 보내졌다. 영국의 로스차일드는 이미 다른 사업자들이 철도에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대륙의 두 형제들에게 사업을 권유하는데 그쳤다.

 

유럽대륙에는 철도가 없었다. 영국에서 철도가 건설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시속 38km로 달리는 열차를 타면 폐가 파열되고 심장이 떨어져 나간다, 여행자들의 눈과 귀, 코와 입에서 피가 터진다, 긴 터널을 지나면 모두 질식한다는 터무니 없는 루머가 횡행했다. 어느 귀족은 아랫 것들이 쓸데 없이 돌아다니게 될 것이라며 반대했고, 의사들마저 기차 여행이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자살충동에 빠지게 한다며 혹세무민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로스차일드들은 철도가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는 미래의 산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임스 로스차일드 /위키피디아
제임스 로스차일드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의 살로몬은 재상 메테르니히를 설득했다.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산업화에 뒤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에 살로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대신들과 금융가들이 모여 사업을 논의했다. 그중 폰 지나(Von Sina)라는 금융업자는 로스차일드가 가져온 아이템이 돈을 벌어줄 것을 직감하고 철도에 군침을 흘렸다.

과거 같으면 오스트리아 정부가 입찰을 하지 않고 수의계약으로 로스차일드에게 사업권을 주었을 터인데, 경쟁자가 나서면서 살로몬은 경쟁입찰을 해야 했다. 자금력과 가족들의 단결력으로 입찰에서 로스차일드는 거뜬히 사업권을 따냈다. 빈에서 보스니아를 연결하는 오스트리아 첫 철도사업이 1836년에 착공했고, 철도 이름은 황제 이름을 따 카이저 페르디난트 노르트반(페리디난트 황제의 북방철도)이라 불렸다. 지나는 북방철도의 주주 참여했다.

그런데 지나는 이사회를 통해 살로몬을 공격했다. 살로몬이 황제의 이름을 황송하게 남용하고, 기관차의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사람들은 지나의 말을 믿게 되었고, 황제도 동요했다. 하지만 살로몬은 주주총회를 열어 지나와 그의 지지자들을 회사에서 쫓아냈다. 그런데 이게 그에게 오히려 치명타를 주었다. 오스트리아는 북방철도 부설에 이어 아드리아해까지를 잇는 남방철도 건설을 추진했는데, 경쟁자 지나가 그 사업권을 따냈다. 로스차일드의 북방철도와 지나의 남방철도가 경쟁이 붙었다.

 

프랑스의 제임스 로스차일드는 파리에서 생제르망까지 11마일의 철도 부설 사업권을 따내 1837년 개통하고, 파리~베르사이유 구간을 1839년에 완공했다.

제임스는 철도 건설 총책임자로 에밀 페레르(Emile Pereire)라는 유대인을 채용했다. 그는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사업자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고 빼주는 조건으로 돈을 받는 저질 언론인이었지만, 철도사업에 비판적 여론을 무마하는 논지를 폈기 때문에 제임스의 눈에 들었다.

프랑스 철도사업에서도 아실 풀드(Achille Fould)라는 경쟁자가 나타났다. 풀드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금융가로, 나폴레옹 3(루이 나폴레옹)가 방랑생활을 하는 동안에 돈을 빌려주었다. 그는 센강 좌안(左岸)을 도는 파리~베르사이유 구간의 철도사업권을 따내 로스차일드의 센강 우안(右岸) 노선과 경쟁했다. 유대인끼리 단합도 하지만, 종교적 차이나 파벌이 다를 때엔 이민족보다 더 치열하게 싸운다. 제임스와 풀드는 적이 되었다.

1837824, 센강 우안 철도공사가 준공한 직후, 페레르는 제임스에 등을 돌리고 풀드 진영으로 가 버렸다. 페레르는 로스차일드를 잘 아는 적이 되었다. 제임스에게 배운 금융기술과 미디어를 하면서 배운 여론 조작에 능한 사람이었다.

 

오스트리아 로스차일드가 건설한 카이저 북방철도 역사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 로스차일드가 건설한 카이저 북방철도 역사 /위키피디아

 

1848년 프랑스에서 2월혁명이 터지고, 루이 나폴레옹이 망명지에서 돌아와 대통령에 취임했다. 나폴레옹은 어려울 때 도와주었던 풀드를 재무대신으로 기용했다. 풀드는 로스차일드 죽이기에 나섰다.

당시 프랑스에선 사회주의가 범람했고, 풀드와 페레르는 생시몽(Saint-Simon) 백작이 제창한 공상적 사회주의 신봉자였다. 생시몽은 로스차일드와 같은 개인 은행이 아니라, 대중들에게서 자본금을 모아 인민은행을 만들자고 했다.

1852년 루이 나폴레옹은 황제로 등극해 나폴레옹 3세가 되었다. 풀드와 페레르는 황제를 등에 업고 생시몽의 이론에 따라 일반인도 주식을 가질수 있는 크레디 모빌리에(Crédit Mobilier) 창설을 발표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동산(動産)신용은행이다. 사회주의자들이 개인은행에 도전했다. 정확하게 풀드가 로스차일드와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재무대신인 풀드의 권력과 언론인 출신의 페레르의 선동술은 궁합이 잘 맞았다. 크레디 모빌리에는 500프랑 짜리 주식 12만주를 발행했다. 도축업자도, 가난한 사람도 로스차일드처럼 금융가가 될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귀족들도 뛰어들었다. 신설 은행의 주가는 상장 첫날 500프랑에서 1,100 프랑으로 뛰었고, 1주일이 지나 1,600 프랑으로 올랐다. 정부도 예비비를 은행에 예치했고, 황제 자신도 은행을 지원했다. 프랑스 정부가 운영하는 시민은행은 국책 사업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아실 풀드(왼쪽)와 에밀 페레르 /위키피디아
아실 풀드(왼쪽)와 에밀 페레르 /위키피디아

 

이제 본격적으로 로스차일드와 풀드 사이에 일대 은행전쟁이 벌어졌다. 프랑스 로스차일드를 대표하는 제임스도 나폴레옹 3세와 막역한 사이였다. 제임스는 황제에게 로스차일드 은행이 유럽의 제일이며, 위대한 군주는 위대한 집안과 교류한다는 점을 각인시켰으나, 소용이 없었다. 루이 나폴레옹도 사회주의적 취향에 젖어 있었다. 제임스는 빈에 있는 형 살로몬에게 연락해 오스트리아 황제에게서 총영사로 임명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제임스를 프랑스 주재 총영사로 임명했다.

제임스는 풀드-페레르 연합세력을 한번의 공격으로 무너질 것으로 보지 않고 장기전을 폈다. 제임스와 풀드는 사사건건 충돌했다. 몇가지 사건을 보자.

 

나폴레옹 3세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출신의 외제니 드 몬티호(Eugénie de Montijo)라는 미녀를 사랑했다. 귀족들은 스페인 시골뜨기 처녀를 깔보았고, 황제의 측근들도 그녀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제임스 부부는 외제니를 따듯하게 대하고 후원자를 자청했다.

1853112일 궁전에서 무도회가 벌어졌다. 제임스는 외제니와 그녀의 어머니를 모시고 무도회장으로 들어갔다. 외제니 모녀는 빈 자리가 있어 앉으려고 했다. 그때 풀드의 부인이 다가가 이 의자는 대신 가족 전용이라며 퉁명스럽게 내뱉고 그 자리에 앉았고, 외제니 모녀는 서 있었다. 그때 황제가 나타났다. 나폴레옹 3세는 외제니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황제 옆자리로 데려갔다. 무도회가 끝나고 귀족들은 로스차일드의 승리라고 선언했다.

풀드가 반격에 나섰다. 130일 노트르담 성당에서 황제와 외제니의 약혼식이 열렸다. 제임스는 당연히 초청장이 올줄 알았다. 황실은 제임스가 오스트리아 총영사이므로 대사관으로 초청장을 보냈다. 그때 파리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는 그라프 휘브너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로스차일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명색이 정식 대사인데, 명예직인 총영사가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는게 그의 불만이었다. 휘브너는 제임스에게 온 초청장을 전달하지 않았다. 약혼식 당일까지 초청장을 받지 못한 제임스는 황제의 중대사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황제는 제임스가 약혼식장에서 오지 않은 일로 삐치게 되었다.

후에 황후 외제니가 나폴레옹 3세에게 제임스가 그럴 사람이 아니며, 뭔가 실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다독이는 바람에 황제의 마음이 풀렸다고 한다.

 

나폴레옹 3세와 외제니 황후 /위키피디아
나폴레옹 3세와 외제니 황후 /위키피디아

 

어쨌든 풀드는 나폴레옹 3세 재임 시에 네 번이나 재무대신을 역임하면서 권력을 휘둘렀고, 페레르의 크레디 모빌리에는 증권거래소에서, 공장에서, 유럽 각국의 궁정에서 로스차일드를 조여 왔다. 이 은행은 프랑스 국민들의 후원을 받아 무한정의 재원을 확보했다. 이 국민적 은행은 철도에서 시작해 공업 분야까지 진출해 로스차일드와 붙었고, 프랑스를 넘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 전 유럽에서 옛 금융제국과 대치했다.

 

1853년 페레르의 인민은행은 이탈리아에 촉수를 뻗쳤다. 사르디니아 왕국은 로스차일드에게서 차관을 받고도 돈이 모자라 2차 차관을 추진했다. 그때 크레디 모빌리에가 은밀하게 저리의 자금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사르디니아는 두 은행을 저울질했다. 제임스가 이 사실을 포착했다. 이때 페레르는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경쟁심에 빠진 로스차일드는 아주 싼 금리를 받는 조건으로 차관계약을 따냈다. 제임스의 은행은 엄청난 기회비용을 치른 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예는 약과다. 본격적인 전쟁은 오스트리아에서 벌어졌다. 풀드와 페레르는 오스트라아의 로스차일드 적들을 규합했다. 오스트리아 남방철도를 가진 지나가 페레르 편으로 돌아섰다. 로스차일드의 후원자 메테르니히는 실각해 도움이 되지 않았다.

1855년에 로스차일드 일가에 불행아 닥쳤다. 프랑크루르트의 암셸, 빈의 살로몬, 나폴리의 카를 등 세형제가 모두 죽었고, 프랑스의 제임스만 남았다. 빈의 사업은 카를의 아들 안셀름이 이어받았다.

당시 오스트리아 정부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국유철도를 민간에게 매각하려 했다. 국유철도 인수전에 로스차일드와 지나가 붙었다. 페레르는 지나 편에 붙었다. 지나는 국유철도 인수를 위해 프랑스의 크레디 모빌리에를 모방해 오스트리아판 인민은행으로 크리디탄슈탈트(Creditanstalt)를 설립했다. 이 은행에 페레르 등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적들이 대거 참여했다. 로스차일드와 반로스차일드 사이에 국제전이 벌어졌다.

프랑스의 제임스는 자신의 형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장남 알퐁스와 런던의 조카 리이어넬, 빈의 조카 안셀름의 연대를 형성해 크리디탄슈탈트에 모여 있는 그들의 적들과 싸웠다. 로스차일드 일가는 1억 리라라는 거액을 쏟아부으며 오스트리아 국유철도를 몽땅 사버렸다.

안셀름, 라이어넬, 알퐁스의 사촌들은 다른 철도를 공격해 오스트리아 국영 남방철도 사업권을 획득해 롬바르디아-베네치아 노선과 합쳐 강력한 운송체를 형성하며 지나-페레르의 연합체를 격파했다.

 

로스차일드와의 오랜 전쟁으로 페레르가 이끄는 크레디 모빌리에의 실탄이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게다가 풀드-페레르를 도아주던 휘브너도 오스트리아 대사에서 경질되고, 그 자리에 로스차일드의 친구 아들이 임명되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이제 서서히 로스차일드가 페레르의 목을 조일 단계가 왔다. 로스차일드는 악마의 수법을 썼다. 안정적인 사업에는 이자율을 한층 낮춰 융자를 제시했고, 리스크가 높은 사업에는 적극적으로 덤벼들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쟁심을 촉발하게 해놓고 손을 빼버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신흥독립국 멕시코의 막시밀리안 황제가 유럽에서 채권을 발행할 때였다. 로스차일드는 경쟁에 뛰어들어 채권 값만 올려 놓고 뒤로 빠지고 페레르에게 공을 넘겼다. 이탈리아에서 당한 것을 보복한 셈이다. 멕시코 채권이 폭락하면서 크레디 모빌리에는 큰 타격을 입었다.

1857년 금융불황이 닥쳐왔다. 불황기에는 자금 여력이 있는 자는 살아남고, 재무구조가 약한 회사는 무너진다. 투자자들은 크레디 모빌리에 주식을 팔아 제꼈다. 1860년 크레디 모빌리에 주가는 1600 프랑에서 800 프랑으로 반도막이 났다. 페레르는 주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회사 자본금에서 배당금을 지급해야 했다.

1년후 풀드는 다시 재무대신이 되었다. 페레르는 다시 일어설 기회가 왔다면서 친구에게 달려가 국채 사업을 독점하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반응이 썰렁했다. 페레르는 풀드가 더 이상 친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제국은 로스차일드만이 국채 가격을 살릴수 있는 은행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862217일 나폴레옹 3세는 제임스 로스차일드의 대저택 페리에르를 방문했다. 유대 금융황제는 프랑스 국왕을 성대히 접대했다. 만찬장에는 아실 풀드가 빠졌고, 페레르도 참석하지 못했다. 페레르는 대신에 재판정에 섰다. 도축업자들이 은행 출범시 투자한 자금을 돌려달라며 그를 고소했기 때문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프랑스 파리 저택, 페리에르 /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 가문의 프랑스 파리 저택, 페리에르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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