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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사회당 정부에 의해 국유화, 1984년 재개…2003년 영국과 프랑스 회사 합병
로스차일드의 비밀⑪…미테랑과 싸워 재기하다
2019. 12. 03 by 김현민 기자

 

1945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하지만 로스차일드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50년에 걸쳐 유럽을 쥐고 흔들던 이 거대 유대은행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세상은 바뀌었다. 세계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역사의 뒤안길에 쳐져 잊혀진 듯했다. 영국에선 로스차일드 가문의 저택들이 팔려 나갔다. 켄싱턴 가든의 저택은 소련 대사관에 팔렸고, 버킹엄셔의 와디스던관은 대궐같은 저택을 유지할 돈이 부족해 국가에 신탁했다. 프랑스에서도 저택들이 미국이나 유엔본부에 팔렸고, 로스차일드를 상징하는 페리에르 저택엔 문을 닫고 아무도 살지 않았다.

가장 먼저 손을 든 곳은 나치에 의해 은행을 빼앗겼던 오스트리아 로스차일드였다. 오이겐 부부는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로, 루이스 부부는 미국 버몬트로 이민을 떠났다. 그들에겐 재산을 물려줄 아들도 없었다.

루이스는 한번 빈으로 돌아와 그곳의 실정을 살핀 적이 있다. 현지 언론들은 로스차일드가 돌아왔다며 반가워 했지만, 루이스는 현지 실정을 돌아본 후 큰 슬픔에 잠겨 실망하고 말았다. 그는 사업을 다시 일으키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이제 영국과 프랑스 로스차일드만 남았다.

 

런던 뉴코트에 있는 로스차일드(Rothschild & Co) 본사 /위키피디아
런던 뉴코트에 있는 로스차일드(Rothschild & Co) 본사 /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 재기의 신호탄은 1949630일이었다. 그날 파리 증권거래소의 종이 울리면서 석유회사 로열 더치, 금속회사 리오 틴토, 광산회사 르 니켈, 다이아몬드회사 드 비어스의 주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날 주가 하락의 이유는 파리 로스차일드의 가장인 에두아르 로스차일드(Édouard de Rothschild)가 사망한 것이었다. 프랑스 법률에 죽은 자의 상속세는 죽은 날 종가를 기준으로 산정하기 때문에 상속세를 낮추기 위해 에두아르가 보유한 주식의 가치를 떨어뜨린 것이다. 물론 그날 떨어진 주가는 다음날 회복되었다. 이로써 로스차일드가 다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 지게 되었다. 1950년대가 되면서 런던과 파리의 로스차일드는 서서히 기지개를 폈다.

 

영국의 로스차일드는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투자했다. 1952년 뉴펀들랜드의 조지프 스몰우드 주지사가 런던을 방문했다. 주지사는 윈스턴 처칠 총리에게 미개발지역인 6만 평방마일을 개발할 사업자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한반도보다 넓은 땅이다. 처칠은 로스차일드를 지목했다. 구스타브 로스차일드는 뉴펀들랜드의 계획에 흔쾌히 동의했다. 런던 로스차일드를 중심으로 영국 회사들이 컨소시움을 형성해 브링코라는 회사가 만들어졌다. 이 거래를 두고 뉴펀들랜드 주지사는 “20세기 최대의 부동산 거래라고 표현했고, 처칠은 위대한 제국을 품었다고 평가했다. 로스차일드의 참여로 캐나다 동부에 발전소가 건설되고 벌목 기지가 만들어졌으며, 광물 조사가 본격화되었다.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가 급속하게 발전하게 된다.

 

파리의 기 로스차일드 /위키피디아
파리의 기 로스차일드 /위키피디아

 

에두아르가 죽은후 파리 로스차일드의 아들과 사촌들은 서둘러 은행을 개설했다. 점포는 대부분 나치에 징발되고 직원들도 고령화되어 전문 인력이 거의 남지 않았고 옛 고객도 거의 사라졌다. 에두아르의 아들 기(Guy)와 사촌형제들은 일단 몰수당한 자산을 회수하고 여러 사업들을 합병했다. 그리고 새롭게 일어나는 신사업에 투자했다. 나아가 신금융 흐름에 맞춰 부자 중심의 은행에서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한 은행으로 전환했다.

파리 로스차일드 은행은 1953년에 조르주 퐁피두(Georges Pompidou)를 간부로 영입해 1956년부터 1962년까지 총지배인을 맡겼다. 이 일이 나중에 화근이 되었다. 퐁피두는 은행을 그만둔 후 프랑스 총리를 역임하고 1969~1974년에 대통령에 재직한다.

프랑스 로스차일드는 전쟁 뒤에는 광물자원 등 원료 수요가 급증한다는데 착안해 1962년에 광산복합기업으로 이메탈(IMETAL)을 설립했다. 이어 석탄 채굴회사와 니켈 회사도 설립했다.

파리 로스차일드의 책임자 기 로스차일드(Guy de Rothschild)1960년에 20년간 방치되었던 페리에르 대저택의 문을 다시 열었다. 로스차일드가 부활했음을 알리자는 의미였다. 1962년부터 퐁피두가 총리가 되면서 로스차일드와 프랑스 정부는 우호적인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로스차일드에게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보였다.

 

프랑스 와인 사업도 확장되었다. 와인 사업은 런던 가문의 나타니얼(Nathaniel)1853년에 포도원을 사들여 샤토 무통 로실드(Château Mouton Rothschild)를 연데 이어 1868년 파리 가문의 제임스가 샤토 라피트 로실드(Château Lafite Rothschild)를 열었다. 런던과 파리의 두 집안의 포도주 경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70년대에 런던 집안에서 필립이, 파리 집안엔 에드몽이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대결이 벌어졌다. 두 집안은 포도농장을 경쟁하듯 사들이고 품질경쟁을 벌였다. 같은 집안 내에서도 포도주 시장에서는 적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싸웠다. 덕분에 로실드 브랜드의 포도주는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 올렸다.

 

런던 집안에서도 경영권 분쟁이 벌어졌다. 런던 로스차일드는 제이컵(Jacob)이 경영하고 있었는데, 대주주는 장손 계열의 에벌린(Evelyn)이었다. 발단은 사업 방식이었다. 제임스는 외부에서 자본금을 끌어들여 회사를 키워나가 미국과 일본 은행들과 경쟁하자는 견해를 가졌고, 에벌린은 전통의 방식대로 가족 경영을 하자고 했다. 결국 주주 분쟁으로 번졌다. 이때 제이컵의 아버지 빅터는 아들이 아니라 조카의 손을 들어주었다. 제이컵은 쫓겨나 신생회사인 로스차일드 투자신탁(RIT: Rothschild Investment Trust)을 맡게 되었고, 런던 로스차일드 본가는 에벌린이 맡게 되었다.

 

조르주 퐁피두와 프랑수와 미테랑 /위키피디아
조르주 퐁피두와 프랑수와 미테랑 /위키피디아

 

마침내 프랑스에서 터질 것이 터졌다. 19815월 프랑수와 미테랑(Francois Mitterrand)의 사회당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미테랑 대통령은 로스차일드와 보수정치인 퐁피두가 서로 감싸고 돈 것을 고깝게 생각한데다 개인이 대주주인 은행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미테랑은 집권하자 로스차일드를 국유화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로스차일드 집안내 와인 전쟁도 중단되었다. 로스차일드 간판(de Rothschild Frères)이 내려지고 유럽은행(Compagnie Européenne de Banque)이라는 간판이 새로 올라갔다. 제임스 로스차일드가 설립한 파리 로스차일드는 165년만에 마감하게 되었다.

보상금은 일반 가치보다 턱없이 낮았다. 주주에 따라 1~5억 프랑을 받았다.

파리은행의 문을 닫고 기 로스차일드는 <르 몽드>지에 글을 게제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프랑스인은 부에 대한 질투심이 강하다. 그러므로 정치가들은 로스차일드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 페탱 정부(비시 정부)에서는 유대인으로, 미테랑 정부에서는 바리새인으로 ……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두 번이나 쓰레기 속에서 인생을 재출발해야 하다니, 나로서는 너무 무겁다. 은퇴를 강요받은 나는 저항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가 저주했듯이 미테랑이 국유화하면서 만든 유럽은행은 1년도 안 돼 적자의 수렁에 빠졌다.

 

영국 에벌린과 파리 다비드 로스차일드 /위키피디아
영국 에벌린과 파리 다비드 로스차일드 /위키피디아

 

(Guy)의 저항은 뉴욕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사기업을 후원했고 과도한 정부 개입을 비난했다. 파리의 로스차일드 일가는 런던 로스차일드가 뉴욕 월스트리트에 세운 RIT에 참여해 새로운 분야인 M&A 분야에 뛰어들었다.

기 로스차일드는 일가가 뉴욕에 뒤늦게 찾아온 것을 후회했다. 그는 할아버지 알퐁스는 1848년에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친척들에게 이곳에 정착해 살라고 강조했다. 그때 할아버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정말로 후회한다. 우리가 미국 금융계에 뛰어들기까지 100년이나 걸렸다.”고 말했다.

런던에서 쫓겨난 제이컵과 파리에서 쫓겨난 기는 뉴욕의 RIT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고객예탁금이 1986년에 45천억 파운드로 1981년의 다섯배나 늘렸다.

 

미테랑 정부는 은행은 국유화했지만 로스차일드가가 가지고 있는 다른 업종은 국유화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파리 집안의 재산 가운데 60% 이상이 비은행 분야였다. 파리 가문은 파리-오를레앙(PO: Paris Orléans)이라는 지주회사를 만들어 비금융부문 자산을 그 아래에 묶었다.

기의 아들 다비드(David)는 사촌형제 에릭(Eric) 등과 힘을 합쳐 미테랑의 정부에 도전했다. 그들은 은행설립 허가를 냈다. 미테랑의 좌파 정부는 국유화한 은행들이 적자를 내면서 경제를 망치고 있었기 때문에 로스차일드의 은행허가를 막을 명분이 없었다. 당국은 은행 허가를 내주되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허락하지 않았다. 19847월 로스차일드가는 파리-오를레앙(PO) 은행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샹젤리제 거리로 진입했다. 새 로스차일드 은행은 국영은행과 경쟁을 벌였다. 2년 동안 국영조직은 영업적자에 허덕이는 동안에 파리오를레앙 주식은 3배나 올랐고, 은행 영업도 25%의 세금을 물고도 충분한 이익을 냈다. PO은행은 1986년에 로스차일드 이름을 얻어 로스차일드 시에 은행(Rothschild & Cie Banque)이란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

포도주 회사의 영업은 승승장구했다. 1985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1787년산 라피트 포도주 한병이 105천 파운드에 팔려 세계적인 뉴스를 만들었다.

로스차일드 은행 로고 /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 은행 로고 /위키피디아

 

2003년 영국 로스차일드(N M Rothschild & Sons)와 프랑스 로스차일드(Rothschild & Cie Banque)는 합병을 단행했다. 합병회사(Rothschild & Co)는 파리와 런던에 동시에 본부를 두고 있다. 회장은 프랑스의 다비드가 맡았다. 지주회사는 파리-오를레앙, 그 위에 콩코디아(Concordia BV), 또 그 위에 로스차일드 가문이 지분을 갖는 구조다.

로스차일드 가문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별도의 회사가 있는데, 회사 이름이 에드몽 드 로스차일드(Edmond de Rothschild Group). 파리 집안의 에드몽 아돌프(Edmond Adolphe)1953년에 만든 회사인데, 사금융, 자산관리, 관광 레저, 농업, 호텔, 요트경기 등에 진출해 있다. 이 회사는 2007~2008년 금융위기 때에 손해를 보지 않았다고 발표한 바 있다.

미국에 설립한 투자회사 RIT는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되어 있다. RIT는 상당부분 자신을 금괴로 보유하고 있으며, 에너지 관련분야에도 투자하고 있다.

 

로스차일드는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근본적인 타격을 받았지만, 전후에 재기했다. 하지만 유럽에 경쟁사들이 성장한데다 미국 중심의 금융파워가 세계를 휘어잡는 와중에 18~19세기에 가졌던 독점적 지배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수시로 금융위기가 터질 때마다 유대인 배후설이 나돌고, 그 뒤에 로스차일드가 있다는 음모론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다.

 

로스차일드 가계도 /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 가계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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