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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나는 집대통령”, 재임 최대치적 자부…“인상” “동결” 분양가 논쟁
노태우 부동산 정책⑨…2백만호 대역사
2019. 12. 09 by 김현민 기자

 

19921022일 노태우 대통령은 퇴임을 4개월 앞두고 분당시범단지 입주민을 찾아갔다. 대통령의 방문에 주민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시범단지 내 상가에 들러 상품이 잘 진열돼 있는지를 찬찬히 뜯어보고 가가호호를 방문, 생활에 불편이 없는지를 물어보았다.

노 대통령은 이날 아무 것도 없던 곳에 3년만에 쾌적한 신도시가 세워진 것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낀다며 감회를 피력했다.

경부고속도로 판교인터체인지에서 서울로 오다보면 오른쪽이 어마어마하게 아파트군을 형성하고 있는 분당신도시, 그리고 자유로를 따라 한강 하구의 북방에 세운 일산 신도시. 이둘 두 도시의 건설에 노 대통령은 각별한 애착을 가졌다. 신도시에 대한 대통령의 자부심은 주택 2백만호 건설정책에 대한 비판 자체를 무시했다.

주택 2백만호 건설이 한창 추진될 무렵, 감사원이 일부 지방에서 시군별 주택건설 물량을 잘못 배정해 주택난이 심각한 곳은 건설물량이 적어 주택난이 여전하고 주택보급률이 높은 지역은 더 많은 건설 물량을 배정, 미분양으로 주택이 남아 돌아간다는 감사결과를 냈다. 이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노 대통령은 보도를 접하고 한밤중에 김영준 감사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호통을 쳤다.

김 원장, 왜 그런 보도가 나가게 합니까. 그런 보도가 나가면 주택 2백만호 건설정책 전체가 잘못된 것처럼 비춰질 수 있쟎습니까. 보도 경위를 조사해 보고하시오.”

노 대통령은 주택 200만호 정책에 대한 약간의 비판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스스로 박정희 대통령이 70년대 길(도로) 대통령이었다면, 나는 집(주택)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주택 200만호 건설을 재임 중 최대치적으로 자부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후 개선문을 짓고 파리의 도시구조를 재편성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동경)을 건설했듯이 도시건설은 통치권자면 누구나 욕심내는 사업일 것이다.

특히 분당·일산의 두 도시는 이같은 노 대통령의 정책적 의지와 문희갑 경제수석, 박승·권영각·이상희 건설장관등 실무자들의 밀어붙이기식 추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무자 또한 노 대통령만큼이나 신도시 건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왜 무리하게 신도시를 추진했느냐. 부실공사가 아니냐 등등, 온갖 얘기가 있었지만, 당시 상황을 벌써 잊어버리고 하는 소리입니다. 제조업에 대한 투자를 줄이는 한이 있어도 투기 억제가 절대 필요했습니다. 집값 상승, 땅값 상승 등 6공화국 초기의 투기붐은 결국 신도시 건설로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문희갑 당시 경제수석)

신도시건설 담당자들에겐 분당보다는 일산이 더 매력적이었다. 한강 이북에 도시다운 도시도 없었거니와 도시의 기본 조건인 강을 끼고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통일에 대비, 휴전선 가까이에 멋진 도시를 하나쯤은 건설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일산을 신도시 입지로 결정한 19894월말 박승 건설부 장관은 주택공사에 일산신도시의 도시계획을 그려 오라고 지시했다. 주공은 며칠만에 경의선 철도가 도시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그 주변에 아파트군이 들어서는 지도를 그려왔다. 기존의 철도를 신도시 연결 교통수단으로 활용하자는 취지였으나, 도시가 갈라지고, 철도가 도시계획에 장애물이 될 우려가 있었다.

박 장관은 철도의 위쪽()이나 아래쪽()에 도시를 그려 오시오라며 주택공사의 청사진에 퇴짜를 놓았다. 그랬더니 주공이 현재처럼 경의선 아래쪽에 일산신도시를 그려왔다.

일산은 해발 6m로 평상시에는 한강수위보다 높지만 홍수 때 수위보다 4m나 낮았다.

박 장관은 도시 조성에서 나오는 흙으로 메우면 되지 않는가라며 주공안에 결재를 했다. 그러나 박 장관은 그해 7월 폭우로 한강둑이 무너져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멋진 도시를 만든다는 계획은 건설업체들이 따라주지 않으면 이룰수 없었다. 절대군주 시절처럼 부역이나 공출을 강요할 수 없는 만큼 건설업체들에 시장경제의 원칙을 제공해야 했다. 즉 아파트라는 상품에 적절한 이윤을 붙여 주어야 했는데, 분양가 문제는 신도시 건설 초기에서 6공화국 말기까지 건설부를 곤욕스럽게 했다.

1989217일 서울 상의클럽. 박승 건설장관이 조찬간담회 연사로 초청을 받았다.

중산층 이상의 주택보급은 시장 기능에 맡긴다는 것이 정부 방침입니다. 주택건설업자의 주택건설 의욕을 부추기기 위해 연내 가까운 시일 안에 아파트분양가를 상향 조정하겠습니다.”

그의 연설 가운데 이 짤막한 말 한마디가 큰 파문을 일으켰다. 때는 공교롭게 아파트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는 시기였고, 박 장관의 발언이 곧바로 집값 상승에 빌미를 제공했다. 학자 출신의 박 장관이 경제원론을 폈지만, 두터운 관료 조직의 벽을 뚫지 못했다. 문희갑 수석이 반대했고, 경제기획원이 나서 불을 껐다.

그해 4월 분당개발을 검토할 때 박 장관은 또 분당 개발과 아파트 자율화를 동시에 추진하자고 주장했으나 문 수석의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 문 수석은 분당을 개발하되 아파트 값은 동결하자며 박 장관을 제지했다. 박 장관이 분양가 문제로 사사건건 문 수석과 견해 차이를 보였고, 그헤 729일 물러나면서 분양가 자율화는 잠복하고 말았다.

박승 당시 장관의 말을 인용해보자.

당시 아파트 분양가는 평당 134만원, 시중 거래가격은 평당 500만원이었습니다. 이 차액을 입주자는 프리미엄으로 먹었고 아파트 투기로 직결됐습니다. 시중가와 분양가의 차이를 없애야 건설업체들이 집을 짓게 되고, 주택공급이 늘어나 투기를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그때 3저 호황에 따른 여유자금이 아프트 시장에 몰려 집값이 폭등했고, 그 시기에 분양가 자율화 방침이 맞물려 시민이 동요한 것입니다.”

분양가 자율화 결정이 좌절되고 건설업체들이 수시로 이 가격으로는 집을 못 짓겠다고 나왔다. 권영각 건설장관은 19905월 땅값과 건축비를 아파트 분양가에 반영하는 원가연동제를 실시, 건설업체를 달랬고, 채권입찰 상한제, 주택상환사채 제도 등의 조치들이 잇달아 단행됐다. 아파트 값을 억제하면서 건설자금을 조달해야 한다는 이중의 논리에 시달리면서 신도시는 속속 건설됐고, 19919월 분당 첫입주 이후 신도시로 이삿짐이 몰리기 시작했다.

주택 200만호 정책은 1991년에 목표를 달성, 4년만에 전국의 주택 600만호의 3분의1에 해당하는 200만호의 집이 전국 각처에 들어선 것이다.

노태우 정부의 주택정책은 무제한 물량공급에 가까운 것이었고, 세계 여러나라의 주택담당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대역사였다.

홍철 당시 청와대 비서관의 설명이다.

일본이 도쿄 외곽에 다마(多摩) 주택단지를 건설하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부동산 투기를 위기관리의 차원에서 대처했기 때문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버블 경제에 시달리며 부동산투기가 일어난 일본은 금융긴축을 통해 투기를 가라앉혔는데, 우리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6공화국의 부동산 투기는 여유를 가지고 택지를 개발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주택 200만호 건설. 특회 분당·일산 신도시의 건설은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였다. 유창순 전경련 회장은 1993년초 퇴임사에서 “6공화국 정책 가운데 주택 200만호 정책이 가장 문제가 있다고 성토했으나, 노 대통령에겐 그 어느 사업보다 자신 있게 추진한 사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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