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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이야기
제국초기 아그리파, 물 관리에 역점…공중목욕탕 만들어 시민들 휴식처 제공
[물과 문명] 11개 수로로 백만 도시 관리한 로마
2019. 04. 06 by 아틀라스

 

로마에서 트레비 분수(Trevi Fountain)는 관광명소다. 세 갈래의 길(Trevia)이 합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연못에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비는 곳이다.

이곳 왼쪽 패널 부조에 로마제국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측근인 마르쿠스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가 설계도를 펼쳐 들고 비르고 수로(Aqua Virgo)의 건설을 관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트레비 분수는 비르고 수로의 종착지다.

 

로마 시내 트레비 분수 /위키피디아
로마 시내 트레비 분수 /위키피디아

 

로마시는 제국 시절에 인구 100만의 대도시였다. 이 도시에 물을 어떻게 공급하는지 여부가 도시 생태계에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로마의 물공급은 근대, 나아가 현대 도시의 입장에서도 가히 놀라운 수준이었다. 로마가 거대한 제국을 경영한 밑바탕에는 우수한 수자원을 관리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트레비 분수의 아그리파 부조 /위키피디아
트레비 분수의 아그리파 부조 /위키피디아

 

제국의 수도 로마의 수리시설은 아우구스투스가 제위를 넘겨주려고 할 정도로 끔찍이 좋아 했던 그의 친구 아그리파의 몫이었다. 아그리파는 로마상하수도 시설의 완성자라고 할수 있다.

아그리파는 로마의 조영관(造營官)을 맡아 도시의 시설과 공공서비스를 관장했다. 수리시설은 아그리파의 도시개발 계획의 중심 과제였다. 그는 사재를 털어 1년만에 수로 세 개를 복구하고 한 개를 새로 건설함으로써 물관리 시스템의 용량과 범위를 확대했다. 700개 수조와 500개 분수, 130개의 급수탱크를 만들고, 공공목욕탕도 지었다.

그는 하수구도 청소했다. 직접 보트를 타고 하수구로 들어가 조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그리파는 BC 19년에 비르고 수로를를 만들었는데 수량도 많고 물이 맑고 차가웠다. 이 물은 로마 최초로 대중 목욕탕에 공급되었다. 비르고 수로는 대부분 지하에 매설되었고, 로마가 멸망한 후에도 물 공급이 끊기지 않았다. 이 비르고 수로는 파우미 분수로 흘러들어갔다가 트레비 분수에서 끝이 난다.

이그리파가 건설한 공공목욕탕은 고대 로마의 사회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농부도 농사일을 끝내고 몸을 씻었고, 귀족들도 포도주를 마시며 목욕탕에서 대화하고 쉬었다.

 

로마의 수로와 비르고 수로 /위키피디아
로마의 수로와 비르고 수로 /위키피디아

 

로마는 벽돌 도시였다. 이 도시에 사는 로마인들이 먹고 마시고 청소하고 목욕하는 물은 11개의 수로를 통해 도시 외곽에서 끌어들였다.

최초의 수로 건설자는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아피우스 클라우스디우스였다. 그는 BC 312년에 아피아 가도 지하에 16km의 수로를 건설했으니, 이를 아피아 수로라 했다. 수로는 로마에 앞서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에서 건설되었고, 그리스에서도 수로의 초기형태가 나타났다. 로마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로마의 수리시설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프랑스 남부의 퐁뒤가르 수로는 48m3층 구조로 아직도 부분적으로 기능을 하고 있다. 스페인의 세고비아 수로는 아치 모양의 수로 다리이고, 영국 바스에도 공공목욕탕이 남아 있다. 로마의 수리 시스템은 남유럽, 독일, 북아프리카, 소아시아의 영토에도 확대, 보급되었다.

 

프랑스의 퐁 뒤가르 수로 /위키피디아
프랑스의 퐁 뒤가르 수로 /위키피디아

 

로마 제국의 공공시스템은 로마시에 가장 잘 발달되었다. 아그리파 이후에도 물의 수요가 늘어나 끊임없이 새로운 수로를 건설했다.

로마는 서기 236년까지 총연장 492km의 수로 11개를 확보했으며, 일부 수원지는 92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네트워크는 1,352개의 분수와 연못, 11개의 대형목욕탕, 856개의 공중목욕탕에 물을 공급했다.

로마에도 물을 가진자와 갖지 못한자로 구분되었다. ‘물의 세계사를 쓴 스티븐 솔로몬은 물 유산계급이 공급되는 물의 5분의 2를 썼고, 일반인은 10%밖에 쓰지 못했다고 밝혔다. 나머지 절반은 대부분 황제가 사용했다. 공공기념물, 목역탕등에 쓰이는 물은 황제의 몫이었다.

따라서 로마에도 물 절도범이 있었다. 물 부족 탓이라기보다 서민들에게 돌아가는 물이 모자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원로원 의원이었던 율리우스 프론티누스는 자신의 논문에서 벽을 뚫고 도관에 손을 댄 물도둑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할 것을 주장한 사실이 이런 분위기를 증명한다.

군인황제 시대 이후 로마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로마는 수리시설을 신설하기는커녕 복구조차 하기 어려운 형편에 처했다. 물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로마는 결국 외적의 침입을 허용했고, 최후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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