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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조 비서관 윗분 누구냐” 의혹 증폭…전국서 “재수사” 시위
수서사건④…심판대에 서다
2019. 12. 13 by 김현민 기자

 

199124일 오전 8시가 조금 지난 시각, 장병조 청와대 문화체육 담당 비서관은 출근하자마자 이상배 행정수석의 호출을 받았다. 장 비서관이 행정수석실에 들어서자 이 수석이 기다렸다는 듯 호통을 쳤다.

장 비서관, 당신이 서울시 회의에 참석했다고 기자들에게 얘기했습니까.”

어제 저녁에 누군가 집에 전화를 걸어서 통화한 것 같은데요.”

이 사람, 그게 얼마나 엄청난 파문을 불러올지 알기나 합니까.”

바로 직전 라디오에선 8시 아침 종합뉴스를 통해 장 비서관이 서울시 대책회의에 참석한 사실이 톱뉴스로 보도됐다.

수서택지 특별분양 사건에 청와대가 서울시에 보낸 협조공문의 작성자는 장병조 문화체육 담당 비서관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행정담당 비서관이 아닌 문화체육 비서관이 협조공문을 작성하고 대책회의에까지 참석한 것은 중대한 의혹입니다.”

23일자 조간신문의 보도로 터져나온 수서택지 특별분양 의혹사건은 청와대가 이 사건에 얼마나 개입했는지에 초점에 맞춰졌다. 행정비서관실 측은 바빠서 장 비서관이 대신했을 뿐이라는 해명으로 일관했으나, 적어도 1년 전부터 장 비서관이 대신했을 뿐아니라 혼자서 수서문제에 개입한 사실을 납득시키기 어려웠다. 장 비서관의 윗선에서 지시를 내렸을 것이고, 수억원대의 정치자금이 청와대와 한보그룹 사이에 거래됐을 것이라는 설이 시중에 파다하게 떠돌았다.

다음날인 25일 하오 광주시내 전남도청. 노태우 대통령은 전남도정 업무계획을 보고받은 뒤 정해창 비서실장을 급히 불렀다.

수서택지 공급과 관련한 각종 행정처리와 정책결정 과정을 철저히 감사해, 뭐가 옳고 그른지 명백히 가려 부정이나 비리가 발견되면 즉시 수사토록 하시오. 감사를 통해 시정할 것이 있으면 즉시 시정조치하고 이와 관련한 모든 국민적 의혹을 해소토록 하시오.”

노 대통령의 지시는 김영일 사정수석을 통해 김영준 감사원장에게 전달됐으며, 감사원은 특별감사반을 편성, 수서사건에 대한 전면감사에 들어갔다.

이보다 앞선 19901224일 고건 서울시장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기자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국회 건설위가 수서택지 특별공급을 촉구하는 결정을 했기 때문에 특별공급을 허가하지 않을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직장주택 조합원들의 자격여부를 정밀 심사해야 하겠습니다.”

고 시장의 말은 특별분양이 엄청난 특혜이기 때문에 특혜자 수를 최대한 줄여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고 시장은 3일뒤 전격 경질되고 말았다. 고 시장은 198812월 취임 일성으로 시장은 물론 전직원이 공직윤리를 지켜 복마전이라는 오명을 씻도록 하자며 청탁배격을 유난히 강조한 시장이었다. 그는 퇴임 직후인 911월 시청 직원들에게 보낸 연하장에서도 이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여러분들의 참여와 협조 속에 오직 서울시정에 땀과 정성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제 평생 커다란 보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서울시를 괴롭혀온 외부압력이나 이권청탁을 철저히 막아내겠다고 한 취임때의 약속을 지킬수 있었던 것은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고 시장의 퇴임은 청와대 지시에 반발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세직 시장이 수서 문제를 해결하자 서울시청 직원들의 불만이 고조됐다. 이런 와중에 청와대가 서울시에 부당하게 지시했고, 수서 사건과 관련한 청와대 협조공문이 있다는 이야기가 정치권에 흘러들어갔다. 서울시 행정문제로 끝날 사안이 정치문제로 비화될 소지를 안았고, 이 문제는 마침내 정치문제로 폭발하고 만다.

 

1991년 수서 비리사건이 터지자 경제정의실천연합등 시민단체 주도의 시위가 확산됐다. /자료 사진
1991년 수서 비리사건이 터지자 경제정의실천연합등 시민단체 주도의 시위가 확산됐다. /자료 사진

 

노 대통령이 수서 문제에 대해 특별감사를 지시하던 날(25) 상오. 김운환 의원(민자·부산 해운대)이 청와대의 압력이 있었음을 밝히는 내용을 기자들에게 넌지시 흘렸다.

깜짝 놀랄만한 얘기가 있소. 21일 건설위에서 내가 수서문제에 대해 질의하던 날, 오용운 위원장(민자)이 나를 불러 청와대 김종인 경제수석이 수서청원 심사소위가 열리던 날(901210) 전화를 해 문제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 말라며 원만히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했소. 그렇지만 이 사실이 보도되면 큰일입니다.”

김 의원은 말을 이어나갔다.

건설부도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지요. 처음에는 특별분양을 위한 법적근거가 없다고 했다가 나중에 유권해석 하나로 방침을 바꾼 것은 한보라는 특정기업에 특혜를 주기 위해 법규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김 의원의 발언은 대서특필됐고, 장 비서관의 윗선이 어딘가에 언론은 물론 국민들의 관심이 모아졌다. 김 의원의 말대로 큰일이 났다. 청와대가 발칵 뒤집혔다. 민자당내 민정·공화계 의원들은 민주계인 김 의원을 해당행위로 규정, 징계해야 한다고 법석을 떨었다.

김 의원은 김영삼 대표에게 불려가 해명을 해야 했다.

전혀 그런 얘기를 한 사실이 없습니다.”

알아서 수습하시오.”

김 의원은 청와대 고위층의 개입사실을 전면 부인했고, 청와대 비서실도 즉각 진화에 나섰다. 이수정 청와대 대변인은 국회 건설위의 청원 심사과정에서 청와대 비서관이 건설위에 전화를 건 사실이 없다고 못밖았다.

6일 밤, 물러난 고건 전 시장과 박세직 시장이 TV에 각각 나와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박 시장이 선제 공격을 했다.

수서지구 주택조합에 대한 택지특별공급은 고건 전 시장이 퇴임 직전에 이미 결정한 것입니다. 저는 다만 고 시장이 결정한 사실을 추인했을 뿐입니다.”

TV에서 박 시장의 코멘트가 나오자 고건씨는 즉각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해명했고, 그 내용도 국민들에게 전달됐다.

재임 중에 수서택지 특별공급을 결정한 바 없습니다. 고민은 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민간인 5명으로 구성된 민원심사위에서 다시 검토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현직 두 시장은 다음날 전화를 통해 오해를 씻기는 했다. 윤백영 부시장은 이를 놓고 두 시장의 시각과 해석 상의 차이는 있으나 당시 누구였든 허가를 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라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수사를 않겠다고 버티던 검찰은 사건이 확대되자 27일 대검 중수부에 수사 착수를 지시했다.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등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출국정지 조치가 내려졌다. 그날 국회에는 국회의원 관련설을 무마하기 위해서인 듯 서둘러 5개항으로 된 의원 윤리강력을 채택했다.

검찰 수사는 속전속결 식으로 진행됐다. 12일 하오 고건 전 시장과 박세직 시장에 검찰에 불려갔고, 사건의 주역인 정태수 한보그룹회장도 철야조사를 받았다. 다음날 오용운·이태섭·이원배·김동주·김태식 의원이 조사를 받았다.

14일 검찰은 한보의 정 회장을 구속한데 이어 15일 오용운 의원등 국회의원 5명과 장병조 비서관, 이규황 건설부 국토계획국장등을 구속했다.

청와대는 수서사건의 국면전환을 위한 D데이를 218일로 잡았다. 노 대통령은 수서사건에 따른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부총리에 최각규씨, 건설장관에 이진설씨, 서울시장에 이해원씨를 각각 임명하는등 문책성 개각을 단행했다. 그리고 같은 날 검찰은 수서사건에 대한 종합수사결과를 발표, 사실상 수사종결을 선언했다.

다음날인 19일 노 대통령은 당3역을 경질한데 이어 하오 7TV를 통해 대국민 사과 담화를 발표했다.

서울 수서지구 택지공급을 둘러싼 물의로 국민 여러분들의 걱정이 크셨을 것입니다. 정부는 보름간에 걸쳐 집중적인 감사와 수사를 벌인 결과, 주택조합에 택지를 공급하는 결정에 잘못이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부정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노 대통령의 담화는 국정의 책임자로서 솔직한 표현이었다.

특히 청와대의 비서관이 이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것은 저의 불찰이라 아니할수 없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깨끗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굳은 결의를 새로이 하면서.”

그러나 노 대통령의 담화는 한국판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6공화국 최대의 치부에 대한 국민적 의혹을 말끔히 씻어내지는 못했다. 다음날 이기택 의원등 민주당원들은 덕수궁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고, 전국 각지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수서사건의 전면 재수사를 촉구하는 등 사건이 확대될 조짐을 보였다.

그러던 중 226일 중동에서 걸프전이 터졌다. 이와함께 수서사건은 갖가지 의혹을 남긴채 국민적 관심에서 멀어졌고,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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